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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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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본에서는 신라를 철저하게 미워하고 배타시해 왔을까?
이 큰 의문점 때문에 필자는 오랜 세월 일본 속의 신라 연구에 집중해왔다.
일본왕실이 9세기 초엽부터 역사 문서에 공공연하게 신라를 적대시해온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결론적으로 그 미스터리는 일본의 국가종교가 된 ‘일본 신도(日本 神道)’의 뿌리가
다름 아닌 고대신라의 신도(神道)였다는 사실을 일본왕실이 숨기려 발버둥친 데 있다.
필자는 그 역사의 내막을 일본 고대 문헌 등을 통해 낱낱이 고증 분석했다.

신라를 적대시한 일본 왕실문서

고대 일본이 신라를 배격하며 적대시한 사실은 일본왕실 문서에 그 증거가 나타나 있다.
천황가의 법령 주석서인 30권짜리 ‘영집해(令集解)’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고기(古記)’에 전하는 바에 따르자면, 일본천황의 치세 때에 조서를 내려서 묻기를
‘이웃나라’와 ‘달갑지 않은 나라’는 어찌 구별하는가.
답하기를 ‘이웃나라는 큰 당나라이며, 달갑지 않은 나라는 신라이로다.”(제3권)

이 문서에서 인용한 책 ‘고기’는 서기 738년에 씌어진 역사 기록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문서기록상 ‘영집해’(859∼876년 성립)가 작성된 9세기가 아닌
이미 8세기 초부터 일본은 신라를 배격해온 것이다.
이에 대해 저명한 사학자 오오와 이와오(大和岩雄, 1928∼)씨는 이렇게 지적한다.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들을 ‘귀화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고대 역사책
‘일본서기’(720년 편찬)에서도 3국(신라·백제·고구려)을 뚜렷하게 구별하고 있다.
3국을 문화의 선진국이라고 인정하고 있지만 단지 백제로부터의 문물 도래만을 강조하며,
달갑지 않은 나라(이하‘蕃國’이라고 칭함)로 취급한 것은 주로 신라였다.

신라를 번국으로 삼은 것은,
통일신라(668년 백제와 고구려를 모두 정복한 시기 이후)가 되기 이전부터
신라를 적국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통일신라 시대 이후부터는 신라가 한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했으므로,
신라와 조선과 번국을 일체화하는 해석도 생겨났겠지만,
‘일본서기’가 씌어진 무렵의 ‘달갑지 않은 나라(번국)는 신라이로다’는
다분히 신라를 적국으로 여기는 관점에서 생긴 것이다.”(‘新羅蕃國視에 대하여’, 1978)

쉽게 말해 오오와 이와오의 견해는,
백제인 계열의 일본왕실이 신라를 미워한 것은 신라가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킨 데서만
기인하는 게 아니라 이미 그 이전의 시대부터였다는 것이다.

우리의 ‘삼국사기’에도 나오듯이 신라·백제·고구려가 서로 적대시하며
전쟁을 했기 때문에 백제인 계열의 일본왕실이 신라를 곱게 봤을 리 만무하다.

그런데 백제인 계열의 일본왕실에서
본국 백제의 멸망 이전부터 신라를 적대시한 또다른 이유도 있다.

그 역사적 배경은 538년 백제 성왕이 백제인 계열의 왜왕인
킨메이(欽明, 538∼571년 재위)천황에게 백제불교를 전파시킨 일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백제불교가 들어가기 이전까지의 일본 땅에서는
신라의 신도(神道)가 왜왕실을 중심으로 국가 종교로서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일본왕실에 백제 불교가 전파됨으로써,
신라 신도와 백제불교는 서로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급기야 신도와 불교의 종교전쟁(587년)으로 비화되고마는 사태까지 발생했던 것이다.

신라 신도와 백제불교의 종교전쟁

여기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 백제 계열의 왜왕 킨메이천황과
그의 아들 비타쓰(敏達, 572∼585년 재위)천황이 백제인이라는 사실을 간략하게 고증해둔다.

즉 킨메이천황의 친아들인 “비타쓰천황은 백제 왕족이다”라는 역사 기록이
일본왕실 족보인 ‘신찬성씨록’(815년 편찬)에 씌어져 있다.

