メインへ

KJCLUB 日韓文化交流へようこそ。

朝鮮を華麗に無視した良い時代

閲覧数 : 325
JA 0 sensenfukoku07 2,811,753
日本に新たな文化文明を大いに広めたのは、オランダから入ってきた様々な交易品や情報や先進的な技術なのだ。

朝鮮通信使は、徳川家からの招待状によって20年程度に一度しか日本に入れなかった。

日本が、朝鮮を華麗に無視していた良き時代と言えよう。

これは、朝鮮を無視しても日本は何も困らなかった証拠とも言える。

しかも、徳川家とは関係が薄い対馬藩が連絡を取り合っていたので、扱いは格下の更に下。朝鮮通信使は、韓国人が考えているような文化の伝達ということをしていない。

朝鮮通信使は、単なる「朝貢使」というのが、正確な表現だ。

しかし、オランダとの交易は日本政府直轄の扱いだ。

最盛期には、年間700隻も日本に来ていた。

オランダが日本に残したものは、多岐に渡る。建築技術にも優れており、今でも栃木県の東照宮にはオランダ人技術者が作った建築物が残っている。

(朝鮮からの朝貢品も、雨ざらしで共に残されている。オランダのものと比較すると、朝鮮の朝貢品は極めて貧相)

しかも、貿易のために大きな港町までオランダに提供していた。
実のところ、オランダ国旗を掲げて別の国の船さえ入ってきたというのだから、これは面白い。

日本の鎖国とは、名目上に過ぎなかった。国籍の偽装工作は、オランダ好きの各大名(攘夷派からは、蘭癖大名と呼ばれていた)が行わせていたと言われている。

さて、オランダが日本に伝えられた西洋諸国の情報、技術などの一部を下記に掲載しておこう。

オランダ学の興隆


http://www.ndl.go.jp/nichiran/s1/s1_3.html

(1)徳川吉宗と蘭学の萌芽

当初は貿易に限られていた交流も、しだいに知的な方面に進む。オランダ船で輸入されたものには、オランダ語の書籍もあった。これを通じて江戸時代の日本人は、西洋の学術「蘭学」を学ぶことになる。

蘭学の芽生えは8代将軍徳川吉宗の時代である。彼は、殖産興業、国産化奨励の方針から海外の物産に関心を示し、馬匹改良のため享保10年(1725)など数回オランダ船により西洋馬を輸入、ドイツ生まれの馬術師ケイズルを招いて洋式馬術、馬医学を学ばせた。

また、享保5年(1720)禁書令を緩和してキリスト教に関係のない書物の輸入を認め、元文5年(1740)ころから青木昆陽、野呂元丈にオランダ語を学ばせるなど、海外知識の導入にも積極的であった。

長崎に輸入されたペルシャ馬の図



「異国産馬図巻」

こ れより先、万治2年(1659)にドドネウスの『草木誌』、寛文3年(1663)にヨンストンの『動物図説』が商館長から献上されていたが、解読できる者 もおらず、空しく幕府の文庫に眠っていた。吉宗はこれにも関心を示し、翻訳を命じた。野呂元丈がオランダ人に質問し解読を試みた成果は、『阿蘭陀本草和 解』などとして残っている。

この両書が、わが国の学術に広く影響を与えた最初の洋書といえよう。
特に『草木誌』は、西洋植物学書の代表として、日本の本草・博物学にも大きな影響を及ぼした。松平定信や平賀源内もその翻訳を企てている。

(2)『解体新書』の翻訳

こうして蘭書により西洋の学術を取り入れる機運が開けた。まず、最も実用に適する医学から導入が進む。それまでも、長崎の通詞でオランダ商館の医師から医学を学び開業する者はあったが、画期となったのは、体系的な西洋解剖学書の最初の翻訳である『解体新書』の刊行である。

小田野直武による解体図扉絵



「解体新書」

その翻訳事業の中心となった前野良沢は、最初青木昆陽に学び、長崎に赴いて通詞からも蘭語習得に努め、多くの著書、訳書を残した。その弟子大槻玄沢は、杉田 玄白にも学び、江戸に最初の蘭学塾芝蘭堂を開く。玄沢は江戸の蘭学の中心的存在となり、幕府に出仕するとともに、多くの門弟を育成した。

これ以降、薬学、博物学、天文学、暦学、物理学、化学、地理学など各種の学問が蘭書を通じて学習され、著書、訳書が刊行されるものも多くなった。

(3)オランダ学の発展

こうして、長崎のオランダ通詞を通しての語学の学習から、蘭学塾による蘭書の学習に進み、多くの蘭学者が海外知識の導入と普及に功績を残した蘭学はしだいに地方にも普及した。

