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와 기자(버마 랭군)
-오늘 아침 도착한 화물선으로 조선 여자 4, 50명이 상륙해서 숙소에 들어갔다(55쪽)
-내가 상대를 한 여자는 23~4살이었다.일본어를 잘했다.공립학교에서 선생을 했다고 한다.
학교 선생이 왜 이런데에 왔어?라고 물어봤더니,그녀는 정말 아쉽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속았습니다. 동경 군수공장에 간다는 이야기로 모집이 있었습니다.저는 동경에 가고 싶어서 응모했어요.
인천에 있던 배에 탔더니,동경에 가지 않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와서 도착한 데가 싱가포르였어요.
거기서 반 정도가 내리고 우리를 버마로 데려왔지요.걸어서 돌아가지도 못하고 도망 갈 수도 없어요.우리는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불쌍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씨들이지요.16, 7 살의 아가씨가 8명 있어요.이 직업은 싫다고 울고 있어요.
구할 방법이 없습니까?(56쪽)
보병 제6연대 역사1938년
-양주 은좌가(번화가라서 이렇게 이름 지었다)에 3층 건물 대반점을 접수해서 군위안소로 충당했다.
당초 중국인 아가씨 60명으로 발족했다.개점 한 달 후,일본 내에서 위안부 30명이 도착,또한 조선 아가씨 20명이 보충되어,
요금은 한 시간 1엔 50전으로 정하고 연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그녀들의 식과 주는 군이 책임보증하기 때문에
그녀들의 생활비는 제로에 가깝다.
육군 이등병의 전쟁 체험 (중국 長沙 부근)
-특수간호부라고도 불린 종군위안부 부대가 왔었다.
그리고 4일간 주류 예정인 부대에 위안소가 개설되었다.삐야라고 했다.
장병의 성욕 처리에 봉사하는 여자들은 조선 농촌에서 모집했거나 강제적으로 연행해 왔다고 한다.
모두 미혼의 처녀를 골랐다고 한다.......(중략).... 그녀들은 각각 조선삐, 중국삐라고 불렸다(53, 54쪽)
-11월 6일,宇品 지령부 관장에서 讀去式도 끝나고,같은 날 수송선 ‘아라비양 마루’에 승선했습니다.
선내에는 병사,간호사,그리고 ‘삐상’이라고 불리는 젊은 반도출신의 아가씨들이 100명 정도 탔었습니다.
이들에게는 5명당 1명의 비율로 ‘오야카타’라는 사람이 붙어 있었습니다.긴 항해의 어느 날,이들이 아리랑이나 도라지 등을,
그 반도의 아름다운 옷으로 피료해주었습니다.겨우 15, 6살이 된 귀여운 애들인데,한층 동정했습니다(53쪽)
전쟁터의 개-특무첩보원의 수기) , ( 하틴)
-그 날 밤 나는 부대와 같이 행동하는 많은 여성들을 보았다.일본인,조선인,중국인 등 복장 차이로 알 수 있었다.
여자들은 이야기도 하지 않고,조용히 병사 텐트 밖을 걷는다거나 벤치에 앉아 있는 등 각각 나름대로의 행동을 했었는데,
모두 밝지 않고 어두운 얼굴이었다 (91쪽)
-군 작전 행동의 일환으로 일본국내,조선반도,만주,화북 등지에서 징용이라는 명목으로 모인 여성들 중에서 골라 위안부로
종군시켰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현장을 볼 때까지는 믿지 못했다 (92쪽)
아버지의 전기
-중국대륙 위안부의 대부분이 젊은 조선 아가씨였다.
전쟁후 알게 된 것인데,이들 아가씨들은 당시 조선 전국에서 모집되었고,일단 응모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명목은
일본군의 간호부 견습,조수라는 위선적인 미사여구를 나열하고,또한 나라를 위해서라는 절대적인 말이었다고 한다(중략)
그리고 사실상은 관헌에 의한 거의 협박, 강제적인 방법으로 모집한 것이 진상이었던 것 같다.
그 수는 20만 명이 된다고 추측된다(71쪽)
어느 헌병의 기록1985
-치치하루시에는 군 전속 위안소가 세 군데 있었다.
두 군데는 조선인 여성이며,나머지가 일본인 여성이었다 (117쪽)
-군은 황군 병사 사이에 병이 퍼지는 것을 두려워해서 성병에 신경을 썼다(중략)
그녀들은 병 때문에 폐인처럼 될 때까지 일해야 했다.자살자도 있었다.
-전쟁터에서 병사를 상대했던 여성들이 일본군의 어떤 詐術로 끌려왔는지는 일본으로 복원한 후 책 등으로 알게 되었다.
