数千万アジア人死に追いこんだ殖民支配・太平洋戦争責任者 日王 ヒロヒト
憲法によって郡統帥権・宣伝包告圏主導的行事
真珠湾攻撃した日… 一日中ヘグンボック身なりでフムッ
中 などに化学部隊配置言い付けてホロコースト傍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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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月中旬 李明博 大統領の独島訪問と天皇お詫び発言が 日本 列島を賑やかにさせた. 次期総理 1順位で数えられる民主党マエしなさいセイジ(前原誠司) 政調会長は天皇(天皇・天皇)は国家元首だと主張した. 日本敗戦以後米占領政府の統治必要によって生き残った ¥"天皇制¥"は日本の保守化ないし極右化をけしかける時限爆弾みたいな存在だ. 日本は以前(終戦) 67年間心より自分たちが戦争の中でやらかした悪事(悪行)に対して謝らなかった. 一方ドイツは 2次大戦敗戦後戦犯たちの責任を徹底的に問った. ドイツリーダーたちは機会ある度に過去悪事に対して謝ったし, 最近にはナチ収容所で雑事をした人の子孫たちまでこの謝りの隊列に同参した.
来る 29日は日帝が韓国を強制併合した庚戌国恥 102年目になる日だ. 天皇の戦争責任を察してみながら同じ戦犯国家である日本がドイツと違う道を歩くようになった過程を糾明して見る.
負けることは アメリカ 及び イギリスに対して戦争を宣布する. 荷の陸海だね将兵に全力をつくして交戦に林して….
1941年 12月 8日ヒロヒト(裕仁) 天皇は戦争を始めるという詔勅を出した. 植民地朝鮮には徴兵と徴用, 日本軍隊慰安婦の出現を知らせて, 数千万人のアジア人を死に追いこんだ太平洋戦争開戦詔勅だった. ヒロヒト天皇は 1975年インタビューで戦争開始の時はもう閣議で決定が下った状態だったし私はその決定を覆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 これは日本憲法の条項に合致されると信じる, 戦争終決当時私の自らの意味によって決めたと言った. 太平洋戦争の責任は否認しながら, 戦争を終わらせた平和主義者で行世ハンゴッだ.
しかしヒロヒト天皇は明治憲法によって軍(軍) 統帥権を行使する大元帥(11兆)と同時に, 代わりの補助を受けて権力を行使する最高権力者(55兆)だった. 宣戦布告も憲法上天皇に属した権限だった. 海軍侍従武官組Eiichiで(城英一郎)は開戦詔勅を発表して真珠のみを攻撃したこの日ヒロヒト天皇の日程を時間単位で整理した日記終わりにこんなに使った. 今日の一日中ヘグンボック身なりで嬉しく拜謁を受け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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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争を終わらせた平和主義者ヒロヒトのイメージも事実と違う. 負け色が濃かった 1945年 2月 14日ヒロヒトは戦争終決のために直接出ることを権限河野にフミマに前総理の提案を (戦争終決は) もう一度戦果をあげた後ではなければめったに話しにくいと拒否した. ヒロヒトは同じ日この戦争は最善をつくせば勝つことができると信じるがあの時まで国民がこんなに堪えてくれるか, それが心配だだと言ったと言う.
ヒロヒト天皇は 1931年 9月中国侵略の序開きを開いた満州の変でも自由ではない. 内閣の同意なしに軍事行動に出た関東軍を制止するどころか, 今度は仕方ないがこれから気を付けなさいという話ばかり言った. ヒロヒトは来月要衝地である遼寧城ジンジャー優(錦州) 爆撃を在宅した. 1次大戦後初めて実施された都市爆撃だった. ヒロヒトを仕えた国侍従武官場はヒロヒトがジンジャー優近所で装学量の軍隊が再組織される場合事件が大きくなることは仕方ないか? もし必要だったら私は事件が拡がるのに同意することができると言ったと記録した.
ひいてはヒロヒト天皇が日中戦争と太平洋戦争の虜虐待と毒ガス使用に対する責任があるという主張も出る. ¥"ヒロヒト評伝¥"でピューリッツァ賞を受けたホボトビックスビングヘムトンデ教授はヒロヒトが日本が 1929年戦争虜虐待を禁止したジュネーブ協約に調印したことを分かりながらも大量虐殺と虜虐待を防止するように軍に命令を下さなかったと言った.