더구나 비타쓰천황은 왜왕실에서 최초로
‘백제궁(百濟宮)’을 지었다는 사실이 ‘일본서기’와 ‘부상략기’등 역사서에 실려 있다.
당시 백제왕궁을 세운 장소는 나라(奈良)의 ‘백제대정(百濟大井)’이란 곳이다.

아무튼 킨메이천황 초기에 백제 성왕(523∼554년 재위)이 불경과 불상 등을 보내
백제인 왜왕실에서도 불교를 믿으라고 권했다.

이때 최고 대신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 505∼570년)가
백제 성왕이 보낸 불상을 킨메이천황으로부터 물려받아 자기 저택에 모셨다.

백제인이었던 소가노 이나메 대신은 자택을 불당으로 개축하여
‘코우겐지(向原寺)’라고 이름짓고 백제 불교 포교에 앞장섰다.

불상을 처음 본 사람들은 이 새로운 종교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신도에서는 사당(신사)에 신의 위패 등이 있을 따름이지
불상처럼 눈에 보이는 실체는 없었던 것이다.
즉 지금까지의 신도신앙에서 불교로 신앙 대상을 바꾸는 바람이 일었던 것이다.

이에 크게 당황한 것은 모노노베노 오코시(物部尾輿, 496∼570년) 대련이었다.
당시 왜왕실 조정은 ‘대신’직 다음의 제2인자 직위가 ‘대련’직이었으며,
대련은 군사와 경찰, 치안권을 관장하고 있었다.

이 모노노베노 가문은 백제로부터 불교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조정에서 신도를 장악하고 천황을 보필하던 국신파(國神派)의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그는 백제불교가 들어오자 불만을 품고 곧 킨메이천황에게 불교를 배척하는 내용의
상주를 하면서, 국신(國神)이 불교에 대해 진노한다고 경고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천하의 왕께서는, 항상 천지 사직의 180신을 춘하추동에 걸쳐 제사드리는 것이
그 일이옵니다. 이제 처음으로 외국신(부처-필자 주)을 예배한다는 것은 모름지기 국신의
진노를 사는 일입니다.”(‘일본서기’)

이와 같이 상주하자 킨메이천황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원하는 사람인 이나메 대신에게 불상을 맡겨서 시험 삼아 예배시키도록 하겠소.”

이런 까닭에 소가노 이나메 대신이 불상을 자택으로 가져가
코우겐지라는 사찰을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모노노베노 오코시가
신라계 신(饒速日命)의 후손이라는 것이 ‘신찬성씨록’에 밝혀져 있다.
이에 의하면 모노노베노 오코시의 할아버지인 모노노베노 메(物部目)가 신라신의
12대손으로 나와 있으므로, 모노노베노 오코시는 신라신의 14대손인 것이다.

이로써 살펴보더라도 백제불교가 일본으로 건너오기 전까지는
백제인 왜왕실에서도 신라신도를 받들어 춘하추동으로 천지사직 180신에 대한 제사를
왕실에서 거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이런 상황에서도 백제불교가 밀고 들어왔다는 것은
당시 본국 백제가 백제계 왜왕실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일본 역사에서는 신도와 불교가 충돌하게 된 사건을
이른바‘숭불논쟁(崇佛論爭)’이라 부른다.

이 숭불논쟁은 결코 말싸움으로 끝나지 않았다.
끝내 큰 종교전쟁으로까지 확대되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이후 벌어진 종교전쟁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넘어가기로 한다.
신라계 국신파인 모노노베노 오코시의 아들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 515∼587년) 대련과
백제계 숭불파인 소가노 이나메의 아들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550∼626년) 대신은
아버지대의 불화를 이어받아 결국 끔찍한 혈투를 벌이게 된다.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이
코우겐지 사찰을 불지르고 불상을 파괴하는 훼불사건을 일으킨 것이 570년의 일.

그뿐 아니라 585년에는 소가노 우마코 대련이 역시 자기 집에 세운 불교사찰인
이시카와정사(石川精舍)를,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이 또다시 불질러버렸다.

이렇게 연거푸 훼불사건이 일어나자 587년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왕실 실권파로서 관군을 편성해
신라 신도파인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의 반항군과 전쟁을 일으킨다.
이 전쟁에서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전사하고 만다.

