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お婆さん証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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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いくら堪えても耐えることができなくて 7ヶ月後に二人で夜に逃亡をナワッオイェ. 胸がどきどきしてぐずぐずしているのに誰が告発をしたのか軍人トラックがワッオイェ. 私の友達を捜すひまもなくぶるぶると震えているのに赤い別に三ケのものが乗りなさいと言ってタッオイェ. 車にもらわれてその夜に山でどこでひかれてダニョッジイェ. 野山どこまでで私の手を握ったら下りなさいと言いなさい. 下ったらあちらどこにつかまえて行ったら... そこで... 初めてあったんです... 年が幼くて何も分からなくて(当時 14‾5歳) 私がその事を恐がるから一夜にお前四五人にやりとだけ来てそうだったです."
日本人先生にだまされて軍需工場勤労保国隊に引かれて行ってからお腹がすいていて脱出したヨルノデッ殺意幼い少女は夜中に野山で日本軍将校に強姦にあってその道に引かれて行って従軍慰安婦になったと言うのだ. 決まった場所で日本軍の蛮行を手におえることだけではなく日本軍がある現地まで尋ねなければならない苦痛を川お婆さんはあわ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誰誰名前を呼んで君たちは毛布を持って付いて来なさいと言います. それからはあの山の上に連れて行きます. そこ出ている日本やつらが鉄砲を横においてジラルドルして行ってそうだったです. どんな奴は防空壕の中でその気違いじみた言行をして."
全国各地をさすらったお婆さんは 5年前南揚州のその所ビニールハウスに定着した. しかしお婆さんは管轄官庁から異執さえ撤去対象という通報を受けている.
"社会係長様が出て養老ホームにいらっしゃる意向はないかとムッデイェ. 今までスムオサルと私が従軍慰安婦行って来たという話誰にしなかったがそっちへ行ってすべて現われれば村八分受けるという気がして, 秘密がボザングドエゲッです, ところで仮面... それで何の返事しなかったです. そこ行こうと思わないです"
川お婆さんは誰でもバッイルでもさせてくれるだけでただ熱心にしようと言って衰弱するがきれいな顔に涙をのんだ.
朴お婆さん話 "あいつたちが焼きごてでなどを煎りつけた"
1941年当時婚姻届まで終わらせておいた朴お婆さん(仮名)は家ごとに立ち後れて通う五人の軍人と警察たちによって家族たちが見守る中に引かれて行った. その方は顔を覆うという条件で 50余年の前の話を始めた.
"心臓がときめきます. その言葉さえ言えば心臓がときめきます. どこにガッナすれば, その時は分からなかったが後で聞いて見るから長崎と言うようです. そこで男相対する教育を受けました. 入って来る一人一人によく相対してくれなさいそんな内容だが初めて経験する娘たちがそれが何はソリンがたいでしょう? そんな後に軍人トラックに積みました. おおよそ 30人が車に乗って行くのにどうも分からなかったでしょう. すべてあって後で出る時聞いて見るから熊本だと言います. やや小いたたみ部屋がずっと繋がれているのに女達一人ずつ放榜に入って行けと言う. 軍人相対しに. みんな驚かしていて, こんな事がどこあるです? どのお嬢さんが逃亡を張ってからつかまりました. つかまえてひどく気合いを与えるから女が驚いて転がって結局死んで. 軍人たちが私たち逃げださないでねと刀で死んだ人乳房を抉ってお腹を割って身をこんなにああにさせるから膓がちょうど出たのだ. 私たち見なさいとその膓をあちらこちらに振るのに, これ人が住む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考えですか."
これ以上その阿鼻叫喚の慰安所でたまらなかった朴お婆さんも脱出を敢行してつかまって入って来た. 彼にも間違いなく血なまぐさい刑罰が加えられた.
"ひいて入って来て逆にぶら下げておいて腰に何を打って, 私のドングホリがどうなったのか分からないです. ぽかぽかしますドングホリが." "お婆さんなどちょっと見せてくれることができますか?""そうします."
そうだった. お婆さんなどに5,6箇所や不老地震自国が出ていた. 映画でも見たようなインも自国がいまだに鮮かだった.

