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은 예로부터 문화적으로 폭넓게 교류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한국이 일본에게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그러나 한국보다 먼저 개국을 하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실현한 일본은 근대 열강의 세력이 한국에 밀려들기 시작한 19세기 후반에는 청(淸)·러시아와 더불어 한국에 위협적인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1876년 한국은 일본의 강압으로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게 되면서 개국을 하였으며, 그때부터 일본은 한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으로 청·러시아 세력을 물리친 일본은 한국으로 하여금 강제로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한일협약(韓日協約)을 맺게 하고, 1905년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어 한국에 통감부(統監部)를 설치하였다.
고종이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고, 전국에서 의병들의 봉기가 잇따르는 등 거국적인 항일(抗日)운동에도 불구하고 1910년 8월 한일병탄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후 통감부를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로 대체하여 식민지 통치를 실시하였다. 총독부는 무단정치(武斷政治)를 단행하여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하는 한편, 경제면에서는 한국을 일본의 독점적 상품시장 및 식량·원료 공급지로 개편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철저하게 실시하였다.
먼저 화폐·금융·수송·통신 등의 유통기구를 정비하고, 한국민족자본의 산업자본화를 철저히 통제하였으며, 특히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근대적인 토지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목하에 광대한 토지를 농민으로부터 수탈하였다. 그와 같은 식민지 정치에 대한 항거가 국내외에서 항일의거 및 독립운동으로 계속 나타나다가 1919년 마침내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났다. 한편 4월에는 중국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그후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3·1운동은 일본의 무력 앞에서 수많은 사상자와 투옥자를 낸 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으나, 한국민족의 독립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알리는 한편, 일본으로 하여금 종래의 무단정치를 완화하여 문화정치를 표방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화정치의 실시로 언론·출판·결사·집회가 일정한 범위 내에서 허용되어 한글로 된 신문·잡지가 발간되고 각종 단체, 특히 6·10만세운동을 계기로 신간회(新幹會)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정책전환은 효과적인 식민지 수탈의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비밀결사와 그 운동의 표면화를 노린 계략에 불과하였다. 국내에서는 1929년 11월 광주학생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이 1930년까지 지속되었고, 해외에서는 독립군의 무장항일투쟁이 만주 일원 및 시베리아 등지를 거점으로 끈질기게 지속되다가 만주사변 이후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에 통합되었다. 한편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부터 한국을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재편성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풍부한 지하자원과 수력자원 및 값싼 식민지 노동력의 착취를 전제로 일본독점자본의 한국진출이 본격화되었다. 동시에 한국인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정책을 강화하여 한국어교육의 금지, 창씨개명(創氏改名)의 강요, 황국신민의 서사(誓詞) 구송(口誦), 신사참배 강요 등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하였다. 또 태평양전쟁 중에는 한민족에 대한 탄압과 착취가 한층 심해져서 1938년 ‘지원병제’, 1939년 ‘징용제(徵用制)’가 실시되어 한국 청·장년에게 병역·노역(勞役)이 강요되었고, 1942년에는 지원병제가 ‘징병제’로 바뀌었다. 또 한국학생에게도 일본학생에게 과해진 ‘학병제(學兵制)’가 똑같이 과해졌다.
