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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略家乙支文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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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支文徳

隋書 “高句麗・隋国命運割った卓越な戦略家” 

                                                      

乙支文徳(乙支文徳). 国史で時代と理念を超越してすべての人から肯定的な評価を受ける数少ない人物の中一人だ.
金腐食は ‘三国史記’ 熱戦で乙支文徳をキム・ユシンに引き続き二番目席においたし, “高句麗が大国スナラを退けることができたことは乙支文徳一人の力だった”と評した.

このような評価は高麗・朝鮮時期にも続いたし, 近・現代に入っては外的を退けて民族定期を高めた偉人で奉ざれている.

612年 1月遂に水軍が高句麗遠征道に上がった. 戦闘兵だけ 113万名, 普及病はその二倍, 出発することばかり 40日. 数羊蹄はこの位ならすぐ高句麗を滅亡させると思った.

ところで初めて会った高句麗遼東城は難攻不落のこの頃だった. ありったけ武器を動員して多くの月攻撃したがびくともしなかった. 切羽詰った羊蹄は直ちに平壌城で進撃することに心に決めて雨中文科ウムンスルを司令官にして 30万別動隊を編成した.

獣医別動隊が 鴨緑江に到着した頃乙支文徳が数に降伏した. この時から乙支文徳の行績が出るのに, 当時彼の名声はすごかったみたいだ. ‘水棲’によれば数羊蹄がウズングムンに ‘栄養王と乙支文徳に会えば必ず捕らえなさい’と言う密旨を与えたと言う.

彼は 栄養王に比肩されるほどに名声が高かったのだ. ところでウズングムンは押すのを奉じないで威武社ユサリョングの建議を受け入れて乙支文徳を放してやった.

もちろん乙支文徳は水軍の状況を察するために偽りで降伏したのだ. 数の兵士らが軍糧米を密かに捨てることを見て幸運にめぐまれなさい軍隊の状況を気づいた.

乙支文徳は幸運にめぐまれなさい軍隊をもっとくたびれるようにしようと誘引した. ‘水棲’によれば “幸運にめぐまれなさい軍隊が一日七回争って皆勝つと勝利感に酔ってずっと進撃した”と言うほどに深く誘引した.

もう平壌城攻撃だけ残ったように見えた. ところが平壌城も鉄瓮城だった. その上に軍糧米はすべて落ちて兵士らは精根がつきた状態だった. この時乙支文徳がウズングムンに時一数を送った.

‘神妙した策略は空の原理に通じたし / 奥妙な誘う地の理を突き通したし / 戦争での球ももう高いから / 充分だと思ってやめることがどうか?’

狂うに抜けたことも分からなくて好い気になったウズングムンに対する嘲弄, 今退かなければ直ちに反撃するという断固たる意志が付け出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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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句麗栄養王の時の名将. 612年スナラの羊蹄が 113万大軍で高句麗に侵入して来た時, 総司令官であるのに降伏するふりをして敵陣を察した後誘引作戦で少ない平壌城 30里まで引き入れた. このためにくたびれた幸運にめぐまれなさい軍事が攻撃をあきらめて後退する時大反撃を始めて, 有名な 撒水大勝をおさめた. これは私たち歴史上大勝の記録で道が伝える. 彼は性分が沈着大胆で, 知略と勇猛がすぐれたし, 市と文章江戸上手かった. 彼が賊将ウズングムンに送った < ウズングムンに与える時 >が 伝える.

 
    韓半島周りの国々 - 高句麗, 百済, 新羅, 数, 突厥, なぜ
    新羅は漢江流域を掌握したが, 高句麗と百済の挟攻を受けていた状態だった. この時中国が数によって統一されると新羅は孤立状態から脱するために数と外交関係を結んだ. すると獣医侵攻に脅威を感じた高句麗は数を脅威する突厥と同盟をはかるように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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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2年 )
    獣医侵攻に脅威を感じた高句麗は戦略的要衝地である 夭逝地方を先に攻撃した. これをきっかけで始まった 598年の 第 1次高句麗, 獣医戦争は獣医 問題(皇帝)が統一された国力を土台で起こした対外征服戦争だった. しかし高句麗は数の 30万台君を大きく打ち破った.  その後問題を引き継いで即位した 修養制(皇帝)は 612年に 113万の大軍を導いて高句麗を侵攻して来た. しかしまた高句麗の力強い抗戦にぶつかると苛立たしくなった羊蹄は 30余万の別動隊を編成して平壌城を攻撃するようにした. しかし 乙支文徳が導く高句麗軍の 清夜戦術(食べ物を皆留守にして逃げる戦術)に導かれて 撒水(清川江)で全滅されてしまった. そして住んで帰った者は 2700人余りに過ぎなかったが, このけんかが有名な 撒水大勝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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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가 을지문덕

