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wander_civic씨가 (지금은 한글을 자랑하지만 ,양반은 한문 밖에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 것은 김치와사비가 올린 동영상이었습니다

먼저 김치와시비가 올린 동영상의 내용을 살펴보고 반론하겠습니다
그는 반말을 하고 있었으므로 나도 반말하겠습니다
----------◆김치와사비 :
한국의 최초 근대적 신문이라는 한성순보(漢城旬報)에 대해 한국에서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가르칠까
한성순보는 조선 정부 기구였던 박문국(搏文局)에서 주도하여 발행했는데 갑신정변 이후에 발행이 중단되었다
갑신정변은 김옥균(金玉均)깉은 개화파들이 일으킨 사건이다
조선정부가 주도하여 개화 개방이라는 대외정책을 추진했으며 세계정세에 참여하기 노력의 일환으로 한성순보를
발행하였다 라고 한국에서는 가르치고 있는데 안타깝지만 모두 왜곡이다
박문국(薄文局)을 누가 만들었는지 이야기 하지 않는다
박문국을 만든 사람은 일본인 이노우에(井上角五廊)이다 그를 조선으로 보내서 조선 최초의 산문을 만들도록 한 인물은
후쿠자와 유키치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들이 일본인이기 때문에 숨긴다
---------★ →반론
양력 1883년 10월 31일 한성순보 창간사에 세계정세에 참여하기 위해 신문을 발행한다는 취지의 글이 있다
......우리 조정에서는 박문국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어 외국의 신문을 폭넓게 번역하고 아울러 국내의 일까지 기재하여
나라 안에 알리는 동시에 다른 나라에 까지 공포하기로 하고 신문 이름을 旬報라고 하고 견문을 넓히고 .....라고 게재되어 있다
언제 왜곡했다는 거야?
1882년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에 간 박영효(朴泳孝)는 일본에서 3개월 이상 체류했는데 당시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났어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에게서 나라를 개화시키는데 신문 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서울에 온 박영효는 국왕에게 신문 발행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신문의 발간을 허가해 줄 것을 건의한다
이에 고종(高宗)은 박영효의 건의에 따라
1883년 8월 17일 (음력 7월 5일)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산하기관 同文學의 부속기관으로서 박문국(搏文局)을
설치하고 신문을 발간하도록 명을 내렸어
1883년 10월 31일 드디어 한성순보가 발간되고 인쇄는 박문국에서 하게 되었다
자금은 조선 정부가 지원했고
한성순보 신문사 편집장은 일본인 이노우에가 맡았고 편집자 기자들은 모두 조선인 관원이 맡았다
박문국 (薄文局)의 초대 총재는 閔泳穆 부총재는 金晩植이 임명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인쇄 활자 기술자 등을 주선하여 박문국 설립에 기여하였다
기여한 것은 인정해
그런데 박문국 설치나 한성순보 발간을 이노우에 .후쿠자와 이 2명의 일본인의 합작품이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박문국 설치와 한성순보 발간을 위해 노력한 조선인들은 무시되는 것이 옳은가?
일단 외국인이 개인 자격으로 타국에 국가 기구를 설치하는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김치와사비
그리고 갑신정변으로 한성순보 발행이 중단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맞아
--------★→ 반론
다 왜곡이라며?
-------◆김치와사비
그런데 어째서 한성순보 발행이 중단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아 갑신정변 실패 이후에 청나라에서 일본인을 탄압했어
갑신정변으로 박문국이 파괴되었는데 박문국을 설치하고 신문을 발행할 사람이 없으니까 한성순보도 폐간된 거야
여기서 중요한 사건이 있어 1884년에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 때에
청나라 병사 몇명이 외상값을 갚아 달라고 부탁하는 조선인 약방 주인을 폭행하고 그 아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있었어
이 사건을 일본인 이노우에가 한성순보에 보도한 거야 그런데 조선은 청나라에 항의를 안 했어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이노우에는 일본으로 피신했어
--------★ →반론
그 사건은 한성순보 1884년 1월 30일 일자에 실린 華兵犯罪라는 제목의 기사야
이 기사를 읽은 이홍장(李鴻章)이 총판 조선상무 진수당(陳樹棠)에게 진상을 조사하라고 지시를 내렸고
진수당은 다시 김병시(金炳始)에게 경위를 물었는데 김병시는 확인 결과 떠도는 소문을 확증없이 기사화한 것이라고 통지했다
결국 이 사건의 범인을 찾지 못했고 이 기사를 쓴 관련자는 처벌받았는데 이노우에는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일본으로
도망간 거야
---------◆김치와사비
그런데 몇년 후 이노우에가 후쿠자와에게 한성순보를 보여 주었더니 후쿠자와는 신문에 꼭 한글을 넣어야 조선의 개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한성순보는 한글이 아니었어
한국에서는 일본이 한글을 탄압했다고 주장하지만 전부 거짓말이다
후쿠자와의 건의로 다시 조선에 온 이노우에는 최초 한글 신문을 만드는데 그것이 한성주보(漢城周報)이다
한국에서는 한성주보가 어떤 과정을 거치고 창간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아
왜냐하면 일본인이 만들었다는 것을 숨겨야 하니까
이노우에는 조선 정부에 한글신문을 만들 것을 제안했는데 당시 조선의 왕이나 관리들이 반대했어
이해가 안 된다
일본인은 한글을 보급하려고 했고 조선인은 한글 보급을 반대했다니까 !
유일하게 김윤식 (金允植)은 한글 신문을 지지했어
반문국이 인공지능이 아닌데 사람없이 스스로 한글 신문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한성순보 한성주보 모두 일본인 이노우에의 작품이다
이노우에가 일본에서 조선으로 돌아갈 때 조판 기술자를 데리고 가서 1886년에 만들어진 것이 한성주보야
조선인들은 한글을 천시했어
당시 조선에 선교사로 왔던 헐버트는 조선인을 위한 지리 교과서 士民必知를 출판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어 "슬프다 조선 언문이 중국 문자에 비해 크게 유용한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오히려 없신여기니 어찌 아깝지 않으리"
조선인들이 얼마나 한글을 천시하고 배척했는지 알 수 있다
--------★→반론
조선의 왕이나 관리들이 한글 신문 발간을 반대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어디에 그렇게 써있어?
이미 1886년 한성주보 신문에 한글이 기입되고 있는데?
김치와사비는 자신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조차 모르고 있네
또 1894년(고종 31년)에 한글을 국문으로 정하는 것을 법으로 정했어
어느 시대나 단체나 예외는 있다
신문물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는 부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류도 있지 세종대왕 당시 한글은 신문물이었어
그런데 오해하지마 당시 기득권 세력이었던 양반 중에 한문만 고집하고 한글 사용을 거부한 부류도 분명 있었지만
사실 한글은 양반들에 의해 대중화 되었다
김치와사비는 조선시대 한글 문학도 안 읽었는지
조선시대 양반들이 쓴 한글 문학은 전해지고 있어
---------◆김치와사비
일본은 조선인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위해 총독부에서 교재도 만들고 학교에서도 한글교육을 했어
---------★→반론
日帝는 1911년 8월에 제1차 조선교육령에 의해
일본어를 국어로 하고 조선어 과목 외에 모든 교과서는 모두 일본어로 편찬했어
그런데 1938년 3차 조선교육령으로 초등학교에서는 조선어 과목이 선택 과목으로 되었다
선택과목은 사실상 금지된 과목이나 같다
1940년 4차 조선교육령에 의해 중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이 금지된다
또 1940년에는 총독부 기관지 외에 민간의 한글 신문은 폐간된다
그런데 논란이 있어
한국의 최초 신문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인데
조선시대 1577년 8월 첫 발행된 신문 (朝報)가 있었고
19세기말 1881년 개항장 부산에서 거주하던 일본인 상인들에 의해 발행된 조선신보라는 신문이 있다
조선신보는 한문과 일본어로 발행되었지만 독자 대상을 일본인과 조선인 까지 했어
근대적 의미의 최초 신문을 한성순보로 하느냐 조선신보로 하느냐 문제다
그런데 최초 한국인이 창간한 근대적 의미의 신문은 한성순보 라고 하는 견해도 있고 일본인이 발행했지만
조선 안에서 발행한 조선신보로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1907년 초등 소학 1학년 과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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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博文局 설립과 漢城旬報