다른 한편으로 각계각층의 한국국민이 농산물 공출, 유기(鍮器)·철물 등 군수물자 공출, 군용기 헌납금 갹출, 송근유(松根油) 채취 등 패색이 완연한 전쟁을 강행하려는 그들의 억지시책에 시달렸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게 되면서 한국은 그 동안의 독립운동의 결실로 1945년 8·15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후 1951년 샌프란시스코 대일(對日)강화조약의 성립과 때를 같이하여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이 시작되었으나 회담은 난항을 거듭하였다. 회담진전을 저해한 주된 요인으로는 1953년 10월 제3차 회담에서의 구보타[久保田]망언사건(일본측의 대표 구보타가 “일본에 의한 36년 간의 한국통치는 한국에 유익한 것이었다”고 망언한 사건), 1959년 8월 일본과 북한 적십자사 간에 체결된 재일교포 북송협정 및 일본의 독도(獨島) 영유권 주장 등을 들 수 있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박정희 정권이 등장하면서 그 해 11월 최고회의의장 박정희와 일본총리 이케다[池田] 간의 회담, 1962년 11월 ‘김종필·오히라[大平] 메모’ 작성 등 한·일관계의 조속한 타결을 위한 양국의 노력이 경주되어 1965년 6월 22일 1 기본조약, 2 어업협정, 3 경제협력협정, 4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협정, 5 문화협정의 5개 협정으로 된 한·일협정이, 이어 1966년 3월에는 무역협정, 1967년 8월에는 항공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후 양국관계는 특히 경제면에서 급속히 진전되어 1967년 이후부터는 한·일정기각료회의를 발족시켜 연례회의를 개최하고 있으며, 1981년 4월 한국측에서 제기한 대일(對日) 차관교섭은 1983년 l월 대통령 전두환과 일본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간의 정상회담에서 최종타결을 보았다.
그 결과 정부개발협력자금 18억 5000만 달러, 수출입은행 차관 21억 5,000만 달러를 합하여 총 40억 달러를 7년에 걸쳐 연리 6%로 대여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일무역적자는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대해 한국의 시정요구가 있었으나 일본은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가 1993년 11월 대통령 김영삼과 일본총리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간의 정상회담에서 경제관계의 균형적 발전을 협의하기 위한 ‘한·일신경제협력기구(NIEP)’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한국과 일본이 주요 무역상대국이라는 양국 상호간의 인식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은 미국에 이어 제2위의 수출상대국이면서 동시에 미국을 앞지르는 제1위의 수입상대국이고, 또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은 미국에 이어 중국과 맞먹는 제2∼3위의 수출상대국이다. 1994년만 하더라도 일본은 한국으로부터의 수입이 135억 2285만 달러인 데 비해, 수출은 253억 8998만 달러였다. 1998년에는 수입 122억 4000만 달러, 수출 168억 4000만 달러, 2001년에는 수입 161억 달러, 수출 260억 1000만 달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계속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일본은 한국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한 한·일기본조약을 위배하면서까지 민간차원을 빙자하여 대(對)북한접촉을 계속하고 있으며, 또 정부관계자들의 망언 등으로 한국과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1994년 5월에는 법무장관 나가노 시게토[永野茂門]가, 8월에는 환경청장관 사쿠라이 신[櫻井新]이, 10월에는 통산장관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가 "태평양전쟁은 침략전쟁이 아니라 구미열강으로부터 아시아제국(諸國)을 구하기 위한 방어전쟁이었다"라고 망언을 하는가 하면, 1995년 6월과 10월에는 전(前) 부총리 겸 외무장관 와타나베 미치오[渡邊美智雄]와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가 한일병탄조약의 합법성을 주장하여 한일관계를 악화시켰다. 하지만 2002년 월드컵을 양국이 공동개최하게 되었고 1999년 3월 총리 오부치 총리의 방한 때 한·일문화교류회를 발족시키기도 했다. 1998년 10월 대통령 김대중의 국빈 방일시 양국 정상은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과 이에 따른 부속서인 "행동계획"을 공동으로 발표하였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진 경제·문화 교류와는 반대로 일본 정치 지도자들의 지속적인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 등으로 정치적으로는 냉랭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참조항목강화도조약, 김대중, 대한민국임시정부, 3·1운동, 을사조약, 조선총독부, 징용, 창씨개명[네이버 지식백과] 일본의 대한관계 (두산백과)------------이견 있습니까?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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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の大韓関係 [ネイバー知識百と] 日本の大韓関係 (斗山百と)
韓国と日本は昔から文化的に幅広く交流して来たし, その過程で韓国が日本に及んだ影響はこの上なく大きかった. しかし韓国より先に開国をして明治維新[明治維新]を実現した日本は近代列強の勢力が韓国に押し寄せ始めた 19世紀後半には清(清)・ロシアといっしょに韓国に脅迫的な勢力で登場するようになった. 1876年韓国は日本の強圧で江華島条約(江華島條約)を締結するようになりながら開国をしたし, あの時から日本は韓国に対する侵略を本格化し始めた. 日清戦争(1894〜1895)と露日戦争(1904〜1905)で請い・ロシア勢力を退けた日本は韓国にとって強制で韓日議定書(韓日議定書)・韓日協約(韓日協約)を結ぶようにして, 1905年強制で乙巳條約を結んで韓国に統監府(統監部)を設置した.
