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帝잔재 청산(淸算), 한글도 추방하나"제목의 일본 산케이 신문 기사를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조선시대 한글은 존재했으나 양반들은 한글을 천대하여 사용하지 않았다 1910년 한국과 병합 후일본은 잠자고 있던
한글을 발견하여 한국의 어린이들에게 전파(傳播)했다 일본 통치 시기에 일본의 한자와 假名문자가 섞인 글과
마찬가지로 한국에도 한자와 한글이 섞인 글이 권장되었다 단지 한자만이 日帝잔재라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한자
숙어는 중국 起源이 아니라 일본 통치시기에 일본에서 가져온 것이다 1948년 이승만 대통령은 한글 전용법을 제정
했는데 한자 사용을 일본의 영향 아래에 있는 것으로 하고 대한민국 공문서는 한글로 쓴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조선에
존재했던 한글은 양반들로 부터 열등문자 하천한 사람이 쓰는 문자로 조롱받았다 당시 한반도에는 책을 대량으로
만드는 인쇄소도 없고제본소도 없었기 때문에 최초의 한글 교과서는 도쿄에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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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케이 신문은 거짓말로 혐한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지난 게시물에서 이 기사를 소개하며 반박하는 글을 올리던 중에 용량 초과에 걸려 준비한
자료를 다 올리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이번 글은 한글의 역사에 집중하여 글을 쓰겠습니다
1,한글의 창제와 대중화의 노력
1443년 세종(世宗)은 자음 17字 ,모음 11字로 문자를 체계화한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1446년에 반포했습니다 1445년에는 권제(權蹏) 정인지
(鄭麟趾) 안지(安止)등 학자들이 조선의 건국을 정당화하고 찬양하는 내용의 龍飛御天歌를 편찬했습니다
龍飛御天歌는 훈민정음 반포 이전에 편찬된 유일한 한글의 책이며 목판본 10권 5책 모두 125장의 敍事詩로 편찬되어 1447년에 간행되었습니다
1446년 한글 반포 후 먼저 佛經을 한글로 편찬하여 백성들이 佛經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했습니다 최초 한글 (한자와 한글 병용)의 활자본은 1447년에
인쇄된 월인천강지곡 (月印千江之曲)입니다

首陽大君 (훗날의 世祖)은 세종의 왕명으로 왕비 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그린 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찬하였고
세종은 釋譜祥節을 토대로 月印千江之曲을 지었습니다
1459년에는 世祖는 月印千江之曲과 釋譜詳節을 합하여 월인석보 (月印釋譜)를 한글로 편찬하여 백성들이 佛經을 쉽게 접할 수 있게 했습니다
佛經 외에 유교 덕목의 三綱行實圖는 한글로 번역되어 수차례 간행되었습니다
三綱行實圖는 1434년 (세종16년)에 왕명으로 집현전 학자 偰循 등이 중국이나 조선의 서적에서 모범이 될만한 군신 부부 夫子 등의 사례를
모아 간행했는데 成宗(재위 1457년~1494년)때에 한문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한글 해석을 달았습니다
1514년 (中宗9년) 학자 申用漑가 왕명으로 三綱行實圖의 속편으로 續三綱行實圖를 편찬합니다 속편에는 효자 36명 충신 6명 열녀 12명의
사례를 추가했고 사례 에 대한 삽화를 넣어 이해를 도왔습니다
이런 노력에 따라 16세기 이후 한글이 민간에 퍼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북 안동에서 ,사망한 남편 (李應台1556년~1586년)을 그리워
하며 쓴 한글의 편지가 출토되었고
1670년 여성이 한글로 쓴 요리서<飮食旨味方>이 있습니다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이시명(李時明)과 혼인하여 경북 영양으로 시집 온 張桂香은
1670년 75세 되던 해 며느리와 딸들에게 옛부터 전해오는 음식 조리법을 물려주기 위해 <飮食旨味方>을 저술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에 일본으로 끌려간 朝鮮人 도공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찻잔이 있습니다<한글墨書茶盌>이라고 불리는 찻잔(또는 사발)에는 경상도