전국이 격화한 다음이지만 조선 여성은 여자애국정신대 이름 아래 모집되었다.
일본 군수공장으로 가리라고 생각했던 그녀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119쪽)
어느 해군 이야기(파푸아뉴기니 라바울)
-라바울 항에는 함선부대 장병을 위해서 세 개의 ‘빵빵야’(삐야)가 있었다.
하사관용으로는 제1常磐莊과 제2常磐莊 두 개가 줄을 지어 양쪽에 약 40명의 위안부가 있었다.
이 40명의 위안부들은 매일 매일 평균 한 사람 당 50명 이상의 병사를 상대로,일본인 위안부는 1인 2엔 50전,
조선인 위안부는 1인 1엔 50전에 성을 팔았던 것이다(중략)
아무리 금방 끝난다고 해도 50명이란 손님을 상대로 더운 라바울에서 한다는 것은 가혹한 중노동이다.
그것은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완전히 강제적으로 조선에서 젊은 아가씨들을 배에 태워 끌고 왔다고 한다.
하사관용 위안부는 나이 많은 일본인과 조선인이 많았다-(46쪽)
기타다니 사람들의 전시체험 1985 (오키나와)
불쌍한 조선삐,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불쌍한 것은 조선인이지요.우리는 조선삐라고 불렀지요.
말하자면,위안부예요.속아서 끌려왔다고 했어요.다들 젊고 예쁜 아이들이었어요(중략)일반병에게는 조선인이 왔었어요(38쪽)
-우리집 근처에 병사 숙소가 있었는데,거기에 10명씩 조선인이 오면 하루 종일 병사들이 놀았어요.
일부러 일본병사를 상대하기 위해 조선에서 많이 끌려왔는데,정말 불쌍했어요-(38쪽)
환자수송 제89소대1988 (형양)
-이 형양 전선지구에도 이때쯤 처음으로 위안소가 생겨서 여자들이 왔다.조선인이 반,중국인이 반 정도다- (223쪽)
-여러 가지 하찮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역시 힘든 직업이기는 하다.
반도에서 周旋人에게 속아서 군위안이라고 하니까 춤추거나 노래해서 위안하면 된다,라고 생각했고 또 주선인도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중국으로 건너 왔더니,손님을 받아라고 한다.처음에 강간당했다.
아프다 뭐다 하는 수준을 지나 하반신이 마비되어 전혀 못 느낀다(중략)위생병에게 부탁해서 비밀리에 주사를 맞는다.여하튼 여자는 별로고(형양에서 위안부는 30명도 없을 것이다.중국인은 많지만) 병사들은 몇 만이나 있다-(297쪽)
2002년 미국연방정부기록 보존소 발굴 문서
일본군이 강제적인 수단,사기로 한국 여성들을 성 노예로 착출 했다고 작성
약 300명의 여성들이 싱가포르의 일본 공장에 취직 시켜준다는 한국 신문에 난 사기 취업 광고에 속아 동원됐다고 밝힘.
6/30 마닐라에서 60노트 떨어진 지점에서 침몰한 쯔르시마 마루 NARA 문서(일본군 암호를 푼 미군 문서)
일본군은 배가 침몰하자 많은 생존자들을 일본으로 되돌려 보냈으나 한국 여성들은 성노예로 필리핀에 남게 했다.
문서는 일본군의 요청에 따라 19명의 성 노예와 2명의 포주는 잔류시키기로 했다는 일본군의 결정을 기록.
1945년 5월 19일 5명의 한국인 여성이 미군 생포기록
그들은 지난 10일 동안 풀만 먹고 연명하여 매우 허약한 상태였다고 적혀있다.
여성 포로 심문 증언에 의하면 일본군이 강행군을 했기 때문에 1명은 행군 중에 죽었고 허약한 2명은 버려졌다고 밝혔다.
이처럼 성노예들은 필요시에는 착취의 대상이었으나 필요 없는 존재가 될 때는 버려지거나 아사했다고 기록.
*북한 박영순 할머니(생존중)- 성 노예를 대변하는 사진으로 임신한 몸으로 미군에 체포되어 사진을 찍힘.
일본군 스즈키 대령
한국인 성노예들에게 -너희둘이 연합군에 잡히면 일본의 불명예-라며 자신의 부대와 동행할 것을 명령함.
이는 일본군이 성노예의 존재와 위안소 제도를 감추려고 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밝혀주고 있다.
밑줄 있는 문장들은 당시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거나
관련있는 일본인 군인,헌병,혹은 그들의 아들, 또는,기자,
작가들의 증언이 담겨있는 책 제목입니다.
시간이 있으면 읽어보면서
일본인들이 얼마나 잔인한 일을 했는지 느껴주세요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