▲ 朴何某お婆さんのあぶ残った焼きごてで地震跡(1992)


"逆にぶら下げておいて焼きごてで煎りつけたようです." "そしてからいつから軍人たちを相対しましたか?""その日夕方からです."
残忍な顧問があったその晩から軍人を相対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だ.
朴お婆さんはあの時から 4年余り間閉じこめられて住みながら慰安部生活をするうちに父分からない子供を二回も生んだ. 二人の子供は二歳の差だった. 日の毎に赤んぼうたちを "どんなおばさん"が連れて行って育てて一週間に一度ママを見るようにしてくれた. もちろん解散して三日後からはまた日本軍を受けなければならない悲劇的な生だった. ある日爆撃を当たった. 日本軍多数が死ぬとか逃走して一人も見られなかったし慰安婦女性たちも見られなかった. 踏まれる死体たちの上に歩いて入って行って地下室にあるという子供達を尋ねた. 奇跡的に子供達はそこで土ぼこりを被ったまま死んだように座っていた. 二人の子供をくつろぐに抱いて出た. 数奇な生, 数奇な子供達と数奇なママだった. 以前になった. ママは千辛万苦の末に二人の子供を連れて帰国した. しかし二人の子供達は順次世を去った. 朴お婆さんはその後幸いに婚姻ができたし息子を生んだし孝誠深い嫁女を得た. 嫁女は姑からその角い歳月その悔しい生を聞いて姑を説得して姑の面倒を見て勇気あるように関係機関を尋ねて姑の生をすっかり話した. 俗離山近所記念品店そのお婆さんとその嫁女話だ.
お婆さん一人一人とのインタビューは三四時間ずつつながった. やむを得ず言葉を始めたお婆さんたちは徐徐に鬱憤が聳えて質問なくてもお話を引き続いた. ただプログラムの長さが決まっているのでお話をすべて消化することができないことが惜しいだけだった.
もう一体この天人共怒する汚くて残忍な蛮行がどんなフレームと流れの上で始まって発展したのか. その顛末と蛮行の現場を整理して見よう. それがプログラムの第2編 3編だった. (引き続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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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증언 3

"아무리 참아도 견딜 수가 없어서 7개월 뒤에 둘이서 밤에 도망을 나왔어예. 가슴이 두근거리고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누가 고발을 했는지 군인 추럭이 왔어예. 내 친구를 찾을 새도 없이 벌벌 떨고 있는데 빨간 별 세 개짜리가 타라고 해서 탔어예. 차에 타가지고 그 밤에 산으로 어디로 끌려 다녔지예. 야산 어디쯤에서 내 손을 잡더니 내리라고 해요. 내렸더니 저쪽 어디로 붙잡고 가더니... 거기서... 처음으로 당했지요... 나이가 어려서 아무 것도 모르고(당시 14~5세) 내가 그 일을 무서워 하니까 하루밤에 너댓명 씩만 오고 그랬어요."
일본인 선생에게 속아서 군수공장 근로보국대에 끌려갔다가 배가 고파 탈출한 열너댓 살의 어린 소녀는 밤중에 야산에서 일본군 장교에게 강간을 당하고 그 길로 끌려가 종군위안부가 됐다는 것이다. 일정한 장소에서 일본군의 만행을 감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일본군이 있는 현지까지 찾아가야 하는 고통을 강 할머니는 당해야 했다. 
"누구누구 이름을 부르며 너희들은 담요를 가지고 따라오라 해요. 그리고는 저 산위로 데려가요. 거기 나가 있는 일본 놈들이 총을 옆에다 놓고 지랄들 하고 가고 그랬죠. 어떤 놈은 방공호 속에서 그 지랄하고요."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던 할머니는 5년 전 남양주의 그곳 비닐하우스에 정착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관할 관청으로부터 이집마저 철거 대상이라는 통보를 받고 있다.
"사회계장님이 나오셔서 양로원에 가실 의향은 없으시냐고 묻대예. 지금까지 숨어살면서 내가 정신대 갔다 왔다는 이야기 아무한테 안했는데 거기 가서 다 드러나면 따돌림 받겠다는 생각이 들고, 비밀이 보장되겠어요, 그런데 가면... 그래서 아무 대답 안했어요. 거기 안 가려 해요" 
강 할머니는 누구든지 밭일이라도 시켜주기만 하면 그저 열심히 하겠노라고 말하며 쇠약하지만 고운 얼굴에 눈물을 머금었다. 
박 할머니 이야기 "그놈들이 인두로 등을 지졌다" 
1941년 당시 혼인신고까지 끝내놓은 박 할머니(가명)는 집집마다 뒤지고 다니는 다섯 명의 군인과 경찰들에 의해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끌려갔다. 그분은 얼굴을 가린다는 조건으로 50여년 전의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심장이 뛰어요. 그 말만 하면 심장이 뛰어요. 어디로 갔나하면, 그땐 몰랐는데 나중에 들어보니까 나가사키라고 하는 것 같아요. 거기서 남자 상대하는 교육을 받았어요. 들어오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잘 상대해줘라 그런 내용이지만 처음 겪는 처녀들이 그게 뭔 소린가 싶잖아요? 그런 뒤에 군인 트럭에 실었어요. 한 30명이 차를 타고 가는데 어딘지 몰랐지요. 다 당하고 나중에 나올 때 들어보니까 구마모토라 해요. 조그만 다다미방이 쭉 연결돼 있는데 여자들 하나씩 방방에 들어가래요. 군인 상대하러. 다들 놀래가지고, 이런 일이 어딨어요? 어느 아가씨가 도망을 치다가 붙잡혔어요. 붙잡아서 심하게 기합을 주니까 여자가 놀라 자빠져서 끝내 죽었지 뭐. 군인들이 우리들 도망가지 말라고 칼로 죽은 사람 유방을 도려내고 배를 가르고 몸을 이렇게 저렇게 하니까 창자가 막 나온거요. 우리들 보라고 그 창자를 이리저리 흔드는데, 이거 사람이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나요." 
더 이상 그 아비규환의 위안소에서 견딜 수 없었던 박 할머니도 탈출을 감행하다 잡혀 들어왔다. 그에게도 어김없이 참혹한 형벌이 가해졌다. 
"끌고 들어와서 거꾸로 매달아놓고 허리에다 뭐를 치고, 내 등허리가 어떻게 됐는지 몰라요. 따끈따끈해요 등허리가." "할머니 등 좀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그러지요." 
그랬다. 할머니 등에 대여섯 군데나 불로 지진 자국이 나 있었다. 영화에서나 본 듯한 인두 자국이 아직까지 선명했다.  