사투리로 쓴 한글이 적혀 있습니다 표준어로 옮기면
개야 짖지마라 밤에 다닌다고 다 도둑이 아니다 저 근처 朝鮮사람 계시는 곳에 다녀올 것이다 그 개도 조선의 개로구나 듣고 잠잠하노라
2. 조선시대 한글의 공문서

1593년 9월 임진왜란 당시 宣祖 (재위 1567년~1608년)가 백성에게 내린 국문유서(國文諭書)가 있는데 모두 한글로 쓴 것입니다
당시 양반들은 편지를 쓸 때 그 편지를 받는 상대가 한문을 읽을 수 있으면 한문으로 쓰고 한문을 읽을 수 없으면 한글로 쓰고 있었던 것을
여러 사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또 나라에서 백성에게 알리는 공문서나 벽보를 붙일 때 한글로도 썼는데 宣祖의 國文諭書는 宣祖가
직접 한글로 썼다고 합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임금이 말하기를 너희가 처음에 왜군에게 포로로 잡혀 왜군을 이끌어 다니는 것은 본심이 아니라 (도망쳐) 나오다가 발각되어 왜군에게 붙잡혀
죽을까 여기기도 하고 도리어 의심하기를 왜군에 속해 있었으므로 나라에서 죽일까 두려워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너희는 의심하지 말고 서로 권하며 모두 나오면 너희들은 각별히 죄를 묻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중에 倭를 잡아서 나오거나, 倭가 하는 말을
자세히 알아서 나오거나 (왜군에게) 잡힌 사람들을 많이 데리고 나오거나 어떠한 공이 있으면 양민 천민은 물론이고 벼슬을 줄 것이다
생심(生心)이나 전에 먹었던 마음을 먹지 말고 빨리 나오너라 이 뜻을 각처 將帥에 알렸으니 생심도 의심하지 말고 빨리 나오너라 너희 중에 설마
모두 부모와 처자가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너희가 살던 곳에 돌아와 옛날처럼 살면 좋지 않겠는가
이제 곧 나오지 않으면 왜군에게 죽을 것이고 나라가 평정된 뒤에는 너희들도 뉘우치지 않겠는가 하물며 明나라 군사는 황해도 평안도에 가득하였고
(왜군은 )경상도 전라도에 가득히 있어 倭가 빨리 자신들의 땅에 건너가지 않으면 이 즈음에 (明나라 군사와 조선의 군사)가 합병하여부산 동래에
있는 倭들을 공격하고 뿐만 아니라 강남(明나라)의 船와 조선의 船를 합하여 바로 倭나라에 들어가 분탕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너희들 조차 휩쓸려 죽을 것이니까 너희가 서로 알려 그 전에 편하게 나오너라 )
3 조선시대 한글문학
한글 반포 후 기득권에서 한글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일부 젊은 新進 士大夫들은 세종을 도와 한글 연구에 노력했습니다 佛經을 한글로
번역했고 신라의 향가 고려시대의 歌謠 등 古代문학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했습니다 양반들이 쓴 한글소설도 유행했는데 예를들면 許筠
(1569년~1618년)의 洪吉童傳 ,金萬重(1637년~1692년)의 九雲夢, 謝氏南征記 등 있습니다

이황(李滉 1502년~1571년))이 쓴 陶山十二曲입니다
해석하면 >靑山은 어찌하여 萬古에 푸르러며 , 流水는 어찌하여 晝夜에 그치지 않는가, 우리도 그치지 말고 萬古常靑하리라
이황은 조선시대 대표 성리학 학자입니다 그는 시조(詩調)를 즐겨 썼는데 저 시조의 문장은 한글 한문이 섞인 문장입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을 상대하기 위해 한글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양반들 스스로 즐기고 공부하기 위해 한글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時調를 한글로 쓰고 노래하며 즐겼는데 이것을 時調唱이라고 하며 현재까지 전해 오고 있습니다
4 ,대한제국 인쇄소와 신문 교과서 편찬
1)교과서 간행
1883년 박문국(博文局)이 설립되어 한성순보(漢城旬報)가 발간됩니다 1894년 한글은 공식적으로 국문이 되었습니다 최초의 근대적 교과서는
1895년 <학부 편집국>에서 간행되었습니다
2) 한글 신문

1896년 4월 7일 서재필(徐載弼)이 중심이 되어 한글의 독립 신문이 발간되었습니다 독립신문 창간사에는 "이 신문을 모두 언문으로 남녀상하
귀천이 다 읽게 하기 위한 것이고 귀절을 떼어 쓰는 것은 알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다" 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1899년 페간됩니다