이후 숭불파인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왜왕실에서 백제불교를 중흥시키기에 이른다.
물론 불교 중흥과정에서 머지않아 신라불교와 고구려불교도 건너와 왜왕실에 참여하게 된다.

또한 불교가 번성한다고 해서 신도가 결코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다.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고 해서 일본왕실에서는 신도와 불교가 서로 사이좋게 손잡고
일체감 속에 번창해가는 일본적인 특성도 보이는 것이다.

즉 신사와 사찰이 협동하며 공존하는 특성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일본은 조선의 분국(分國)

아무튼 538년 이전의 왜왕실에서 불교의 발자취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당시까지는 백제인 왜왕실에서도 신도를 존중해왔다.

엄밀하게 지적한다면, 이 신도는 고조선의 단군 숭배 등 천신(天神)신앙이 그 원류였다고 본다.
구태여 ‘신라신도’라고 분명한 구별을 한 것은 아니다.

집약적으로 표현하자면 단군 후손인 고조선의 신도가
일본의 야요이시대(BC 3년∼AD 3년)에 일본열도로 전파되었던 것이다.

즉 벼농사에서부터 대장간의 철기 생산, 금속공예, 베틀의 직조 등에 이르기까지 고대한국의 온갖
산업문화가 일본으로 유입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천신신앙인 신도도 일본에 스며들게 되었다.

우리 고대문화가 일본문화의 원류라는 사실은
지금까지 일본의 저명한 학자들이 진솔하게 시인해왔다.

이를테면 카큐슈우인대의 오오노 스즈무(大野 晋, 1919∼) 교수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왜인에게 금속 사용법을 가르치고, 야금·금공 기술을 전했으며,
염색·피혁제조·베틀 직조·기와 제조·의학·역법·천문학·조불(造佛)·사찰 건축·조탑 등
모든 것을 가르쳤다”(‘日本語の 世界’, 1980)

고 밝혔다.

하늘신의 자손들이 지상으로 내려왔다는,
일본의 천손강림 신화도 조선의 건국신화에서 유래했다고 말한다.

“일본의 천손강림 신화가 조선 각국의 건국신화와 현저하게 유사한 것을 보이고 있다.…
조선반도 남쪽에서 벼농사를 하고, 그곳에서 금속기를 만들어 생활하고 있던 종족이
천손강림 신화와 금속기 등을 일본으로 가져왔다고 본다.”(앞의 책)

당시 농경을 비롯한 온갖 산업문화를 가지고 건너간 한반도 사람들이,
미개한 일본땅에 정착하면서 그 선주민들을 지배하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기에 일본의 여러 권위 있는 사학자들은
일본 천황가가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사람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마쓰모토 세이쵸우(松本淸張)씨가‘한일동족설’을 매우 설득력 있게 밝힌 것은 꽤 유명하다.

“도대체 일본인의 원주민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
모름지기 인도네시아인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가령 이들 원주민을 ‘야요이인’이라고 치자.
그 원주민들이 살고 있던 곳에, 조선에서 건너온 민족이 있었다.

이것이 이른바 조선의 ‘이즈모(出雲)’ 민족이다.
이 이즈모 민족이 제1차 도래민족으로서 야요이시대 전기 경부터 상당수 건너와서 살고 있었다.
뒤를 이어 조선에서 천손족(天孫族), 기마(騎馬)민족이라고도 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건너왔다.…
그러므로 모두들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이 조선문화를 흡수한 것이 아니라,
본래 서로가 똑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한다.


또 한가지 극언(極言)한다면, 일본은 조선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조선의 분국(分國)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쓰시마(對馬島)해협이 있어서, 조선이 동란을 겪을 때(신라·백제·고구려 등
3국의 전쟁시기-필자 주) 일본은 독립하여 더욱 더 일본적으로 되어 갔다.
일본적이라는 것은 선주 민족의 풍습을 퍼내 거기다가 융합시켰다고 본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과도 같다.”(‘東京新聞’, 1972년 4월1일자 조간)

마쓰모토 세이쵸우가 지적한 ‘이즈모’ 민족은 ‘신라’족을 가리키는 것이며,
천손족은 단군신화를 비롯해 고구려신화, 신라신화, 가야신화 등을 가진
우리 민족 전체를 통틀어 가리킨다.

