参政権とは読んで字のごとく選挙権と被選挙権に代表される政治に参加する権利で公民権とも言い民主主義国家の根幹をなす権利です。
戦前、日本の議会構成は選挙によって選ばれる代議士で構成される衆議院と、皇族、華族、勅任議員によって構成される貴族院の二院制でした。
戦前、日本の議会構成は選挙によって選ばれる代議士で構成される衆議院と、皇族、華族、勅任議員によって構成される貴族院の二院制でした。衆議院選挙の選挙権は、当初、納税額による制限がありましたが、1925年から25歳以上の日本国籍を持つ男子であれば本籍や納税額に関係なく投票が可能になり、被選挙権(立候補する権利)も本籍(出身地)による制限はなく、日本国籍を有する30歳以上の男子であれば誰にでも代議士への道は開かれていました。
ただし、選挙区は内地に限定されていたため、住む場所によって選挙権は制限されていたと言えます。
それはどういうことかと言えば、朝鮮や台湾などの外地は、日本と同じ国になったといっても、ついこの間まで違う国であったため、内地とは経済や教育の水準だけではなく、生活慣習、ものの考え方や言語が根本的に違いましたから、当初から憲法をはじめとする日本の法律は一部しか適用されていませんでした。
ですから外地は日本の法律を作る議員を選ぶ場ではないと考えられ、今のように在外投票というシステムがなかったため外地に住む人間は内地出身者であっても選挙区がないため選挙権や被選挙権がなく、反対に内地は日本の法令が適用されているわけですから、そこに住む日本人は出身に関係なく法律を作る議員を選んだり選ばれたりするということです。
つまり日本と朝鮮は併合により同じ国になったため両国の国民は同等の参政権を持つようになったのですが、法律の適用範囲の問題で出身を問わず外地居住民は国政選挙に投票でき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
そして、内地における参政権は、どこかの国のように空手形ではなく、選挙権に関しては日本語の読み書きができない朝鮮半島出身者にはハングルによる投票も認めており、被選挙権に関しても朝鮮半島出身者の朴春琴が朝鮮名のまま東京の選挙区から衆議院議員選挙に4度立候補し、そのうち2回当選して通算9年間代議士を務めています。
更に、1945年4月には改正衆議院選挙法と改正貴族院令が公布され朝鮮半島から7人、台湾から3人が貴族院議員に選ばれ、衆議院についても朝鮮、台湾、樺太に新たな選挙区を設け、それぞれ23人、5人、3人の定数を定めました。
確かに内地に比べて人口当たりの議員数は極端に少ないですが、順次増やしていく予定であり、彼我の経済や教育の水準の違いなどを考慮すれば開始当初としては妥当だっ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これに対して、終戦間際のアリバイ作りだという人もいるでしょうが、それは後知恵というもので、8月15日が来るまで日本が負けると思っていたのは詳細に戦局を知り客観的に判断できる極少数の人間だけでした。
それに当時は大多数の日本人が内鮮一体を固く信じており、たとえ戦争に負けたとしても台湾はともかく朝鮮が日本から分離するなどとは夢にも思っていませんでしたから、歩みは遅くとも日本政府は本気で一歩一歩、朝鮮半島出身者の政治参加への道を開く努力をしていたのです。
また、朝鮮半島においては朝鮮出身の日本人に政治家だけではなく高級官僚への道も開かれており、朝鮮総督府では知事13人中5名程度は朝鮮系日本人で主要局の局長クラスにも多数の人間が登用されており、1943年ころになると内地の中央官庁にも朝鮮系日本人が採用さ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
日本の朝鮮統治は当時世界中で欧米列強により当たり前のように行われていた現地を搾取対象としか見ない植民地政策とは明らかに一線を画していたことは否定できません。
もし、今も日韓併合が続いていれば国会議員の半数は外地から選ばれ、霞が関にも多数の朝鮮半島出身者が勤務し、朝鮮総督府は北海道や沖縄の開発庁のようなものになり、最終的には自ら解体していたかもしれません。
日本政府は併合当初から李王家の当主は王、その親族を王公族として皇族に準ずるとし、朝鮮貴族も日本の華族に準ずる待遇を与え、生まれたときから人権のなかった人たちを救うために奴隷制度を廃止し、かつてないほど学校を増設して教育機会の均等化を図り、創氏改名により名前に基づく差別の解消を試みるなど、一貫して朝鮮民族をなるべく同等に扱おうとしていました。
確かに現在の基準に比べると不十分な点もあり、一部の不心得者が差別をしたかもしれませんが、少なくとも当時のアメリカが日本人移民を排斥する法律を作るなど国をあげて人種差別を行っていたような事実はなく、この問題も他の問題と同様に個人ではなく国家が何をしたのかを見るべきではないでしょうか。
何しろ日本は第一次世界大戦後のパリ講和会議の国際連盟委員会において、連盟規約に人種差別の撤廃を明記するべきだと世界史上初めて提案しているのですから、当時の欧米列強とは違い自国内で人種差別を容認できるはずがありません。