5 통감부 시대 語文 정책
우리가 통감부 시대는 잘 거론하지 않는데 日帝의<조선어 말살 정책>은 사실 통감부 시대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日帝는 1906년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정치 외교 경제 語文정책 까지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1908년 중등학교 理科書 교과서,이 교과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어로 일본 도쿄의 <대일본 도서 주식회사>에서 인쇄했습니다 통감부의 語文
정책에서 대표적인 것은 교과서에 일본어 비중을 대폭 늘리는 것입니다
대한제국의 초기 純한글의 語文 정책을 뒤집고 일본어 처럼 한자와 가나문자를 섞은 언어정책을 하려는 의도라고 생각됩니다 이미 통감부 시대
부터 일본어 교과서가 출판되고 있었던 것은 이 당시부터 <조선어 말살>정책이 시작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한글 교과서가 아니고
일본어 교과서를 일본에서 인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6.대한제국 <국문 연구소 >설립>
1907년 7월 8일 대한제국 학부 안에<국문 연구소>가 설립되었습니다 설립 목적은 공동 연구에 의한 <통일된 국어 맞춤법>을 제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국문 연구소>의 위원은, 이능화(李能和) 어윤적(魚允迪) 주시경 (周時經) 지석영(池錫永) 송기용(宋綺用) 이민응(李敏應) 윤돈구(尹敦求) 권보상
(權輔相)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위원들은 국어 맞춤법 제정을 위해 1907년 9월 16일 첫 회의를 열었고 이후 총23회 회의를 열었는데 그 최종
회의는 1909년 12월 27일에 있었습니다
1907년 부터 1909년 까지 약3년간 국문의 근원 文體及 발음 연혁 등 10개 문제를 연구하여 1909년 12월 27일 최종 회의에서<國文硏究議定安>
을 작성했습니다 1909년 12월 28일 <國文硏究議定案>을 學部大臣에게 제출하여 채택되었으나 1910년 병합으로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1907년 부터 1909년 까지 <,국문 연구소 >위원들이 연구하고 작성한 <國文硏究 議正案>에서 형태소(形態素)의 기본형을 밝히고 고정하여
쓰는 형태음소적(形態音素的)표기를 이미 마련했습니다
한글은 문자 하나가 독립된 音을 가진 표음 문자인데 문법에서는 최소 단위의 의미를 가진 단어의 원래 형태 (형태소)의 표기와 발음이 일치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 경우 형태소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형태소의 기본형을 밝히고 고정하여 쓰는 맞춤법에 따르는 것입니다

1923년 보통학교 조선어 교과서 빨간 줄 (꽃이 피고) 당시 발음대로 쓴 문장같습니다
예를들면 "꽃이 피고"에서 꽃은 자립 형태소입니다 형태소의 "꽃" 뒤에 오는 <모음 助詞> "이"와 결합하여 (꽃이) 라고 표기 하는데 실제 발음은
(꼬치)라고 발음합니다
한글의 특징은 받침이 있는 단어의 경우 단어의 뒤에 붙어 오는 助詞 접미사 등 환경에 따라 받침이 탈락하여 단어의 발음이 바뀝니다
즉 명사 +助詞 (꽃이)에서 꽃의 (ㅊ)받침이 탈락하여 (꼬치)라고 발음하게 됩니다 형태소 (꽃)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형태소 (꽃)을 고정하여
쓰는 것입니다 즉 단어의 원래 형태 (형태소)를 고정하여 쓰는 形態音素的 표기입니다
7.총독부가 제정한 보통학교용 언문 (한글 )철자법
병합 후 총독부 학무국은 보통학교에서 사용하는 조선어 교과서를 편찬하기 위해 8명의 위원들을 선임하는데 위원은 일본인 위원 4명
國分象太郞 ,鹽川太郞 ,新庄順貞, 高橋亨,한국인 위원 4명 강화석(姜華錫 )어윤적( 魚允迪) 유길준(兪吉濬 ) 현은(玄隱 )으로 구성됩니다
1911년 7월 부터 11월 까지 5회에 걸쳐 회의를 하고 1912년 4월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을 공포했습니다 1909년 대한제국 당시
<국문 연구소> 위원들이 형태소의 기본형을 밝히고 고정하여 쓰는 形態音素的 표기를 지지하는 <國文硏究議定案>을 작성하여 學部大臣에게