なお、学問のあり方を反映して、儒学等と同様、オランダ学も家の学として代々継承されることが多かった。杉田家、桂川家、宇田川家などはその代表的な例である。

オランダ語辞書の編纂も行われた。ハルマの蘭仏辞典をもとにした、稲村三伯の『波留麻和解』、ドゥーフの『ヅーフハルマ』、その改訂版『和蘭字彙』などが名高い。文法書の輸入、入門書の編纂も盛んであった。

19世紀になると、ロシア船、英国船がしばしば日本近海に来航し、北辺ではロシア人と日本官憲が衝突する事件も起こった。これによりロシア事情、海外地理、軍事学への関心が高まり、蘭学は実学としての性格が濃くなった。

幕府も高橋景保の首唱により、公的な翻訳機関として文化8年(1811)「蛮(蕃)書和解御用」を設立、馬場佐十郎、大槻玄沢、青地林宗らがここに出仕し、ショメールの日用百科事典による『厚生新編』の翻訳事業等が行われた
翻訳を見る

조선을 화려하게 무시한 좋은 시대

일본에 새로운 문화 문명을 많이 넓힌 것은, 네델란드에서 들어 온 님 들인 교역품이나 정보나 선진적인 기술이다.

조선 통신사는, 토쿠가와가로부터의 초대장에 의해서 20년 정도로 한 번 밖에 일본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일본이, 조선을 화려하게 무시하고 있던 좋은 시대라고 말할 수 있자.

이것은, 조선을 무시해도 일본은 아무것도 곤란하지 않았던 증거라고도 말할 수 있다.

게다가, 토쿠가와가와는 관계가 얇은 쓰시마번이 서로 연락을 하고 있었으므로, 취급은 격하의 더욱 아래.조선 통신사는, 한국인이 생각하고 있는 문화의 전달이라고 하는 것을 하고 있지 않다.

조선 통신사는, 단순한「조공사」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그러나, 네델란드와의 교역은 일본 정부 직할의 취급이다.

최성기에는, 연간 700척이나 일본에 와있었다.

네델란드가 일본에 남긴 것은, 다방면에 건넌다.건축 기술에도 뛰어나 지금도 토치기현의 토쇼궁에는 네델란드인 기술자가 만든 건축물이 남아 있다.

(조선으로부터의 조공품도, 비맞게 내버려 둠으로 모두 남아 있다.네델란드의 것과 비교하면, 조선의 조공품은 지극히 빈상)

게다가,무역을 위해서 큰 항구도시까지 네델란드에 제공하고 있었다.
사실, 네델란드 국기를 내걸어 다른 나라의 배마저 들어 왔다는 것이니까, 이것은 재미있다.

일본의 쇄국이란, 명목상에 지나지 않았다.국적의 위장 공작은, 네델란드 좋아하는 각 오나(양이파에서는, 란벽오나로 불리고 있었다)가 실시하게 하고 있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그런데, 네델란드가 일본에게 전할 수 있었던 서양 제국의 정보, 기술등의 일부를 아래와 같이에 게재해 두자.

네델란드학의 융성


http://www.ndl.go.jp/nichiran/s1/s1_3.html

(1) 도쿠가와 요시무네와 난학의 맹아

당초는 무역에 한정되어 있던 교류도, 차츰 지적인 방면으로 나아&다.네델란드선으로 수입된 것에는, 네델란드어의 서적도 있었다.이것을 통해서에도시대의 일본인은, 서양의 학술「난학」를 배우게 된다.

난학이 싹터는 8 대장군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시대이다.그는, 식산흥업, 국산화 장려의 방침으로부터 해외의 물산에 관심을 나타내, 마필 개량을 위해 향보 10년(1725) 등 몇차례 네델란드선에 의해 서양마를 수입, 독일 태생의 마술사 케이즐을 불러 서양식 마술, 말의학을 배우게 했다.

또, 향보 5년(1720) 금서령을 완화해 크리스트교에 관계가 없는 서적의 수입을 인정해 모토후미 5년(1740) 무렵부터 아오키 곤요, 노로겐죠에게 네델란드어를 배우게 하는 등, 해외 지식의 도입에도 적극적이었다.