高宗がヘイグで開かれる万国郵平和会議に密使を派遣して, 全国で義兵たちの一揆が続くなど挙国的な抗日(抗日)運動にもかかわらず 1910年 8月韓日併呑条約が締結された. その後統監府を朝鮮総督府(朝鮮総督府)で取り替えて植民地統治を実施した. 総督府は武断政治(武断政治)を断行して言論・出版・集会・決死の自由を完全に剥奪する一方, 経済面では韓国を日本の独占的商品市場及び食糧・原料供給地で改編するための色々政策を徹底的に実施した.
先に貨幤・金融・輸送・通信などの流通器具を整備して, 韓国民族資本の産業資本化を徹底的に統制したし, 特に土地調査事業を実施して近代的な土地所有権を確立するという名目の下に広大な土地を農民から収奪した. そのような植民地政治に対する抗拒が国内外で抗日義挙及び独立運動でずっと現われている途中 1919年遂に民族全体的な 3・1運動が起きた. 一方 4月には中国上海[上海]に ‘大韓民国臨時政府’が樹立されてその後独立運動の足だまりになった. 3・1運動は日本の無力の前で幾多の死傷者と投獄者を出したまま目的を果たすことができずに巻いたが, 韓国民族の独立に対する強烈な意志を対内外的に知らせる一方, 日本にとって従来の武断政治を緩和して文化政治を標榜するようにするきっかけになった.
文化政治の実施で言論・出版・決死・集会が決まった範囲内で許容されてハングルになった新聞・雑誌が発刊されて各種団体, 特に 6・10万歳運動をきっかけで新幹会(新幹会)が結成された. しかしそのような政策転換は效果的な植民地収奪の手段に利用されたし, 秘密決死とその運動の表面化を狙った計略に過ぎなかった. 国内では 1929年 11月光州学生事件をきっかけで学生運動が 1930年まで持続したし, 海外では独立軍の武将抗日闘いが満洲一円及びシベリア等地を拠点でしつこく持続している途中満州の変以後臨時政府傘下の光復軍に統合された. 一方日本は 1931年満州の変を起こした後から韓国を大陸侵略のための兵たん基地に再編し始めた.
韓国の豊かな地下資源と水力資源及び安っぽい植民地労動力の搾取を前提に日本独占資本の韓国進出が本格化された. 同時に韓国人の皇国臣民化(皇国臣民化)政策を強化して韓国語教育の禁止, 創氏改名(創氏改名)の強要, 皇国臣民の敍事(誓詞) 口誦(口誦), 神もうで強要など民族抹殺政策を実施した. また太平洋戦争の中には韓民族に対する弾圧と搾取がいっそうひどくなって 1938年 ‘志願兵制’, 1939年 ‘徴用制(徴用制)’が実施されて韓国青・長年に兵役・労役(労役)が強要されたし, 1942年には志願兵制が ‘徴兵制’に変わった. また韓国学生にも日本学生に科された ‘学兵制(学兵制)’がまったく同じく科された.
他の一方で各界各層の韓国国民が農産物供出, 遺棄(鍮器)・鉄物など軍需物資供出, 軍用機献納金乂出, 松根油(松根油) 採取など負け色がはっきりと現れる戦争を強行しようとする彼らの減らず口施策に苦しんだ.
第2次世界大戦で日本が敗亡するようになりながら韓国はその間の独立運動の結実で 1945年 8・15光復を迎えるようになった. その後 1951年サンフランシスコ対日(対日)講和條約の成立と時をようにして限り・一国校正床花のための会談が始まったが会談は難航を繰り返えした. 会談進展を阻害した主な要因では 1953年 10月第3次会談でのグボタ[久保田]妄言社でも(日本側の代表駆け足他家 “日本による 36年の間の韓国統治は韓国に有益なことだった”と妄言した事件), 1959年 8月日本と北朝鮮赤十字社の間に締結された在日韓国人北送協定及び日本の独島(独島) 領有権主張などをあげることができる.