제출하여 채택되었습니다만 1910년 병합으로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총독부는 대한제국 <국문 연구소>위원들이 연구하여 작성한 <國文硏究議定案>을 뒤집어 형태소를 살리지 않고 소리나는 발음대로
표기하는 표음주의(表音主義) 문자를 채택하여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을 제정했습니다 총독부가 제정한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
은 15세기 한글에 가까워 대한제국<국문 연구소>위원들이 작성한<,國文硏究議定案>보다 더 퇴보한 것이었습니다
1911년 총독부의 학무국 회의에 참여한 魚允迪이 총독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형태소의 기본형을 밝히고 고정하여 쓰는 형태소 표기를
관철시켰으나 총독부는 이것을 뒤집고 소리나는 발음대로 표기하는 표음주의 문자를 채택하여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으로 공포했습니다
그러면서 총독부는 조사 촉탁원에게 명하여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이 결정되었다 라고 거짓말로 설명했습니다
8 한글의 보급인가 보존인가 파괴인가
조선총독부는 1911년 10월 <보통학교 규칙>에서 각 학년의 수업시간 26~27시간 중에 국어(일본어)는 10시간 <조선어 및 한문>은 5시간으로
제한합니다 조선어 수업을 이 정도 배정한 이유는 아이들이 아직 조선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어가 보급되지 않아
조선어를 완전히 배제하고 수업을 진행할 수 없기 때문에 마련한 고육책이었습니다
조선 총독부가 제정한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은 형태소를 살리지 않고 소리나는 발음대로 쓰는 것인데 이 맞춤법을 제정한 이유는 일본인이
조선어를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조선어를 발음대로 표기하면 일본인이 짧은 기간에 조선어를 더 쉽게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의 근거는 일단 1910년 당시 한국인들의 일본어 해득률은 0,8%에 불과했기 때문에 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들은 조선 민중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관리하기 위해 조선어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런 필요에 의해 총독부는 1918년 조선어 장려 정책으로 <조선 시험 규칙>을
공포합니다 응시자는 일본인 경찰관 교사 헌병 등 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들이었고 합격자는 시험 점수에 따라 승진이나 수당을 받을 수
수 있었습니다
1917년 부터 1925년 사이에 간행된 <朝鮮語法及會話書>는 총독부에서 발행한 것으로 집필자는 奧山仙三 이라는 設이 있습니다 1917년 간행된
<朝鮮語法及會話書>에서는 부록편에<보통학교 언문 철자법>이 수록되어 있고 1925년 조선총독부에서 다시 편찬한 책에는 <보통학교 언문 철자법>
이 삭제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어를 연구한 일본인 학자 중에 오쿠라 신페이(小倉進平)가 있습니다 그는 총독부 학무국에 근무했으며 언문 철자법 작업에도 참여했습니다
총독부의 지원으로 조선어를 연구했고 1920년에는 <조선어 학사>를 발간했습니다 조선어를 연구한 성과는 인정하지만 한글의 보급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현재도 만주어 이이누족 언어 등 소수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연구한 학자들이 있지만 대중화 되지 않는 언어와 문자는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과 같습니다
9 . 언문 철자법 개정 논의
1910년에서 1919년 까지 日帝 무단통치 시기로 이 시기는 일본 경찰 헌병이 동원되어 武力으로 탄압하던 시기입니다 조선인의 출판 언론 집회
자유권이 박탈되고 있었습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日帝는 武力이나 탄압으로 조선인을 통치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표면적으로
조선인의 출판 자유와 조선어 교육을 허용합니다만 日帝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허용하는 것이었습니다
