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대전략은 西守南進으로 표현된다. 慕本王(48년~53년), 광개토대왕(391년~412년), 장수왕(412년~491년), 隋唐 전쟁(598년~668년) 시기에 중국 內地로의 西進도 일부 있었지만 애초부터 정복을 목적으로 西進을 한 경우는 없고, 중국에 대한 통치도 시도되지 않았다.
고고학적으로도 고구려의 城은 대부분 수백년에 걸쳐 건설된 遼東 방어선에 집중되어 있고, 남쪽에는 城의 밀집도가 상당히 낮다. 같은 지역에 존재했던 金淸의 경우는 고구려와 반대로 서쪽 戰線 요새화는 하지 않았다.
중국 역사의 非漢族 왕조인, 본래 영토를 포기하고 용병으로 중국 사회에 진입한 鮮卑界 침투 왕조, 二元制의 遼, 西進南守의 金淸과 같은 정복 왕조와 고구려의 대전략은 근본으로부터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고구려는 경제와 문화적 실력을 스스로의 민족의 힘으로 내제하여 자신의 땅에 문명을 구축하고 중국 이외의 지역에 문명을 확장해 나갔다면, 침투 왕조와 정복 왕조는 漢族의 땅에 들어가 漢族의 것으로 호화를 누리기 위한 것으로, 단순히 진출 방향의 차이가 아니라 正體性으로부터 상당한 차이가 나타난다.
침투 왕조와 정복 왕조는 쇠퇴하여 중국으로부터 축출되면 그 민족에는 문명이 남지 않게 되며, 女眞族의 경우는 金의 멸망 이후 거의 선사시대 수준으로 문명이 퇴보한다. 만주 지역의 역사에서 인구가 가장 많았던 것이 고구려-발해 시대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고구려의 대전략이 침투 왕조와 정복 왕조와 다르게 西守였다는 것만으로 고구려가 조선 민족 통일의 의사가 있었는가는 이야기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아래에서 南進에 대한 풀이를 한다.
漢武帝元封二年伐朝鮮殺滿孫右渠分其地爲四郡以沃沮城爲玄
郡
漢武帝元封 2년(B.C.108년) 조선을 정벌하여 衛滿의 손자 右渠을 죽이고 그 지역을 四郡으로 분할하여 沃沮城을 玄
郡으로 삼았다.
後爲夷貊所侵徙郡句麗西北
하지만 夷貊의 공격으로 玄
郡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
在昭帝五年正朱蒙開國後攘斥邊境
朱蒙이 그 나라를 개국하여 漢郡縣을 몰아낸 昭帝 5年(B.C.82년)의 일이다.
遂臣屬句麗
그렇게 되어 沃沮와
가 고구려에 臣屬하게 되었다.
及沃沮句驪本皆朝鮮之地也
와 沃沮, 고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의 땅이었다.
出典 : 삼국지
B.C.82년, 武帝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B.C.108년으로부터 26년만에 고구려는 漢에 반격하여 玄
城을 함락하고 그 군현 통치를 붕괴시킨다.
고구려로서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행적이며, 고구려는 개국 당시부터 고조선을 재건하고 조선 민족을 통합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고구려 개국의 正體性을 나타내는 사건이다.
고구려가 고조선의 영토를 재건한 이후 백제와 신라를 포함한 삼국의 민족을 모두 통합하겠다 의사가 나타나는 가장 오래된 사료는 광개토대왕陵碑이다.
광개토대왕陵碑에는 고구려가 출병한 여러 나라들과 출병한 이유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여러 나라들 가운데 王의 民으로 표현되는 나라는 夫餘, 백제, 신라 뿐이며, 그 나라들에 출병한 이유도 王의 民이라서 출병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이민족인 거란과 肅愼은 고구려에 臣屬되어 있음에도 民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다.
의사를 떠나서 광개토대왕은 백제, 신라, 임나 모두에게 항복을 받고 민족 전체의 통일을 실제로 이룩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