또한 기마민족의 경우도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등
고대 만주 땅에서 살다가 한반도로 이주한 우리 민족 전체를 일컫는 것이기도 하다.

또 저명한 고고학자 미카미 쓰구오(三上次男)의 연구를 인용해, 토우쿄우대 사학과의
이노우에 미쓰사타(井上光貞) 교수는 기마민족의 일본 정복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미카미씨에 따르면 부여며 고구려, 백제 등의 지배자는 수렵민족적인 기마민족이다.
그뿐 아니라 일본 국가를 성립시킨 주체의 대부분도 그와 같은 성질의 민족이 이룬 것이라고
보아도 차질이 없을 것이다.

야요이시대에 조성된 북큐우슈우의 ‘고인돌’은
똑같은 시기의 남한에서도 행해졌던 묘제(墓制)인데, 이는 남한에서 갓 발생했던 계급사회의
지배자가 북큐우슈우로 이동했다는 것을 말해주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기마민족이 큐우슈우로 쳐들어왔을 가능성은
기원전 2세기경의 일이라면 이상할 것이 없다.”(‘日本國家の起源, 1967)

경상도 말로 제사 지내는 천황가

아무튼 불교가 전파되기 이전 고대 왜왕실에서 신라 신도 제사를 지켜왔다는 것은
역사 기록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6세기경의 고대 역사기록인 ‘구사기(舊事記)’의 ‘천손본기(天孫本紀)’에는
신라 신도 제사를 담당해온 모노노베노(物部) 가문에 대한 상세한 계보가 밝혀져 있다.

그런데 이 제사 때는 놀랍다고나 할까, 아니 당연하다고 할까 ?
경상도 말인‘신라어’로 강신(降神)의 축문을 외운다.

긴 축문 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경상도 말은 다음과 같다. 원문은 물론 한자어인데,
‘아지매 여신(女神)’이 신라로부터 천황가 제사 자리에 오라고 부르는 초혼(招魂)이다.

아지매 오게, 오, 오, 오, 오, 오게
阿知女 於介, 於, 於, 於, 於, 於介

일본말로 이 축문의 한자어들을 읽을 때에는 경상도 말이 그대로 나타난다.
이 축문의 한자 표기는‘이두(향찰)’식인 것이다.
이를 일본에서는‘만요우카나’식이라고 부른다.

위의 이두식 축문을 우리나라 말로 읽는다면
‘아지녀 어개, 어, 어, 어, 어, 어개’로 전혀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말이 된다.

이렇게 천황가의 축문이 경상도 말로 읽힌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천황가의 신도 뿌리가
경상도 말을 사용하는 신라 신도와 맞닿아 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축문에 나오는 ‘아지매(阿知女)’란 무슨 뜻인가?
경상도 방언으로‘아주머니’라는 말인데 지금도 경상도 사람들은 아주머니를 아지매라고 표현한다.

오늘날 부인에 대한 존칭어인‘아주머니(아지매)’는
고대 신라에서 신분이 고귀한 여성, 신성한 여성, 즉 ‘여신’을 존칭하던 대명사였다고 본다.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또 하나의 증거가 있다.
일본 고대사에서는 ‘여신’이나 귀족 출신의 젊은 여성을 가리키는 말로
‘오미나(をみな)’라는 여성대명사가 사용됐다.

일본 고대신화에서 태초의 개국신(開國神)인 ‘이자나기노미코트’가 최초의 처녀 여신
‘이자나미노미코토’에게 ‘여자’라는 말을 쓸 때 ‘오미나’라고 부른 것이 그 최초다.
이 ‘오미나’는 본래 우리나라의 옛말인‘에미나’에서 나온 말이다.

고대 한국에서는‘여자’를‘에미나’로 불렀다.
그 흔적은 함경도며 강원도, 경상도 등 동해권 지방에서 아직도 통용되는
‘에미나’라는 말에서도 잘 살펴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오늘날 일반 명사로서 ‘온나(おんな, 女)’라는 말을 쓰고 있다.
바로 이 ‘온나’의 어원이 귀족 여성을 칭하는 ‘오미나’라는 것은
일찍부터 저명한 일본어 학자들도 지적하고 있었다.