1912년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제정 이후 <언문 철자법>에 대한 개정 논의가 있어 1921년 3월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 大要>로 언문
철자법 개정을 공포합니다
10 조선어 연구회 설립

주시경
1)조선어 연구회 설립 목적
1921년 12월 3일 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던 주시경(周時經)의 제자들은 총독부의 <언문 철자법>이 문법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조선어
연구를 위한 <조선어 연구회>를 설립합니다 ,조선어 연구회>는 1926년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맞이하여 훈민정음 반포일을 <가갸날>
또는 한글날(1928년)로 명명했습니다 1927년 동인지에 (한글)을 발표하고 한글 계몽 순회 강연회를 열어 한글 보급에 노력했습니다
2).언문 철자법 개정
그런데 1921년 3월 <언문 철자법 >개정이 공포된 이후 10년 가깝게 개정된<언문 철자법>에 대해 교육계와 사회에서 문제를 제기하여 총독부
학무국에서는 다시<언문 철자법>개정을 위해 전문가들을 구성하였습니다
1차 조사회는 1928년 9월 ~1929년1월 까지 열렸고 ,박승두(朴勝斗) 박영빈(朴永斌) 심의린(沈宜麟) 이세정(李世楨)등 위원들로 구성되어 초안을
작성했습니다
2차 조사회에서는 1929년 5월~7월까지 열렸는데 ,한국인 위원은 권덕규(權悳奎) 김상회(金尙會) 신명균(申明均) 심의린(沈宜麟) 이세정(李世楨)
이완응(李完應) 장지영(張志映) 정열모(鄭烈模) 최현배(崔鉉培)로 구성되었고
,일본인 위원은 오구라(小倉進平) 다카하시(高橋亨) 다나카(田中德太郞) 니시무라(西村眞太郞) 후지나미(藤波義貞)등 위원으로 구성되어 최종
심의를 거쳐 <언문 철자법>이 확정되었습니다 교육계와 사회에서 통일된 한글 맞춤법을 위해 <보통학교용>이라는 관형어를 삭제했습니다
2차 조사 회의에서 장지영(張志映) 권덕규(權悳奎) 최현배(崔鉉培) 등 주시경(周時經) 문하의 위원들이 회의에 참여하고 적극 활동하여 형태소
표기가 널리 도입되었습니다 이때 맞춤법은 총독부의 학무국 제3회 철자법 또는 철자법의 제2회 개정이라고 하며 개정된 맞춤법은 1930년대
1930년대 부터 교과서에 채택되었습니다
3) 한글 사전 편찬의 노력
,조선어 연구회>는 한글 사전 편찬을 위해 1930년 12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기로 결의합니다 1931년<조선어 연구회>는 <조선어 학회>
로 개편하고 적극적으로 <한글 사전 편찬>을 추진합니다
1933년 10월 <한글 맞춤법 통일안> 1936년 <조선어 표준어 査定岸> 1940년에는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발표합니다
이 때에 세종의 한글 창제 당시 28字 중에 자음 3字 ,모음1字는 제외되었으나 형태음소적(形態音素的 )표기는 살렸습니다 현재 북한과 한국이
한글 맞춤법이 거의 같은 이유는 이 당시 한글 학자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1940년 총독부에 <조선어 대사전>의 출판허가를 받고 1942년 원고를 출판사에 넘겨 간행할 예정이었는데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사전 출판
편찬은 중단되었고 원고와 서적은 총독부에 압수되었습니다
11.조선총독부의 語文정책
1910년 당시 한국인 전체에서 일본어 해득률은 0.8%에 불과했기 때문에 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들은 조선어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지배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조선 민중을 통치하고 관리하는데 용이하도록 일본인 경찰 교사 헌병 등 일본인 관리들에게
조선어를 배우도록 장려했는데 1918년 <조선어 시험 규칙>을 공포합니다
1925년 이후< 조선어 장려 시험>에서 응시자 직업별 합격자를 보면 1925년 8월 1.242명(3種), 1926년 2월 75명(3種) ,1927년 6월 1.219명(3種)
