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소위 삼국시대(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부여도 가야도 탐라도 사라져버린 엉터리 시대표현이기 때문이다.)의 종국. 백제의 패망과 고구려의 멸망으로 이어진 긴박했던 시대. AD. 660~668년 사이 요동-만주-한반도 열국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국제전이 벌어진다. 이 전쟁의 두 세력은 ‘백제 대 나당연합군’ 그리고 ‘고구려 대 나당연합군’이었다. 흔히 삼국시대를 다룬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삼한일통의 대업(신라 입장에서)’을 달성하는 이 전쟁에 신라는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였다.(물론 당시의 외세를 오늘의 논리와 등치시켜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민족이나 국가의 개념 또는 관념이 현대와는 현저히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연히 역사와 풍토가 아주 달랐던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반쪽짜리 반도의 삼한을 일통한 것은 안타까운 역사의 한 장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이 전쟁의 결과 동아시아는 중국 중심의 조공체제가 완전히 자리 잡으면서 소위 중화적 질서가 향후 19세기까지 지배한다.
어쨌든 제주도(탐라)와 관련 있는 대목은 백제와 나당연합군의 전쟁이다. 서기 660년 7월 백제는 끝내 나당연합군에 패망하고 만다. 그리고 뒤이어 4년간 소위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활발했던 이 부흥운동 역시 663년 8월, 전쟁의 마지막 대전이었던 백강전투에서 왜의 구원군(왜군 27,000명 / 왜 함선 400여 척)이 나당연합군에게 궤멸당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이 전투의 결과는 8년 후 고구려 패망의 또 다른 배경이 되기도 한다. 우리 역사의 열국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전쟁의 기사 중 우리가 눈여겨 볼 대목이 있는데,《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 조’에 “5년(665) 가을 8월 유인궤(劉仁軌)는 우리(新羅) 사신과 백제·탐라·왜인 네 나라 사신을 이끌고 배를 타고 서쪽으로 돌아가 태산(중국 산동성)에서 회사(會祠)하였다.”라는 기록과, 중국의 사서인《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유인궤전>에 “인덕 2년(665) 탐라국의 사자가 당나라 수군장 유인궤에게 항복했다. 유인궤가 신라·백제·탐라·왜의 추장을 거느리고 모임에 참가했다.”는 기록, 당회요(堂會要)에 실려 전하는 같은 내의 기록이 그것이다.
▲ 백강전투 상상도, 김산호 작 《대쥬신제국사 2권》중에서 ⓒ박경훈이 기사(記事)는 660년 백제가 멸망한 후 들불처럼 일어났던 백제부흥운동이 패망한 지 2년 후의 상황을 전하고 있는 것인데, 기사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흔히 우리가 알고 있듯이 백제부흥운동이 백제인과 왜인들과의 연합전이 아니라, 나·당 연합군 대 백제·탐라·왜 연합군의 전쟁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즉, 당시 동아시아대전 속에서 탐라는 참전국으로 전투에 임했으며, 그 결과 백제, 왜와 함께 패전국의 대표로 당나라 장수 유인궤에 이끌려 당나라의 봉선(封禪)의식에 참여한 것이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탐라는 백제 패망 후 부흥군의 일원으로 참여했으나, 이 전투의 결과로 패전국의 일원이 되었고, 뒤이어 신라(679년)에 새롭게 귀속되고 만다. 세계사와 만난 파란만장한 역사의 서장이었다.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996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