1961年 516軍事政変で朴正煕政権が登場しながらその年 11月最高会議議長朴正煕と日本総理Ikeda[池田] の間の会談, 1962年 11月 ‘キム・ジョンピル・大平[大平] メモ’ 作成など韓・日関係の早速な妥結のための両国の努力が競走されて 1965年 6月 22日 1 基本条約, 2 漁業協定, 3 経済協力協定, 4 在日韓国人の法的地位協定, 5 文化協定の 5個協定になった限り・イルヒョブゾングが, 引き続き 1966年 3月には貿易協定, 1967年 8月には航空協定が締結された. その後両国関係は特に経済面で急速に先に進んで 1967年以後からは限り・日程棄却料会議を発足させて年例会議を開催しているし, 1981年 4月韓国側で申し立てた対日(対日) 次官交渉は 1983年 l月大統領全斗換と日本総理中曽根康弘[中曽根康弘] の間の首脳会談で最終妥結を見た.
その結果政府開発協力資金 18億 5000万ドル, 輸出入銀行借款 21億 5,000万ドルを合わせて総 40億ドルを 7年にわたって年利 6%で貸与することに決まった. それにもかかわらず韓国の対日貿易赤字は持続的に拡がった. これに対して韓国の是正要求があったが日本は全然誠意を見せていなかったり 1993年 11月大統領キム・ヨンサムと日本総理細川森ヒーロー[細川護煕] の間の首脳会談で経済関係の均衡的発展を協議するための ‘限り・一身経済協力期で(NIEP)’を設置することに合議した. このような背景には韓国と日本が主要貿易商対局という両国相互間の認識が作用したからだ.
韓国の立場で見れば日本はアメリカに引き続き第2位の輸出商対局ながら同時にアメリカを追い越す第1位の輸入商対局で, また日本の立場(入場)で見れば韓国はアメリカに引き続き中国と立ち並ぶ第2〜3位の輸出商対局だ. 1994年だけしても日本は韓国からの輸入が 135億 2285万ドルであるところ比べて, 輸出は 253億 8998万ドルだった. 1998年には収入 122億 4000万ドル, 輸出 168億 4000万ドル, 2001年には収入 161億ドル, 輸出 260億 1000万ドルだ.
それにもかかわらず政治的にはずっと不便な関係を維持して来ている. 日本は韓国を ¥"韓半島の唯一の合法政府¥"で認めた限り・日記本条約を違反してまで民間次元をかこつけて対(対)北朝鮮接触を続いているし, また政府関係者たちの妄言などで韓国との葛藤を深化させている. 1994年 5月には法務長官長野時ゲットー[永野茂門]が, 8月には環境庁長官Sakurai神さま[桜井新]が, 10月には通産長官Hashimotoリュウタロウ[橋本竜太郎]が太平洋戦争は侵略戦争ではなく欧米列強からアジア諸国(諸国)を求めるための防御戦争だったと妄言を言うかと言えば, 1995年 6月と 10月には私は(前) 副総理兼外相Watanabe道男[渡辺美智雄]と総理村山富市[村山富市]が韓日併呑条約の合法性を主張して韓日関係を悪化させた. しかし 2002年ワールドカップを両国が共同開催するようになったし 1999年 3月総理小淵総理の訪韓の時限り・日文華僑類回を発足させたりした. 1998年 10月大統領キム・デジュンの国賓訪日の時両国首脳は ¥"21世紀新しい韓・日パートナーシップ共同宣言¥"とこれによる付属書である ¥"行動計画¥"を共同と発表した.
21世紀に立ち入りながらもっと活発になった経済・文化交流とは反対に日本政治リーダーたちの持続的な靖国神社参拜, 日本の独島領有権主張, 日本の歴史教科書歪曲問題などで政治的には冷ややかな関係を維持している.