이며 합격자는 교사 경찰관 헌병 등 제한적 직업을 가진 일본인이었고 이들 합격자는 시험 점수에 따라 따라 승진이나 수당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1935년 조선총독부의 자료 <조선 국세조사 보고>에 의하면 1930년 당시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527.016명 중에 일본어의 假名문자와 한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32.714명으로 6.2%였습니다 이것은 총독부가 실시한 조선어 장려 정책의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17년~1925년 총독부가 편찬한 <朝鮮語法及會話書>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공무원을 위한 조선어 학습서인데 이책에는 ,현대 조선어는
京城語를 잘 숙지하면 지역 방언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라고 덧붙여 설명했고 권두에서는 조선어를 배우는 요령이 나와 있습니다
1.암송에 힘써라 2, 문법을 익혀라 3, 응용하는 것에 뛰어날 것 4, 발음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 5. 해당 국민과 접촉해라 6, 해당 국민의 풍습을
알아야 한다 라고 쓰고 있다고 합니다
해당 국민과 접촉해라 해당 국민의 풍습을 알아야 한다 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조선어를 배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조선인의
일상생활을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병합 후 일본인 관리들을 위한 조선어 장려 정책으로 실시된 <조선어 시험>은 1930년대에 축소되어 갔고 1943년에 폐지됩니다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는 <조선어 학습서> <조선어 시험> 등 총독부의 조선어 장려 정책을 근거로 일본의 힉자들은 일본이 조선에 한글을 보급했다 라고 주장하는데
사실은 총독부가 피지배 조선 민중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일본인 관리들에게 조선어를 배우도록 강요한 것입니다
1938년 학교에서의 조선어 과목 폐지 ,1940년 8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민간의 한글 신문 폐간으로 日帝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1938년 조선어 과목은 선택과목으로 되었는데 폐지되었다고 하는 이유는 시험과목에서 조선어 과목은 제외되었기 때문에 폐지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1945년 종전 까지 한글 신문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일본인이 있는데 그것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입니다
총독부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1929년~1939년 무렵 한국인들의 한글 신문 구독률은 가구당 3~5%수준이며 일본어 신문 구독률은 1~2%인데
당시 한국인의 일본어 해득률은 1940년에는 15% 1943년에는 22%에 불과했습니다 1943년 대만의 일본어 해득률 62%에 비하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만큼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저항감이 높았고 한글 학자들의 한글 보급에 대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1945년 종전 까지
한글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한국인의 일본어 해득률이나 일본어의 신문 구독률이 이렇게 낮은 상황에서 총독부는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고 친일 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총독부 기관지의 한글 신문 <매일신보>만 남겨 놓았습니다
12 조선어과목 폐지와 한글신문폐간
그런데 日帝는 중일전쟁을 준비하면서 1936년에는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을 공포합니다 1938년 한글 보급 운동을 조선의 독립운동으로
보고 조선어 교육을 단계적으로 폐지합니다 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은 선택과 목으로 되는데 사실상 폐지입니다