ヒロヒト天皇は 1937年 9月 11日付けで参謀総長を通じて化学兵機特殊部隊を傷害に配置する命令を下した. 1938年に入ると中国とモンゴル主要戦闘地域で大規模で毒ガスが使われた. ホボトビックスは毒ガスは日中戦争期間始終ヒロヒト・大本営・統帥部が徹底的に管理した武器と言いながら通常天皇の在宅が下ろされた後参謀総長指示が発令されて, 大本営陸軍部を通じて現地君に送ったと言った.
日本の新聞には載せられることができない記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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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신문에는 실릴수 없는 기사
수천만 아시아인 죽음으로 몰아넣은 식민 지배·태평양전쟁 책임자 日王 히로히토
헌법에 따라 군통수권·선전포고권 주도적 행사
진주만 공격한 날… "종일 해군복 차림으로 흐뭇"
中 등에 화학부대 배치 명령하고 대량학살 방조 .par:after{display:block; clear:both; content:"";} 이달 중순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일왕 사죄 발언이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차기 총리 1순위로 꼽히는 민주당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정조회장은 "덴노(天皇·일왕)는 국가원수"라고 주장했다. 일본 패전 이후 미 점령 당국의 통치 필요에 따라 살아남은 "천황제"는 일본의 보수화 내지 극우화를 부추기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다. 일본은 종전(終戰) 67년간 진심으로 자신들이 전쟁 중 저지른 악행(惡行)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반면 독일은 2차대전 패전 후 전범들의 책임을 철저히 물었다. 독일 지도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과거 악행에 대해 사과했고, 최근에는 나치 수용소에서 잡일을 했던 사람의 후손들까지 이 사과의 대열에 동참했다.
오는 29일은 일제가 한국을 강제병합한 경술국치 102년째 되는 날이다. 일왕의 전쟁 책임을 짚어보면서 같은 전범국가인 일본이 독일과 다른 길을 걷게된 과정을 규명해 본다.
"짐은 미국 및 영국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다. 짐의 육해군 장병에게 전력을 다해 교전에 임하고…."
1941년 12월 8일 히로히토(裕仁) 일왕은 전쟁을 시작한다는 조칙을 내보냈다. 식민지 조선에는 징병과 징용, 일본군위안부의 출현을 알리고, 수천만 명의 아시아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태평양전쟁 개전 조칙이었다. 히로히토 일왕은 1975년 인터뷰에서 "전쟁 개시 때는 이미 각의에서 결정이 내려진 상태였고 나는 그 결정을 뒤집을 수 없었다. 이것은 일본 헌법의 조항에 합치된다고 믿는다", "전쟁 종결 당시 내 스스로의 뜻에 따라 결정했다"고 말했다. 태평양전쟁의 책임은 부인하면서, 전쟁을 끝낸 평화주의자로 행세 한것이다.
하지만 히로히토 일왕은 메이지 헌법에 따라 군(軍) 통수권을 행사하는 대원수(11조)이자, 대신의 보필을 받아 권력을 행사하는 최고권력자(55조)였다. 선전포고 또한 헌법상 일왕에 속한 권한이었다. 해군 시종무관 조 에이이치로(城英一郞)는 개전 조칙을 발표하고 진주만을 공격한 이날 히로히토 일왕의 일정을 시간 단위로 정리한 일기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오늘 하루 종일 해군복 차림으로 흐뭇하게 배알을 받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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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히토 일왕은 1931년 9월 중국 침략의 서막을 연 만주사변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내각의 동의 없이 군사 행동에 나선 관동군을 제지하기는커녕, "이번에는 어쩔 수 없으나 앞으로 주의하라"는 말만 했다. 히로히토는 다음 달 요충지인 랴오닝성 진저우(錦州) 폭격을 재가했다. 1차대전 후 처음 실시된 도시 폭격이었다. 히로히토를 섬긴 나라 시종무관장은 히로히토가 "진저우 부근에서 장학량의 군대가 재조직될 경우 사건이 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가? 혹시 필요하다면 나는 사건이 확대되는 데 동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나아가 히로히토 일왕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포로 학대와 독가스 사용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히로히토 평전"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허버트 빅스 빙햄튼대 교수는 히로히토가 일본이 1929년 전쟁포로 학대를 금지한 제네바 협약에 조인했음을 알면서도 대량 학살과 포로 학대를 방지하도록 군에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했다.
