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두자, 아직 살아있다.
중국침략 일본군의 서류에 따르면 남경대학살전후 두달사이에 남경지구의 인구는 113만명에서 34.5만명으로 감소, 감소된 인수는 78.5만명이나 되였다.
이 서류는 1938년 2월 19일과 28일에 중국침략 일본군 화중파견헌병대 사령관인 오오키 시게루(大木繁)가 관동군사령부에 보고한 《남경헌병대 관할구역내 치안회복상황에 관한 보고》이다.
이 보고에 있는 《사변전후의 인구대비》를 보면 《사변》전의 남경 인구는 100만명(하관을 포함하지 않음)이였는데 하순(2월 28일)에 이르러 돌아온 인구는 33.5만명이였다. 하관인구는 13만명이였는데 1만명이 돌아왔다
헤이룽장 헤이허(黑河)에 사는 일본인이 일본 니가타현에 사는 지인에게 보낸 이 편지에는 “위안소 병력은 단지 20명 정도며 전부 조선인으로 국가총동원법에 묶여 온 것”이라는 표현이 담겨 있다.
기록보관소 자오위제(趙玉潔) 연구위원은 이 사료에 대해 “’병력‘이라는 표현이 좀 생소하긴 하지만 문맥과 일본어식 여자이름이 나온 것을 종합하면 ’군 위안부‘를 지칭한 것으로 봐야한다”고 설명했다.
일본군이 전쟁 당시 강제 동원한 위안부는 40만명에 달한 데 중국 여성 20만명, 한반도 여성 14~16만명이고, 동남아 국가 여성들도 포함됐다
공개된 문서를 통해 일본군이 위안부 동원하려고 군용 공금을 지출했다는 사실이 최초로 밝혀졌다"면서 "만주국중앙은행은 관동군헌병대를 위해 위안부 구매(동원) 자금을 이체하는 은행서비스를 제공했고, 이는 위안부 강제동원이 국가적인 제도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