“오미나(をみな, 女)는 온나(おんな)이며 또한 매(め)라고도 부른다.
여신(女神)을 ‘오미나가미(をみながみ)’로도 부른다.”(金澤庄三郞, ‘廣辭林’, 1925)

경상도 방언에서는 또한 ‘어머니’를 ‘어매’라고 하는데,
여기서 매(女)는 ‘아지매’의 매와 통한다.

또한 이 매에서 뒷날 어미 모(母) 자를 이루는‘모’의 발음도 나왔다고 본다.

신라신(園神)과 백제신(韓神)





사진 1

현재의 일본 천황가에서도
신라신인 ‘소노카미(園神)’와
백제신인 ‘카라카미(韓神)’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물론 일본 천황가 내부 사항은 일체 공개되지 않고 있어
일본의 전문학자들도 근래에는 천황가 제사에 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고대부터 일본의 천황들이 왕궁에서 제사를 모신 최고의 신은
신라신인 원신(園神, そのかみ)과 백제신인 한신(韓神, からかみ)이었다는 점이다.
그 사실은 일본 고대 천황가 문서에 상세하게 밝혀져 있다.

‘엥기시키(延喜式, 연희식)’라는 이 천황가 문서는
서기 905년 다이고천황(897∼930년 재위)의 명에 따라 집필이 시작된 이후 927년에 완성되었다.
장장 23년에 걸쳐 완성된 이 문서는 일본 천황가의 모든 왕실제도와 규범이 50권 분량으로 편찬된
중요한 역사 기록이다.

왕명에 의해서 이것을 작성한 주체는 후지와라노 토키히라(871∼909년) 대신과
그의 아우 후지와라노 타다히라(880∼949년) 대신 형제다.

왕실 귀족가문의 두 형제는 천황의 최측근으로서,
좌대신과 태정대신 등 최고 장관직에 있었던 백제계 인물들이다.

이 ‘연희식’의 제1권 신기(神祇)편에는 서두에 천황궁에서 모시는 사당의 3신이 나온다.
가장 앞에는 신라신을 모신 ‘원신사(園神社, 소노카미노야시로)’가 나오고
두번째로 ‘한신사(韓神社, 카라카미노야시로)’가 등장한다.(사진 1참조)

또한 이 기록에 잇대어서 살펴보면, 천황들이 모셔온 왕실의 신은 모두 285신에 이른다.
그 순서도 맨 앞에 신라계 신사인 원신사에서 모시는 한 분의 신이 나오고,
뒤이어 백제계 신사인 한신사에서 모시는 두 분의 신이 등장한다.

그 다음으로 신라계의 여러 신들을 모신 신사가 줄을 잇는다.
‘카모신사(賀茂神社)’ ‘마쓰오대사(松尾大社)’ ‘이나리대사(稻荷大社)’ 등이 그것이다.
다음으로는 백제신 네 분을 모신 ‘히라노신사(平野神社)’ 등도 등장한다.

이것은 ‘연희식’ 편찬 당시 천황들이 백제 계열의 왕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신들을 모신 신사와 백제신들을 모신 신사들의 서열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또 천황가 신화(神話)의 신들이 대부분 신라신이었으며,
일본 고대사(고사기,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신들도 신라신이 주도적이었다는 점과 관계가 깊다.

그런데 일본의 신통보는
신라신과 백제신의 계보를 한 조상신의 후손신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712년 일본 역사상 최초로 편찬된 ‘고사기(古事記)’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대년신(大年神)이 신활수비신의 딸인 이노비매와 혼인하여 낳은 자식은 대국어혼신(大國御魂神),
다음은 한신(韓神), 다음은 증부리신(曾富理神), 다음은 백일신(白日神), 다음은 성신(聖神)이다.”

‘대년신’이란 신라신인 ‘소잔오존(素盞烏尊,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아들신이다.
이 대년신에게서 태어난 다섯 아들 신들은 당연히 신라계일 터인데, 제2자인 한신(韓神)만은
백제신이다. 어째서 신라신의 자식들 중에 백제신이 들어 있는지는 앞으로의 연구 과제다.

단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둘 것이 있다.
일본 최초의 역사책 ‘고사기’를 쓴 안만려(安萬侶, 야스마로, 723년 사망)는
조정에서 내무장관격인 ‘민부경’으로서, 백제 계열의 조신이었다.