▲ 박아무개할머니의 등에 남은 인두로 지진 흔적(1992)


"거꾸로 매달아놓고 인두로 지진 것 같아요." "그리고 나서 언제부터 군인들을 상대했어요?""그날 저녁부터요." 
잔인한 고문이 있던 그날 밤부터 군인을 상대해야 했던 것이다.
박 할머니는 그때부터 4년여 동안 갇혀 살면서 위안부 생활을 하는 동안 아비 모르는 아이를 두 번이나 낳았다. 두 아이는 두 살 터울이었다. 날 때마다 아기들을 "어떤 아줌마"가 데려가 키우며 일주일에 한번쯤 엄마를 보게 해주었다. 물론 해산하고 사흘 뒤부터는 다시 일본군을 받아야하는 비극적인 삶이었다. 어느 날 폭격을 맞았다. 일본군 다수가 죽거나 도주해서 한명도 볼 수 없었고 위안부 여성들도 볼 수 없었다. 밟히는 시신들 위로 걸어 들어가 지하실에 있다는 아이들을 찾았다. 기적적으로 아이들은 거기서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두 아이를 품에 안고 나왔다. 기구한 삶, 기구한 아이들과 기구한 엄마였다. 종전이 되었다. 엄마는 천신만고 끝에 두 아이를 데리고 귀국했다. 그러나 두 아이들은 차례차례 세상을 떠났다. 박 할머니는 그 후 다행히 혼인을 할 수 있었고 아들을 낳았으며 효성 깊은 며느리를 얻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로부터 그 모진 세월 그 억울한 삶을 듣고 시어머니를 설득해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용기 있게 관계기관을 찾아가 시어머니의 삶을 죄다 이야기했다. 속리산 부근 기념품가게 그 할머니와 그 며느리 이야기다.
할머니 한분 한분과의 인터뷰는 서너 시간씩 이어졌다. 마지못해 말을 시작하던 할머니들은 점차 울분이 치솟아 질문 없어도 말씀을 이어갔다. 다만 프로그램의 길이가 정해져 있으므로 말씀을 다 소화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이제 도대체 이 천인공노할 더럽고 잔인한 만행이 어떤 틀과 흐름 위에서 시작되고 발전되었는가. 그 전말과 만행의 현장을 정리해보자. 그것이 프로그램의 제2편 3편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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