1941년 부터 조선어 교과서는 더 이상 간행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대구 공립고등여자 보통학교 여학생의 일기장을 살펴봅시다
6월 11일 - 교장의 훈화 : 한 나라 국민 가운데 內鮮차별이 있어 일본어를 상용하지 않은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교내에서는 물론 교외 학교나
가정에서도 일본어를 상용하라
7월 6일 -용맹한 군인 아저씨들은 나라를 위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간다 군인 아저씨들이 무사하기를 빌며 일본제국의 국기를 흔들며
봉축하였다
11월 20일 -무엇을 해도 마음이 안정되지 않습니다
13 조선어 학회 사건
1940년 한글의 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이 폐간되었습니다 日帝의 조선통독부는 1941년에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을 공포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어 학회>는 1942년 4월 조선어 사전을 서둘러 편찬하고 그 일부를 大東출판사에 넘겨 인쇄하게 하였습니다
<조선어 학회>의 사전의 편찬 등 한글보급 운동이 계속되자 日帝는 당시 서울에서 사전 편찬을 하고 있던 정태진(丁泰鎭)을 체포하여
<조선어 학회>가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라고 억지 자백을 받아 1943년 4월 1일까지 <조선어 학회>와 관련된 33명을 모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했고 이 중에 16명을 기소하여 함흥 형무소에 수감했습니다

日帝의 혹독한 拷問에 옥사한 . 이윤재(李允宰) . 한징(韓澄)
함흥 형무소에 수감된 16명 중에 이윤재(李允宰)와 한징(韓澄)은 혹독한 拷問에 옥사했고 장지영(張志暎) 정열모(鄭熱模)는 석방되어 재판을 받은
사람은 12명이었습니다 재판 결과 이극로(李克魯)는 징역 6년, 최현배(崔鉉培)는 징역 4년 ,이희승(李熙昇)은 징역 2년 6개월 그 외 징역 2년 (2명) ,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6명), 무죄는 1명 등입니다
1940년 한국인의 보통학교 입학률은 32%에 그치고 있어 입학률은 낮은 편이지만 계속해서 입학률이 40P% 점점 증가한다면 일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은 계속 증가하여 사회 지도층이 됩니다 그러면 한국어나 한글은 현재 만주어 아이누족 언어와 같은 소수민족의 언어와 문자와 같은
신세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 상황을 당시 한국인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었는지 동아일보 1924년 5월 26일 신문기사를 읽어 봅시다
조선어의 장래는 이것이 現今 조선인 지식 계급에서 하는 자료의 하나이며 외국인이 주목하여 보는 바의 하나이다
어떤 민족을 막론하고 그 민족을 대표하는 고유 언어와 문자가 다수 입에 오르고 붓에 쓰일수록 그 민족은 진보된 것이고 개발된 표징이요
前者에 입에 오르거나 붓에 쓰는 사람이 적어질수록 그 언어와 문자를 소유한 민족은 그만큼 쇠약할 것이며 지위가 낮은 것이다
前者 즉 고유 언어와 문자가 다수 입에 오르거나 붓으로 쓰는 것이 극단적으로 아주 사라지면 그 민족은 멸망할 것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
往古와 現今이 밝혀 증명하는 바이다 나는 이러한 견지로 우리 사회를 볼 때 전율을 깨닫지 못하겠다 나는 去月二十五日에 학생을 보기 위해
경성농업 학교에 간 일이 있다 전차 안에서도 어느 노동자들이 일본어로 지껄이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들을 얕보는 것이 아니라 무식하다 하고
학교에 가 보니 1학년 조선어 시간이었다
그때 수업 시간을 잠깐 보았다 창문이 열려 있어 선생의 말을 듣는 중에 이상하게 들리는 것은 "욘테마나사이 우시로까라 삼밥메 요시 복또꼬
(인명)이라는 等語이다 이 말을 (일본어) 들을 때 얼마쯤 불쾌하였다 다른 시간은 모르겠으나 조선어 시간에 이 말 (일본어)를 쓰는 것은
이유와 필요보다 어느 타성에 의하여 무의식적 언행이 아닌가
중학교 선생으로 前者와 노동자와 가치와 무자각한 언어 사용과 무지각한 어학 교수에 이르러서 실로 한탄스러움을 금할수 없다 동시에
그 선생은 지금 무슨 일을 하며 지내는지 물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