강위 (姜瑋 1820년~1884년)
조선후기 한학자이며 개화사상가이다
한성순보를 발행하면서 국한문혼용체를 주장하였다
한성순보는 순 한문을 사용했지만 한성주보는 국내 기사는 국한문. 私議 잡록은 순 한문. 外報 地略은 주로 순 한글로 게재되었다
당시 실무를 담당하던 사람은 姜瑋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이노우에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상하이 신문. 시사신보(時事新報)를 함께
번역하는 등 한글 사용에 적극적이었다
한성주보에 한글이 사용될 수 있었던 것도 姜瑋의 공로가 컸다
조선정부는 고종 20년 1883년 8월 17일(양력) 신문과 서적의 간행을 위해 박문국 (搏文局)설립을 결정한다
박문국은 同文學에 예속된 신문보사로 동문학(同文學)장교, 金晩植에 의해 설립이 추진되었다
그런데 새로운 형태의 신문 간행을 처음 박영효(朴泳孝)에 의해 시도되었다
조선시대 1577년에 朝報를 발행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에게 관리의 임면이나 중요 행사 등을 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朝報는 이용자와 그 내용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朴泳孝
따라서 개항 이후 외부와 접촉이 확대되어 외국의 신문을 접하게 된 인사들은 새로운 형태의 신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신문에 대한 효용성이 알려지고 있던 가운데 박영효(朴泳孝)는 1882년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그는 일본에서 각 방면의 지도자들과 접촉하면서 국민을 계몽시키기 위해 신문 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빅영효는 조선으로 귀국하면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추천을 받아 신문제작을 도울 수 있는 일본인 몇명을 데리고 온다
서울에 온 박영효는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다
박영효는 국왕에게 신문 발간의 필요성을 설명하며 신문 발간을 허가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고종은 박영효에게 신문 발간에 대한 명을 내렸다 (승정원 일기 고종20년 1월 21년)
신문 발간을 맡게 된 박영효는 유길준에게 협조 요청을 한다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主司 유길준은 외교사무를 돌보는 한편 (한성부 신문국 정관)과 (신문창간사) 신문에 대한 해설문을 마련하였다
한성부 신문국 장정에 의하면 신문국의 이름을 搏文局으로 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신문 발간을 추진하던 박영효는 한성판윤에서 제직당하였다
이것은 외척 민씨 세력이 개화 정책을 추진하던 박영효를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으므로 유길준(兪吉浚)은
신문 발행이 불투명 하다고 생각하고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신문 발행이 중단되고 박영효가 데리고 왔던 일본인 중에 이노우에(井上角五郞)만 남기고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다
중단되었던 신문 발행은 同文學 장교로 임명된 김만식(金晩植)에 의해 다시 추진되었다
김만식은 (병계설 신문보관)의 규정에 근거하여 반문국 설립과 신문 발행을 추진하였다
김만식은 金仁植을 담당 主司로 추천하고 왕의 윤허를 받은 후 1883년 7월 15일(음력)박문국을 설립하고
박문국(博文局)의 司事로 張博 吳容鶩 金基俊 등을 추천하여 왕의 윤허를 받고 남아있던 일본인 이노우에를 고용하였다
이노우에가 기숙하고 있던 저동(苧洞) 가옥에 박문국의 인쇄소를 설치하고
1883년 8월 20일에 본격적으로 신문 발간 작업에 착수하였다
1883년 10월 31일에 드디어 한성순보가 발행되었다 순 한문이다
그러나 10일마다 발행되었던 한성순보는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이후 간행이 중단되었다
이노우에는 다시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
■ 한성주보 (漢城周報)
1884년 갑신정변 실패 이후 박문국의 건물과 인쇄소가 파괴되어 한성순보(漢城旬報) 발행이 중단되었다
1885년 5월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외교 통상 사무를 맡은 관청)의 건의에 따라 박문국이 중건되었다
일본 정부는 갑신정변의 事後 처리를 위해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이노우에 가쿠코로(井上角五郞)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노우에(井上角五郞)은 한성순보 복간을 고종(高宗)에게 건의한다
그는 조선의 개화를 위해 신문이 다시 복간되어야 하며 표기는 한글로 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신문 발간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던 外衙門恊辦 김윤식(金允植)의 도움으로 고종의 윤허를 받은
이노우에는 일본에서 신문 발간에 필요한 기계와 활자를 가져 오고
1886년 1월 25일 한성주보(漢城周報)를 창간하였다
한성주보는 박문국의 재정적 지원하에 발간되었다 박문국의 총재는 김윤식(金允植)이었다
한성주보는 국한문 혼용이었다
■ 독립신문