日本政府が朝鮮系日本人に参政権を与えたのは日韓併合以来一貫して漸進的に取り組んできた差別解消を目指した政策の延長線上にあるものだと言え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おそらく、このような話を現在の韓国人にすれば、十中八九怒り出し「我々は、そのようなことは望んでなかった。」と言うでしょう。
しかし、当たり前のことですが、今の日本人が当時の日本人と考え方が違うように、今の韓国人の考え方と当時の朝鮮系日本人の考え方は違います。
日本政府のそのような政策に対して当時の人々の心境は本当のところはどうだったのでしょうか。
また、参政権と表裏一体である徴兵制はどのように行われていたでしょうか。
徴兵制というと、私が子供のころから繰り返し聞かされてきたのは「朝鮮は力ずくで日本の植民地にされ、徴兵で兵隊にとられて無理やり戦争に行かされた」というような類の話ですが、はたして本当に朝鮮半島の人たちは命ぜられるまま己の欲せざる戦争に行くような主体性のない人間ば かりだったのでしょうか。自称「他国を侵略したことのない平和国家」の朝鮮半島には地位や名誉を失い投獄されても徴兵を拒否した、カシアス・クレイのような人は1人もいなかったのでしょうか。
当時の朝鮮系日本人たちは「同じ日本人である自分たちだけが徴兵されないのはおかしい」と、自分たちに徴兵制が適用されないことを不満に思い、併合から23年たった1933年には、朝鮮半島出身者に対しても徴兵制を適用するよう帝国議会に請願書が出されるほどでした。
しかし日本政府としては、もしかすれば自分たちに反旗を翻すかもしれない何万の若者に軍事訓練を施して武器を与えることに慎重になったのか、兵員が充足していたからなのか「時期尚早」と、彼らの願いは退けられました。
しかし、そんな彼らの願いに応えようとしたのか、支那事変が勃発したからなのか、翌1938年度から徴兵制ではなく陸軍特別志願兵制度が実施され朝鮮系日本人にも一般軍人(高級将校や憲兵補助員などの軍属になる方法は以前からあった)になる道が開かれました。
徴兵制は6年後の1944年9月に朝鮮系日本人にも適用されることが決まりましたが、実際の入所が翌年の1月からだったので、全員が訓練期間を終えることなく終戦を迎え、朝鮮系日本人の徴兵兵士は1人も戦地に出征しておりません。
では、実際に戦地で戦った志願兵の実態がどうであったのか、各年度の志願者数と入所者数を見てみます。1938年に7.3対1の競争率だったのをはじめ、20対1(1939年)、27対1(1940年)、45対1(1941年)、62対1(1942年)とどんどん高くなり、1943年には6000人の募集に対して30万人以上が応募して、50対1以上の競争率になりました。
こういうことを言えば、当時の人たちは「皇民化教育で洗脳されていた」「騙された被害者だ」などと言って反論する人がいますが、はたして昔の朝鮮民族全員が何年間も騙され続けた愚鈍な人間だったのでしょうか。
中には、そういう人もいたかもしれませんが、国力がないば かりに他国に併合され、苦しい生活の中で懸命に生きていた人たちを、今の時代に生きる自分たちの都合のために馬 鹿にするのはいかがなものでしょうか。
30万人もの多くの若者が祖国のためd地に赴くに等しい入隊を希望したという事実は消し去ることはできません。
人それぞれの意見はあるでしょうが、彼らの中には特別攻撃隊に志願した人もいる訳で、彼らは国が変わっても己にできることを出来る限りやろうと、自らの意志で日本人として西欧諸国の植民地支配に対抗すべくアジア諸国解放のために大東亜戦争を戦った誇りある立派な軍人だったのだと私は思います。
そんな彼らは大韓民国設立後、長年にわたり軍隊で主要な地位を占め、朝鮮戦争においても勇敢に戦い祖国を守りぬきました。
そんな祖国の恩人たちを、自分たちの主張を正当化するために「日本に騙された愚か者」「祖国を裏切った親日派」などと売国奴扱いをするのはどうかしているとしか言いようがありません。
日韓両国の国民はともに「歴史を直視」して、日本人はかつて同胞として大東亜戦争を共に戦った韓国人に敬意を払い、韓国人は欧米諸国の植民地支配と戦った自分たちの先祖に誇りを持ってもらいたいものです。
バンダービルド
引用ソース
https://www.chogabje.com/toron/toron22/view.asp?idx=&id=137244&table=TNTRCGJ&sub_table=TNTR01CGJ&cPage=1
*一色正春さんのコラムまで読まれてるのね、バンダーさん。
一色さんは、尖閣諸島での中国漁船衝突映像の流出事件において「sengoku38」の名前で映像をYouTubeへ最初に投稿された方ですね。
そして海上保安官を辞められた。
大事なのは「事実」ですね。
本統治下ではじめて韓国人が参政権を得たという事実」
閲覧数 : 178
JA
255
gonbei2
1,295,689 / 2,811,753
翻訳を見る
본통치하에서 처음 한국인이 참정권을 얻었다고 하는 사실」
참정권과는 글자 그대로 선거권과 피선거권으로 대표되는 정치에 참가할 권리로 공민권이라고도 말해 민주주의 국가의 근간을 이룰 권리입니다.