아무튼 한신은 일본 천황가 제사에 신라신과 함께 모시는 백제신이거니와,
‘증부리신’은 신라신 원신(園神)을 가리키는 또다른 표현이다.
‘증부리신’은 일본어로 ‘소호리’의 신, 즉 ‘서울’의 신이다.

증부리신으로도 불리는 원신이 신라신이라는 것은 일본의 권위 있는 사학자들의 통설이며,
쿄우토대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1927∼) 교수는 다음과 같이 논술했다.

“역사책 ‘고사기’에는 대년신과 이노비매 사이에서 태어난 5신들 중에서,
한신과 증부리신 등 조선의 신들이 등장하고 있다.

증부리신이라는 것은 소시머리(ソシモリ, 牛頭)와 연관이 있는,
신라(新羅) 연고를 가진 신의 이름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한신(韓神)은 원신(園神)과 나란히 조정의 왕궁 안에 모신 신으로 존숭되고 있고,
궁정의 진혼제 전야에 제사드리며, 그곳에서 ‘카구라(神樂)’도 연주하게 된다.

그러기에 9세기 중엽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카구라우타(神樂歌, 천황가 제사의식 때 축문 악보에 실린 제사 노래)’의 가사에는
‘나 한신은 한(韓)을 뫼셔오노라’고 노래부르는 것이다.”(‘日本神話’, 1970)

한국말로 하는 초혼사





사진 2

지금도 일본 천황은 토우쿄우의 천황궁 안에서
‘신상제(新嘗祭, 니이나메사이)’를 지낸다.
해마다 11월23일 거행되는 천신 제사다.

역대 일본 천황들은 대신들과 신관을 거느리고
직접 신상제 제사를 지내왔다.

이때 어김없이 신라의 아지매(阿知女) 여신을 초혼하며,
“아지매, 오게, 오, 오, 오, 오, 오게”의 축문을
연거푸 외우는 것이다. 이 축문이 담긴 것을 통틀어 신악가(神樂歌)라고 일컫는다.

제사 첫머리에 신라신과 백제신을 모신 신전 앞에서 장작불을 피우고
‘아지매’를 초혼하는 의식인‘아지매노와자(阿知女法)’로 의식을 치르는 것을 가리켜
천황가 제사의 ‘신악(神樂, 카구라)’이라고 일컫는다.

이때 2명의 대신이 신전 좌우에 서서 엄숙하게 ‘아지매’여신의 초혼사 축문을 차례차례 외친다.

(본방) 아지매 오, 오, 오, 오.
(말방) 오게
아지매 오, 오, 오, 오.
(본방) 오게
오, 오, 오, 오,

(말방) 오
오게

이어서 신물(新物) 잡기 제사가 이어지면서
신악의 본축문인 한신(韓神)을 외우고, 악기를 연주하고, 신관이 근엄하게 춤을 춘다.

한신의 축문은 다음과 같다.

“미시마 무명 어깨에 걸치고, 나 한신도 한(韓)을 뫼셔오노라.
한(韓)을 뫼셔, 한(韓)을 뫼셔 오노라.

팔엽반을랑 손에다 쥐어잡고, 나 한신도 한을 뫼셔오노라. 한을 뫼셔, 한을 뫼셔 오노라.
(본방) 오게 아지매 오, 오, 오, 오
(말방) 오게.”

여기서 한신(韓神)은 당연히 백제신이며, 한(韓)은 한반도의 신을 뜻한다.
또 이 경우 한은 여신인 아지매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단군의 어머니인 웅녀신(熊女神)을
그 옛날 신라어(경상도 말)로 ‘아지매’로 호칭한 게 아닌가 싶다.

이는 ‘일본서기’의 스이닝(垂仁, 3세기경)천황 당시의 역사 기사에서

“신라왕자 천일창(天日槍)이 곰신단(熊神籬, 쿠마노 히모로기)을 가지고
신라로부터 일본으로 건너왔다”

고 하는 기사에서 유추해볼 수 있는데, 에도시대(1607∼1867년)의 저명한 고증학자
토우테이칸(藤貞幹, 1732∼1797년)은 곰신단에 대해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곰신단(쿠마노 히모로기)의 히모로기(ひもろぎ)는 신라어다.”(‘衝口發’)