독립신문
1896년 4월 7일 창간되었다
한국에서 발간된 민간 신문이며 순 한글 신문이다 서재필(徐載弼)을 중심으로 독립협회 기관지로 발간되었다

서재필(徐載弼)
서재필은 당시 4.400원을 발급받고 조선 정부의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주시경(周時經)
한글보급 운동을 펼쳤고 한글의 대중화와 근대화에 노력한 한글 학자이다
처음 한글 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제안하여 사용하게 하였다
독립협회를 만든 서재필과 함께 첫 민간 신문 독립신문을 발행하며 학술단체의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하였다
국문동식회는 주시경을 중심으로 국문철자법의 통일을 목적으로 1896년 5월 독립신문사 안에 설치했던 국문연구회이다
이 국문 연구회의 국문철자법은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채택되었다

鄭澈 1580년에 쓴 관동별곡
鄭澈은 .조선시대 정치가이며 시인이다
1580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관동별곡을 지었다고 한다
삼국시대 고려시대의 문학 작품을 한글로 번역 수록한 책이 있다 예를들면 시용향악보 악장가사 등이 있다
한글창제 이후 (1443년~1910년 ) 451년 동안 지속적인 한글 사용이 없었더라면 1894년 한글을 국문으로
정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에 썼지만 조선시대 한글은 양반에 의해 넓혀졌습니다
http://db.history.go.kr/id/nh_038_0030_0030_0030_0010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100&levelId=tg_004_13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