전쟁 전, 일본의 의회 구성은 선거에 의해서 선택되는 국회의원으로 구성되는 중의원과 황족, 화족, 칙임 의원에 의해서 구성되는 귀족원의 이원제였습니다.
전쟁 전, 일본의 의회 구성은 선거에 의해서 선택되는 국회의원으로 구성되는 중의원과 황족, 화족, 칙임 의원에 의해서 구성되는 귀족원의 이원제였습니다.중의원 선거의 선거권은, 당초, 납세액에 의한 제한이 있었습니다만, 1925년부터 25세 이상의 일본국적을 가지는 남자이면 본적이나 납세액에 관계없이 투표가 가능하게 되어, 피선거권(입후보 할 권리)도 본적(출신지)에 의한 제한은 없고, 일본국적을 가지는 30세 이상의 남자이면 누구라도 국회의원에의 길은 열리고 있었습니다.
다만, 선거구는 내지로 한정되고 있었기 때문에, 사는 장소에 의해서 선거권은 제한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일일까하고 말하면, 조선이나 대만등의 외지는, 일본과 같은 나라가 되었다고 해도, 바로 이전까지 다른 나라에서 만났기 때문에, 내지와는 경제나 교육의 수준 만이 아니고, 생활 관습, 것의 생각이나 언어가 근본적으로 달랐습니까?`역A당초부터 헌법을 시작으로 하는 일본의 법률은 일부 밖에 적용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외지는 일본의 법률을 만드는 의원을 선택하는 장소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어 지금과 같이 재외 투표라고 하는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외지에 사는 인간은 내지 출신자여도 선거구가 없기 때문에 선거권이나 피선거권이 없고, 반대로 내지는 일본의 법령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사는 일본인은 출신에 관계없이 법률을 만드는 의원을 선택하거나 선택되거나 하는 것입니다.
즉 일본과 조선은 병합에 의해 같은 나라가 되었기 때문에 양국의 국민은 동등의 참정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만, 법률의 적용 범위의 문제로 출신을 불문하고 외지 거주민은 국정 선거에 투표할 수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지에 있어서의 참정권은, 어딘가의 나라와 같이 공수표가 아니고, 선거권에 관해서는 일본어의 읽고 쓰기를 할 수 없는 한반도 출신자에게는 한글에 의한 투표도 인정하고 있어 피선거권에 관해서도 한반도 출신자의 박춘금이 조선명인 채 도쿄의 선거구로부터 중의원 의원 선거에 4도 입후보 해, 그 중 2회 당선해 통산 9년간 국회의원을 맡고 있습니다.
또한, 1945년 4월에는 개정 중의원 선거법과 개정 귀족원령이 공포되어 한반도로부터 7명, 대만으로부터 3명 하지만 귀족원 의원으로 선택되어 중의원에 대해서도 조선, 대만, 가라후토에 새로운 선거구를 마련해 각각 23명, 5명, 3명의 정수를 정했습니다.
확실히 내지에 비해 인구 당의 의원수는 극단적으로 적습니다만, 차례차례 늘려 갈 예정이며, 피아의 경제나 교육의 수준의 차이등을 고려하면 개시 당초로서는 타당했기 때문에는 없을까요.
이것에 대해서, 종전 직전의 알리바이 구조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뒤늦은 지혜라는 것으로, 8월 15일이 올 때까지 일본이 진다고 생각한 것은 상세하게 전국을 알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극소수의 인간만이었습니다.