즉 ‘히모로기’는 제사 모시는 신단이라는 신라어(경상도 말)라고 한다.
오늘날 이 말은 그 자취를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신라의 천일창 왕자가 ‘곰의 신단’을 모시고, 왜왕실로 건너왔다고 하는 것은,
당시 스이닝천황에게 단군의 어머니신인 웅녀신에 대한 제사를 모시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그 이유는 스이닝천황과 그의 부왕인 스진(崇信, 2세기경)천황이 신라인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저서 ‘일본문화사’(서문당, 1999)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스진천황은 재위 당시 신라신인 대국주신(大國主神, 大物主神으로도 부름)을
나라(奈良) 땅 미와산(三輪山)에 신당을 차리고 제사지냈던 것이 밝혀졌다.

현재도 대국주신은
나라의 미와산 오오미와신사(大神神社)에서 모시고 있다는 것을 밝혀 둔다.(사진 2 참조)

그렇다면 일본 천황가 제사 축문의 ‘한신’과 ‘한’에 대해서,
일본의 전문학자들은 어떻게 풀이하고 있을까.

우스다 징고로우(臼田甚五郞) 교수는 신악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진솔하게 지적하고 있다.

“한(韓)을 뫼셔온다는 제사 양식은 한국식(韓風)이다.

신 내리기의 신물(神物)잡기에서 연상되는 것은,
신성한 무녀(巫女, 일반적인 무당이 아니라 고대 왕실의 왕녀 등을 가리킴-필자 주)가
신(神)을 향응하는 이미지다.

이 신악가의 위치에서 고찰한다면, 신의 잔치도 신주(神酒)를 권하는 단계에 들어가면,
터주신(地主神)인 한신이 새로이 찾아오는 신인 천황(天皇) 및 천황가(天皇家)에 대해서
귀순 접대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상정된다.”(‘神樂歌’, 1992)

우스다 징고로우 교수의 지적을 부연해 설명하면 이렇다.
일본 천황가에서 모시고 있는 한신은 이미 일본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터주신이다.

이 터주신이 한반도에서 건너오는 신인 천황과 천황의 가족들을
지금의 천황가에다 기꺼이 모시는 것이 제사의 의미라는 것이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한다면,
고대일본은 한반도의 정복자들이 건너와서 한반도의 조상신에게 제사지내며 살고 있는 곳이며,
또한 한반도에 있는 천황족들의 조상신들까지 초혼해서 기꺼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스진천황과 한일동족설

일본의 고대왕실은 말할 것도 없고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천황가의 조상신 제사는
철저하게 지켜져 내려오고 있다.

고대로부터 일본왕실의 제1차 주권(主權)은 제사권(祭司權)이고, 제2차 주권은 정사권(政司權)이다.

앞에서 이미 간략하게 밝혔거니와,
스진천황은 신라신 대국주신을 제사지내게 됨으로써,
신도 국가의 기틀을 세우고 비로소 반석 같은 정사(支配)의 터전을 이루었다.

그런 견지에서, 오오사카교육대 사학과의 토리고에 켄사브로우(鳥越憲三郞) 교수가
다음처럼 주장한 것은 공감할 만하다.

“지금까지의 역사학에서 빠져 있었던 큰 문제는 씨족이나 부족의 수호신,
즉 그들이 받들어 제사지내는 신사(神社)의 제신(祭神)과 그것에 관련되는 종교 관념이다.
이는 고대사에서뿐만이 아니라, 중세사·근세사에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특히 고대에서는 그 사회를 움직이는 인자(因子)가 바로 ‘종교관념’이었다.
그 종교관념을 내버려두고 고대사회를 규명하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神神の中の古代豪族’, 1974)

이와 같은 주장을 실증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앞에서 살펴본 신도와 불교의 종교전쟁이다.
그렇다면 백제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인 2세기경 일본에 유입된 신라신도는 어떻게 종교관념으로
착근되었을까.

여기에는 신라 출신으로 왜의 지배자가 된 스진천황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스진천황에 대해 토우쿄우대 에카미 나미오(江上波夫, 1906∼) 교수는

“스진천황은 고구려계 기마민족의 후손으로 남하하여 가야지방에 살고 있던 사람으로,
일본 최초의 정복왕이다”(‘기마민족국가론’, 1948)

고 내세운 바 있다.