히로히토 일왕은 1937년 9월 11일자로 참모총장을 통해 화학병기 특수부대를 상해에 배치하는 명령을 내렸다. 1938년에 접어들자 중국과 몽골 주요 전투지역에서 대규모로 독가스가 사용됐다. 허버트 빅스는 "독가스는 중일전쟁 기간 내내 히로히토·대본영·통수부가 철저히 관리했던 무기"라며 "통상 일왕의 재가가 내려진 다음 참모총장 지시가 발령돼, 대본영 육군부를 통해 현지군에게 보내졌다"고 했다.
헌법에 따라 군통수권·선전포고권 주도적 행사
진주만 공격한 날… "종일 해군복 차림으로 흐뭇"
中 등에 화학부대 배치 명령하고 대량학살 방조 .par:after{display:block; clear:both; content:"";} 이달 중순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일왕 사죄 발언이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차기 총리 1순위로 꼽히는 민주당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정조회장은 "덴노(天皇·일왕)는 국가원수"라고 주장했다. 일본 패전 이후 미 점령 당국의 통치 필요에 따라 살아남은 "천황제"는 일본의 보수화 내지 극우화를 부추기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다. 일본은 종전(終戰) 67년간 진심으로 자신들이 전쟁 중 저지른 악행(惡行)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반면 독일은 2차대전 패전 후 전범들의 책임을 철저히 물었다. 독일 지도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과거 악행에 대해 사과했고, 최근에는 나치 수용소에서 잡일을 했던 사람의 후손들까지 이 사과의 대열에 동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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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8일 히로히토(裕仁) 일왕은 전쟁을 시작한다는 조칙을 내보냈다. 식민지 조선에는 징병과 징용, 일본군위안부의 출현을 알리고, 수천만 명의 아시아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태평양전쟁 개전 조칙이었다. 히로히토 일왕은 1975년 인터뷰에서 "전쟁 개시 때는 이미 각의에서 결정이 내려진 상태였고 나는 그 결정을 뒤집을 수 없었다. 이것은 일본 헌법의 조항에 합치된다고 믿는다", "전쟁 종결 당시 내 스스로의 뜻에 따라 결정했다"고 말했다. 태평양전쟁의 책임은 부인하면서, 전쟁을 끝낸 평화주의자로 행세 한것이다.
하지만 히로히토 일왕은 메이지 헌법에 따라 군(軍) 통수권을 행사하는 대원수(11조)이자, 대신의 보필을 받아 권력을 행사하는 최고권력자(55조)였다. 선전포고 또한 헌법상 일왕에 속한 권한이었다. 해군 시종무관 조 에이이치로(城英一郞)는 개전 조칙을 발표하고 진주만을 공격한 이날 히로히토 일왕의 일정을 시간 단위로 정리한 일기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오늘 하루 종일 해군복 차림으로 흐뭇하게 배알을 받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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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히로히토 일왕이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포로 학대와 독가스 사용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히로히토 평전"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허버트 빅스 빙햄튼대 교수는 히로히토가 일본이 1929년 전쟁포로 학대를 금지한 제네바 협약에 조인했음을 알면서도 대량 학살과 포로 학대를 방지하도록 군에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했다.
히로히토 일왕은 1937년 9월 11일자로 참모총장을 통해 화학병기 특수부대를 상해에 배치하는 명령을 내렸다. 1938년에 접어들자 중국과 몽골 주요 전투지역에서 대규모로 독가스가 사용됐다. 허버트 빅스는 "독가스는 중일전쟁 기간 내내 히로히토·대본영·통수부가 철저히 관리했던 무기"라며 "통상 일왕의 재가가 내려진 다음 참모총장 지시가 발령돼, 대본영 육군부를 통해 현지군에게 보내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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