参照項目江華島条約, キム・デジュン, 大韓民国臨時政府, 3・1運動, 乙巳條約, 朝鮮総督府, 徴用, 創氏改名[ネイバー知識百と] 日本の大韓関係 (斗山百と)------------異見ありますか? w
高宗がヘイグで開かれる万国郵平和会議に密使を派遣して, 全国で義兵たちの一揆が続くなど挙国的な抗日(抗日)運動にもかかわらず 1910年 8月韓日併呑条約が締結された. その後統監府を朝鮮総督府(朝鮮総督府)で取り替えて植民地統治を実施した. 総督府は武断政治(武断政治)を断行して言論・出版・集会・決死の自由を完全に剥奪する一方, 経済面では韓国を日本の独占的商品市場及び食糧・原料供給地で改編するための色々政策を徹底的に実施した.
先に貨幤・金融・輸送・通信などの流通器具を整備して, 韓国民族資本の産業資本化を徹底的に統制したし, 特に土地調査事業を実施して近代的な土地所有権を確立するという名目の下に広大な土地を農民から収奪した. そのような植民地政治に対する抗拒が国内外で抗日義挙及び独立運動でずっと現われている途中 1919年遂に民族全体的な 3・1運動が起きた. 一方 4月には中国上海[上海]に ‘大韓民国臨時政府’が樹立されてその後独立運動の足だまりになった. 3・1運動は日本の無力の前で幾多の死傷者と投獄者を出したまま目的を果たすことができずに巻いたが, 韓国民族の独立に対する強烈な意志を対内外的に知らせる一方, 日本にとって従来の武断政治を緩和して文化政治を標榜するようにするきっかけになった.
文化政治の実施で言論・出版・決死・集会が決まった範囲内で許容されてハングルになった新聞・雑誌が発刊されて各種団体, 特に 6・10万歳運動をきっかけで新幹会(新幹会)が結成された. しかしそのような政策転換は效果的な植民地収奪の手段に利用されたし, 秘密決死とその運動の表面化を狙った計略に過ぎなかった. 国内では 1929年 11月光州学生事件をきっかけで学生運動が 1930年まで持続したし, 海外では独立軍の武将抗日闘いが満洲一円及びシベリア等地を拠点でしつこく持続している途中満州の変以後臨時政府傘下の光復軍に統合された. 一方日本は 1931年満州の変を起こした後から韓国を大陸侵略のための兵たん基地に再編し始めた.
韓国の豊かな地下資源と水力資源及び安っぽい植民地労動力の搾取を前提に日本独占資本の韓国進出が本格化された. 同時に韓国人の皇国臣民化(皇国臣民化)政策を強化して韓国語教育の禁止, 創氏改名(創氏改名)の強要, 皇国臣民の敍事(誓詞) 口誦(口誦), 神もうで強要など民族抹殺政策を実施した. また太平洋戦争の中には韓民族に対する弾圧と搾取がいっそうひどくなって 1938年 ‘志願兵制’, 1939年 ‘徴用制(徴用制)’が実施されて韓国青・長年に兵役・労役(労役)が強要されたし, 1942年には志願兵制が ‘徴兵制’に変わった. また韓国学生にも日本学生に科された ‘学兵制(学兵制)’がまったく同じく科された.
他の一方で各界各層の韓国国民が農産物供出, 遺棄(鍮器)・鉄物など軍需物資供出, 軍用機献納金乂出, 松根油(松根油) 採取など負け色がはっきりと現れる戦争を強行しようとする彼らの減らず口施策に苦しんだ.
第2次世界大戦で日本が敗亡するようになりながら韓国はその間の独立運動の結実で 1945年 8・15光復を迎えるようになった. その後 1951年サンフランシスコ対日(対日)講和條約の成立と時をようにして限り・一国校正床花のための会談が始まったが会談は難航を繰り返えした. 会談進展を阻害した主な要因では 1953年 10月第3次会談でのグボタ[久保田]妄言社でも(日本側の代表駆け足他家 “日本による 36年の間の韓国統治は韓国に有益なことだった”と妄言した事件), 1959年 8月日本と北朝鮮赤十字社の間に締結された在日韓国人北送協定及び日本の独島(独島) 領有権主張などをあげることができる.