을지문덕

隋書 “고구려·隋나라 명운 가른 탁월한 전략가” 

                                                      

을지문덕(乙支文德). 우리 역사에서 시대와 이념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몇 안 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열전에서 을지문덕을 김유신에 이어 두 번째 자리에 놓았으며, “고구려가 대국 수나라를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고 평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고려·조선 시기에도 계속되었고, 근·현대에 들어와서는 외적을 물리치고 민족 정기를 드높인 위인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612년 1월 마침내 수군이 고구려 원정 길에 올랐다. 전투병만 113만명, 보급병은 그 두 배, 출발하는 데만 40일. 수 양제는 이 정도면 금방 고구려를 멸망시킬 줄 알았다.

그런데 처음 만난 고구려 요동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온갖 무기를 동원하여 여러 달 공격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양제는 곧바로 평양성으로 진격하기로 마음먹고 우중문과 우문술을 사령관으로 삼아 30만 별동대를 편성했다.

수의 별동대가 압록강에 도착했을 무렵 을지문덕이 수에 항복했다. 이때부터 을지문덕의 행적이 나오는데, 당시 그의 명성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수서’에 따르면 수 양제가 우중문에게 ‘영양왕과 을지문덕을 만나면 반드시 사로잡아 오라’는 밀지를 주었다고 한다.

그는 영양왕에 비견될 정도로 명성이 높았던 것이다. 그런데 우중문은 밀지를 받들지 않고 위무사 유사룡의 건의를 받아들여 을지문덕을 놓아주었다.

물론 을지문덕은 수군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거짓으로 항복한 것이다. 수의 병사들이 군량미를 몰래 버리는 것을 보고 수나라 군대의 상황을 눈치챘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를 더욱 지치게 만들려고 유인했다. ‘수서’에 따르면 “수나라 군대가 하루 일곱 번 싸워 모두 이기자 승리감에 도취되어 계속 진격하였다”고 할 정도로 깊숙이 유인했다.

이제 평양성 공격만 남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평양성도 철옹성이었다. 더구나 군량미는 다 떨어지고 병사들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이때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시 한 수를 보냈다.

‘신묘한 책략은 하늘의 원리에 통달하였고 / 오묘한 꾀는 땅의 이치를 꿰뚫었으며 / 전쟁에서의 공 또한 이미 높으니 / 족한 줄 알고 그만 둠이 어떠한가?’

꼬임에 빠진 줄도 모르고 우쭐하던 우중문에 대한 조롱, 지금 물러나지 않으면 곧바로 반격하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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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영양왕 때의 명장. 612년 수나라의 양제가 113만 대군으로 고구려에 침입해 왔을 때,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항복하는 체하고 적진을 살핀 후 유인 작전으로 적을 평양성 30리까지 끌어들였다. 이 때문에 지친 수나라 군사가 공격을 포기하고 후퇴할 때 대반격을 시작하여, 유명한 살수 대첩을 거두었다. 이것은 우리 역사상 대승의 기록으로 길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침착 대담하고, 지략과 용맹이 뛰어났으며, 시와 문장에도 능하였다. 그가 적장 우중문에게 보낸 < 우중문에게 주는 시 >가 전한다.

 
    한반도 주위의 나라들 - 고구려, 백제, 신라, 수, 돌궐, 왜
    신라는 한강 유역을 장악하였으나,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을 받고 있던 상태였다. 이 때 중국이 수에 의해 통일되자 신라는 고립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수와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러자 수의 침공에 위협을 느낀 고구려는 수를 위협하는 돌궐과 동맹을 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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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12년 )
    수의 침공에 위협을 느낀 고구려는 전략적 요충지인 요서 지방을 먼저 공격하였다. 이를 계기로 시작된 598년의 제 1차 고구려, 수의 전쟁은 수의 문제(황제)가 통일된 국력을 바탕으로 일으킨 대외 정복 전쟁이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수의 30만대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 후 문제를 이어 즉위한 수양제(황제)는 612년에 113만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해 왔다. 그러나 다시 고구려의 강력한 항전에 부딪히자 초조해진 양제는 30여 만의 별동대를 편성하여 평양성을 공격케 하였다. 그러나 을지문덕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청야전술(먹을 것을 모두 비우고 달아나는 전술)에 이끌려 살수(청천강)에서 전멸당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살아 돌아간 자는 2700여명에 불과 하였는데, 이 싸움이 유명한 살수 대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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