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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の測雨器と和田雄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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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の測雨器と和田雄治

和田が発掘した「風雲記」の一部

 今から約50年前、世宗時代の測雨台を発見した研究者は日本科学史学会誌に「李朝時代の降雨量測定法」という論文を発表¥した。その人にとっても最初の研究論文であったが、それは朝鮮科学史研究においても記念すべき論文であった。というのも、その研究者こそ朝鮮科学史研究の第一人者である全相運先生、その人であったからである。

 ただし、この論文が測雨器に関する最初のものかというとそうではなく、さらに50年をさかのぼる1910年、「韓国観測所学術報文」に掲載された「世宗・英祖両朝の測雨器」がそれである。そこには測雨器がイタリアのカステリーよりも早く製作された世界最初の雨量計であり、世宗時代に観測制度が確立し、その後、英祖時代に復活したことが書かれている。まさに、今日の測雨器に関する基本理解はこの論文に始まるが、論文はフランス語でも掲載されており、西欧への測雨器の最初の紹介でもあった。執筆者は朝鮮総督府観測所・所長を務めていた和田雄治であるが、彼こそ現存する唯一の「錦営測雨器」を日本に持ち込んだ人物なのである。

 1859年福島の二本松藩士の子として生まれた和田は、1879年に東京帝大を卒業して中央気象台に入り「おやとい外国人」(明治時代、日本で活躍した外国人科学者・技術者をこのように呼んでいる)グニッピングを補佐し気象予¥報業務を担当、後に予¥報課長となった。ゆえに、彼は日本の気象事業の礎を築いた人物の一人であるが、1904年に日露戦争が起った時、軍事上の必要から朝鮮仁川に臨時観測所が設置され所長となった。

世宗時代の測雨器

 和田が初めて測雨器の存在を知ったのは、1905年に京城観測所(以前の書雲観)を見学した時である。雨量計に関する簡単な報告を書いたことがある彼は、そこにその原型と観測原簿「風雲記」があることに驚いた。そして、1910年に朝鮮が日本の植民地となった時、すぐに保管を命じたがすでに散逸しており、あらためて資料の発見に努めるよう指示したところ、倉庫の奥から以前とは異なる「風雲記」「天変抄出謄録」などが見つかった。また、自身も朝鮮各地に出向き咸興、大邱、そして公州の測雨器を確認、それらを仁川観測所に移管した。そして、1915年職を辞して日本に戻る時に公州・錦営測雨器を持ち帰ったのである。したがって、その時点では仁川にも2基の測雨基が存在したのだが、朝鮮戦争時米軍の仁川上陸作戦によって観測所は破壊され、測雨器や「風雲記」をはじめとする貴重な資料も消失した。結果、皮肉にも和田が持ち帰った錦営測雨器のみがこの世に残された。

 朝鮮の輝かしい科学文化の象徴といえる測雨器であるが、豊臣秀吉の侵略によって中断を余儀なくされ、英祖時代に復活するも、またしても日本の植民地支配によって光を失った測雨器、そこに刻まれた歴史の光と影は、まさに朝鮮民族の歴史そのものである。(任正爀・朝鮮大学校理工学部教授)

[朝鮮新報 2008.5.23]

조선의 測비기와 와다(和田) 유우지(雄治)

지금부터 약 50년전, 세종 시대의 測비대를 발견한 연구자는 일본 과학사학회지에 「이조시대의 강우량측정법」이라고 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 사람에 있어서도 최초의 연구논문이었지만, 그것은 조선 과학사 연구에 있어서도 기념해야 할 논문이었다. 이라고 하는 것도, 그 연구자야말로 조선 과학사 연구의 제일인자인 전 상운선생님,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단, 이 논문이 測비기에 관한 최초의 것인가라고 하면 그렇지 않고, 더욱 50년을 거슬러 오르는 1910년, 「한국 관측소 학술보문장」에 게재된 「세종·영조양조의 測비기」가 그것이다. 거기에는 測비기가 이탈리아의 【카스테리】보다도 빨리 제작된 세계최초의 우량계이며, 세종 시대에 관측 제도가 확립하고, 그 후, 영조시대에 부활한 것이 씌어져 있다. 정말로, 오늘 測비기에 관한 기본이해는 이 논문에 시작되지만, 논문은 프랑스어에서도 게재되고 있어, 서구에의 測비기의 최초의 소개이었다. 집필자는 조선 총독부관측소·소장을 맡고 있었던 와다(和田) 유우지(雄治)이지만, 그야말로 현존하는 유일한 「비단營測비기」를 일본에 가져온 인물이다.

1859년 후쿠시마(福島)의 니혼마쓰(二本松) 번사의 아이로서 태어난 와다(和田)는, 1879년에 도쿄(東京) 제(황제)대를 졸업해서 중앙기상대에 들어가 「고용해 외국인」 (메이지(明治) 시대, 일본에서 활약한 외국인과학자·기술자를 이렇게 부르고 있다) 【구닛핀구】를 보좌해 기상예보 업무를 담당, 뒤에 예보 과장이 되었다. 따라서, 그는 일본의 기상사업의 초석을 쌓은 인물의 한사람이지만, 1904년에 일러전쟁이 일어났을 때, 군사상의 필요로부터 조선 인천(仁川)에 임시관측소가 설치되어 소장이 되었다.

와다(和田)가 처음으로 測비기의 존재를 안 것은, 1905년에 교토성관측 도코로(所) (이전의 서구름관)을 견학했을 때다. 우량계에 관한 간단한 보고를 쓴 적이 있는 그는, 거기에 그 원형과 관측 원부 「풍운기」가 있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1910년에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곧 보관을 명했지만 이미 유실하고 있어, 다시 한번 자료의 발견에 노력하도록 지시한 바, 창고의 안 쪽에서 이전과는 다른 「풍운기」 「천변소출謄녹」등이 찾았다. 또, 자신도 조선 각지에 나가 함(咸) 고(興), 대구(大邱),그리고 공주의 測비기를 확인, 그것들을 인천(仁川) 관측소에 이관했다. 그리고, 1915년 직을 떠나서 일본에 되돌아올 때에 공주·비단營測비기를 갖고 간 것이다. 따라서, 그 시점에서는 인천(仁川)에도 2기의 測비근본이 존재한 것이지만, 조선 전쟁시 미군의 인천(仁川) 상륙 작전에 의해 관측소는 파괴되어, 測비기나 「풍운기」를 비롯한 귀중한 자료도 소실했다. 결과, 공교롭게도 와다(和田)가 갖고 간 비단營測비기만이 이 세상에 남겨졌다.

조선이 빛나는 과학문화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 測비기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침략에 의해 중단을 할 수 밖에 없어, 영조시대에 부활하나, 또 일본의 식민지지배에 의해 빛을 잃어버린 測비기, 거기에 새겨진 역사의 빛과 그림자는, 정말로 조선 민족의 역사 바로 그것이다. (임무정? ·조선 대학교 이공학부 교수)

[조선 신보2008.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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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측우기와 와다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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