1961年 516軍事政変で朴正煕政権が登場しながらその年 11月最高会議議長朴正煕と日本総理Ikeda[池田] の間の会談, 1962年 11月 ‘キム・ジョンピル・大平[大平] メモ’ 作成など韓・日関係の早速な妥結のための両国の努力が競走されて 1965年 6月 22日 1 基本条約, 2 漁業協定, 3 経済協力協定, 4 在日韓国人の法的地位協定, 5 文化協定の 5個協定になった限り・イルヒョブゾングが, 引き続き 1966年 3月には貿易協定, 1967年 8月には航空協定が締結された. その後両国関係は特に経済面で急速に先に進んで 1967年以後からは限り・日程棄却料会議を発足させて年例会議を開催しているし, 1981年 4月韓国側で申し立てた対日(対日) 次官交渉は 1983年 l月大統領全斗換と日本総理中曽根康弘[中曽根康弘] の間の首脳会談で最終妥結を見た.
その結果政府開発協力資金 18億 5000万ドル, 輸出入銀行借款 21億 5,000万ドルを合わせて総 40億ドルを 7年にわたって年利 6%で貸与することに決まった. それにもかかわらず韓国の対日貿易赤字は持続的に拡がった. これに対して韓国の是正要求があったが日本は全然誠意を見せていなかったり 1993年 11月大統領キム・ヨンサムと日本総理細川森ヒーロー[細川護煕] の間の首脳会談で経済関係の均衡的発展を協議するための ‘限り・一身経済協力期で(NIEP)’を設置することに合議した. このような背景には韓国と日本が主要貿易商対局という両国相互間の認識が作用したからだ.
韓国の立場で見れば日本はアメリカに引き続き第2位の輸出商対局ながら同時にアメリカを追い越す第1位の輸入商対局で, また日本の立場(入場)で見れば韓国はアメリカに引き続き中国と立ち並ぶ第2〜3位の輸出商対局だ. 1994年だけしても日本は韓国からの輸入が 135億 2285万ドルであるところ比べて, 輸出は 253億 8998万ドルだった. 1998年には収入 122億 4000万ドル, 輸出 168億 4000万ドル, 2001年には収入 161億ドル, 輸出 260億 1000万ドルだ.
それにもかかわらず政治的にはずっと不便な関係を維持して来ている. 日本は韓国を ¥"韓半島の唯一の合法政府¥"で認めた限り・日記本条約を違反してまで民間次元をかこつけて対(対)北朝鮮接触を続いているし, また政府関係者たちの妄言などで韓国との葛藤を深化させている. 1994年 5月には法務長官長野時ゲットー[永野茂門]が, 8月には環境庁長官Sakurai神さま[桜井新]が, 10月には通産長官Hashimotoリュウタロウ[橋本竜太郎]が太平洋戦争は侵略戦争ではなく欧米列強からアジア諸国(諸国)を求めるための防御戦争だったと妄言を言うかと言えば, 1995年 6月と 10月には私は(前) 副総理兼外相Watanabe道男[渡辺美智雄]と総理村山富市[村山富市]が韓日併呑条約の合法性を主張して韓日関係を悪化させた. しかし 2002年ワールドカップを両国が共同開催するようになったし 1999年 3月総理小淵総理の訪韓の時限り・日文華僑類回を発足させたりした. 1998年 10月大統領キム・デジュンの国賓訪日の時両国首脳は ¥"21世紀新しい韓・日パートナーシップ共同宣言¥"とこれによる付属書である ¥"行動計画¥"を共同と発表した.
21世紀に立ち入りながらもっと活発になった経済・文化交流とは反対に日本政治リーダーたちの持続的な靖国神社参拜, 日本の独島領有権主張, 日本の歴史教科書歪曲問題などで政治的には冷ややかな関係を維持している.
参照項目江華島条約, キム・デジュン, 大韓民国臨時政府, 3・1運動, 乙巳條約, 朝鮮総督府, 徴用, 創氏改名[ネイバー知識百と] 日本の大韓関係 (斗山百と)------------異見ありますか?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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