나가사키에 수입된 페르시아마의 그림



「이국산마도권」

와 보다 앞, 만치 2년(1659)에 드드네우스의『초목잡지』, 간분 3년(1663)에 욘 스톤의『동물 그림 해설』가 상관장으로부터 헌상 되고 있었지만, 해독할 수 있는 사람 도 있지 않고, 허무하게 막부의 문고에 자고 있었다.요시무네는 이것에도 관심을 나타내, 번역을 명했다.노로겐죠가 네델란드인에 질문해 해독을 시도한 성과는, 『아란타초목화 해』등으로 해서 남아 있다.

이 양서가, 우리 나라의 학술에 넓게 영향을 준 최초의 양서라고 할 수 있자.
특히『초목잡지』는, 서양 식물학서가 대표로 하고, 일본의 초목・박물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마쓰다이라 사다노부나 히라가원내도 그 번역을 기획하고 있다.

(2)『해체 신서』의 번역

이렇게 해 양서에 의해 서양의 학술을 도입하는 기운이 열렸다.우선, 가장 실용에 적절한 의학으로 도입이 진행된다.그것까지도, 나가사키의 통사로 네델란드 상관의 의사로부터 의학을 배워 개업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획기가 된 것은, 체계적인 서양 해부학서의 최초의 번역인『해체 신서』의 간행이다.

오다노 나오타케에 의한 해체도 문의 표면에 그린 그림



「해체 신서 」

그 번역 사업의 중심이 된 마에노 료타쿠는, 최초 아오키 곤요에게 배워, 나가사키로 향해 가 통사로부터도 네덜란드어 습득에 노력해 많은 저서, 역서를 남겼다.그 제자 오오쓰키 겐타쿠는, 스기타 현백에도 배워, 에도에 최초의 난학학원 지란당을 연다.현택은 에도의 난학의 중심적 존재가 되어, 막부에 출근하는 것과 동시에, 많은 문하생을 육성했다.

이 이후,약학, 박물학, 천문학, 역학, 물리학, 화학, 지리학 등 각종의 학문이 양서를 통해서 학습되어 저서, 역서가 간행되는 것도 많아졌다.

(3) 네델란드학의 발전

이렇게 하고, 나가사키의 네델란드통사를 통한 어학의 학습으로부터, 난학학원에 의한 양서의 학습하러 진행되어, 많은 난학자가 해외 지식의 도입과 보급에 공적을 남긴 난학은 차츰 지방에도 보급했다.

덧붙여 학문의 본연의 자세를 반영하고, 유학등과 같이, 네델란드학도 집의 학으로서 대대 계승되는 것이 많았다.스기타가, 카츠라가와가, 우다가와가 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네델란드어 사전의 편찬도 행해졌다.하르마의 란불사전을 기초로 한, 이나무라 산파쿠의『하르마 화해』, 두후의『즈후하르마』, 그 개정판『화란옥편』등이 유명하다.문법서의 수입, 입문서의 편찬도 번성했다.

19 세기가 되면, 러시아선, 영국선이 자주 일본 근해에 래항해, 북변에서는 러시아인과 일본 관헌이 충돌하는 사건도 일어났다.이것에 의해 러시아 사정, 해외 지리, 군사학에의 관심이 높아져, 난학은 실학으로서의 성격이 진해졌다.

막부도 다카하시 가게야스의 주창에 의해, 공적인 번역 기관으로서 문화 8년(1811)「만(번) 서 화해 용무」를 설립, 바바 사주로, 오오쓰키 겐타쿠, 아오치 린소등이 여기에 출근해, 쇼메이르의 일용 백과사전에 의한『아츠마 `카 새롭게 편집』의 번역 사업등을 한

いいね・コメントにはログインが必要です。

コメント ( 5 )

投稿一覧

2,811,753

  1. KO 255 pplive112
  2. JA 255 chosobakan
  3. JA 255 夫余
  4. JA 255 chosobakan
  5. 2 閲覧数 : 203
    KO 255 cris1717
  6. JA 255 ドンガバ
  7. 閲覧数 : 106
    KO 255 Computertop6
  8. 閲覧数 : 99
    KO 255 Computertop6
  9. 1 閲覧数 : 206
    KO 5 Uhooojjj
  10. JA 255 japjapjapjaps
  11. 閲覧数 : 109
    KO 255 Computertop6
  12. JA 255 JAPAV57
  13. 閲覧数 : 206
    JA 255 bluebluebluu
  14. JA 255 夫余
  15. 閲覧数 : 158
    JA 255 windows7
  16. KO 255 nimai
  17. JA 255 ひょうたんでしょう
  18. JA 255 merutodaun
  19. 閲覧数 : 187
    JA 255 catchthehe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