거기에 당시는 대다수의 일본인이 안센이치체를 단단하게 믿고 있어, 비록 전쟁에 졌다고 해도 대만은 차치하고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분리하는 등과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걸음은 늦어도 일본 정부는 진심으로 한걸음 한걸음, 한반도 출신자의 정치 참가에의 길을 여는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 한반도에 있고는 조선 출신의 일본인에 정치가 만이 아니게 고급관료에의 길도 열리고 있어 조선 총독부에서는 지사 13인중 5명 정도는 조선계 일본인으로 주요국의 국장 클래스에도 다수의 인간이 등용되고 있어 1943년무렵이 되면 내지의 중앙 관청에도 조선계전`
전쟁 전, 일본의 의회 구성은 선거에 의해서 선택되는 국회의원으로 구성되는 중의원과 황족, 화족, 칙임 의원에 의해서 구성되는 귀족원의 이원제였습니다.
전쟁 전, 일본의 의회 구성은 선거에 의해서 선택되는 국회의원으로 구성되는 중의원과 황족, 화족, 칙임 의원에 의해서 구성되는 귀족원의 이원제였습니다.중의원 선거의 선거권은, 당초, 납세액에 의한 제한이 있었습니다만, 1925년부터 25세 이상의 일본국적을 가지는 남자이면 본적이나 납세액에 관계없이 투표가 가능하게 되어, 피선거권(입후보 할 권리)도 본적(출신지)에 의한 제한은 없고, 일본국적을 가지는 30세 이상의 남자이면 누구라도 국회의원에의 길은 열리고 있었습니다.
다만, 선거구는 내지로 한정되고 있었기 때문에, 사는 장소에 의해서 선거권은 제한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슨 일일까하고 말하면, 조선이나 대만등의 외지는, 일본과 같은 나라가 되었다고 해도, 바로 이전까지 다른 나라에서 만났기 때문에, 내지와는 경제나 교육의 수준 만이 아니고, 생활 관습, 것의 생각이나 언어가 근본적으로 달랐습니까?`역A당초부터 헌법을 시작으로 하는 일본의 법률은 일부 밖에 적용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외지는 일본의 법률을 만드는 의원을 선택하는 장소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어 지금과 같이 재외 투표라고 하는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외지에 사는 인간은 내지 출신자여도 선거구가 없기 때문에 선거권이나 피선거권이 없고, 반대로 내지는 일본의 법령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사는 일본인은 출신에 관계없이 법률을 만드는 의원을 선택하거나 선택되거나 하는 것입니다.
즉 일본과 조선은 병합에 의해 같은 나라가 되었기 때문에 양국의 국민은 동등의 참정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만, 법률의 적용 범위의 문제로 출신을 불문하고 외지 거주민은 국정 선거에 투표할 수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지에 있어서의 참정권은, 어딘가의 나라와 같이 공수표가 아니고, 선거권에 관해서는 일본어의 읽고 쓰기를 할 수 없는 한반도 출신자에게는 한글에 의한 투표도 인정하고 있어 피선거권에 관해서도 한반도 출신자의 박춘금이 조선명인 채 도쿄의 선거구로부터 중의원 의원 선거에 4도 입후보 해, 그 중 2회 당선해 통산 9년간 국회의원을 맡고 있습니다.
또한, 1945년 4월에는 개정 중의원 선거법과 개정 귀족원령이 공포되어 한반도로부터 7명, 대만으로부터 3명 하지만 귀족원 의원으로 선택되어 중의원에 대해서도 조선, 대만, 가라후토에 새로운 선거구를 마련해 각각 23명, 5명, 3명의 정수를 정했습니다.
확실히 내지에 비해 인구 당의 의원수는 극단적으로 적습니다만, 차례차례 늘려 갈 예정이며, 피아의 경제나 교육의 수준의 차이등을 고려하면 개시 당초로서는 타당했기 때문에는 없을까요.
이것에 대해서, 종전 직전의 알리바이 구조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것은 뒤늦은 지혜라는 것으로, 8월 15일이 올 때까지 일본이 진다고 생각한 것은 상세하게 전국을 알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극소수의 인간만이었습니다.
거기에 당시는 대다수의 일본인이 안센이치체를 단단하게 믿고 있어, 비록 전쟁에 졌다고 해도 대만은 차치하고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분리하는 등과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걸음은 늦어도 일본 정부는 진심으로 한걸음 한걸음, 한반도 출신자의 정치 참가에의 길을 여는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 한반도에 있고는 조선 출신의 일본인에 정치가 만이 아니게 고급관료에의 길도 열리고 있어 조선 총독부에서는 지사 13인중 5명 정도는 조선계 일본인으로 주요국의 국장 클래스에도 다수의 인간이 등용되고 있어 1943년무렵이 되면 내지의 중앙 관청에도 조선계전`
いいね・コメントにはログインが必要です。
コメント (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