일본 패전 직후인 1948년 5월에 발표한 그의 주장은
소위 ‘임나일본부설’을 그 배후에 깔고 있는 학설이다.

필자는 스진천황이 고구려계 가야 출신의 일본 정복왕이 아닌,
신라 출신의 일본 정복왕으로 보고 있다.

스진천황은 신라신인 대국주신(대물주신)을 나라(柰良) 땅 미와산에 모시고
일본고대 역사상 최초로 제사권을 발동한 사제왕(司祭王)이기도 하다.

필자는 또 신라인 집단인 이즈모(出雲)족 출신의 스진천황이 처음으로 그가 다스리던 국가를
한국말로 ‘나라(奈良)’라고 하여 이두식 표기를 했던 것으로 추찰한다.

이는 필자만의 주장은 아니다.
이미 1900년에 역사지리학자인 요시다 토우고(吉田東伍, 1864∼1918년) 박사는

“나라(奈良)는 이 고장을 점거하고 지배하던 이즈모족이 ‘국가’라는 뜻으로 지은 명칭”
(‘大日本地名辭書’, 1900)

이라고 밝혔다.
그는 ‘나라’라는 한글까지 사전에다 직접 쓰면서, 한국어의 발자취를 입증한 바 있다.

또한 일본 고어학자인 마쓰오카 시즈오(松罔靜雄) 교수도
‘일본고어사전’(日本古語大辭典, 1937)에서 역시 똑같은 사실을 밝혔다.

날조된 9명의 천황들

그런데 여기서 한마디 더 짚고 넘어갈 사실이 있다.

‘일본서기’등 고대 역사책에는 초대 왕부터 제9대왕까지의 조작된 왕들을 써넣고 있고,
제10대 왕에 신라인 스진천황을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니까 무려 9명의 왕들을 날조해 놓은 것이다.

일본의 저명한 학자들에 의해서 그와 같이 허위 조작된 ‘궐사천황’들은 일찍부터 비판받아왔다.
그러나 아직도 국수적인 우익사관 신봉자들은 날조된 9명의 왕을 내세우고 있다.

일본 역사에서의 날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근래의 각종 역사교과서 왜곡뿐만이 아니라 구석기 유물마저 날조함으로써
세계적인 망신을 당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본인의 날조 역사 이면에는 한국에 대한 콤플렉스가 작용하고 있다.

일본이 한국보다 더 오랜 역사시대를 누렸다는 거짓을 꾸며내느라,
일본 역사를 한국보다 600년씩이나 위로 끌어올려 놓았던 것이며,
사실(史實)에 전혀 없는 9명의 왕들까지 날조하기에 이른 것이다.

참고로 왜왕실에 ‘천황호(天皇號)’가 등장한 것은 668년경이다.
712년에 최초의 일본 역사책 ‘고사기’가 등장할 때에 고대의 모든 왜왕의 왕호도
천황으로 일제히 통일시켜 표기한 것임도 밝혀둔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실질적으로 일본의 제1대 천황인 스진천황은 제사권과 정사권을 확립하는 한편,
일본의 선주민족을 신라의 산업문화권에 안주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즉 선진 신라의 벼농사와 농기구·칼 등을 제작하는 철기산업,
스에키(須惠器, 쇠처럼 단단한 그릇이라는 쇠그릇으로 ‘쇠기’라는 고대 신라어에서 생겨난 명칭-필자 주)라고 하여 흙을 구워서 만드는 도기산업,
베틀에 의한 직조산업 등 선진문화산업은 당시 미개한 일본 선주민들로 하여금
이즈모민족의 신도(神道)신앙에 만족스럽게 순응토록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런 흔적들은 일본 옛 문헌들에서도 곧잘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대장간’을 한자어로 ‘카라카누치(韓鍛治)’라고 하거나,
땅을 파는‘삽’을 한국 삽이라는 의미의‘카라사비(韓)’로 표현하거나
재기를 ‘카라스키(韓鋤)’로 부르는 데서 고대 한국의 문물이 건너갔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서 처음 세워진 神宮

그러나 그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통치권자가 가지고 건너간 신화(神話)와 신도(神道)라는 종교다.

일본 신도의 종주국인 신라에서 ‘신궁(神宮)’이 처음으로 섰다는 사실(史實)은
일본 사학자들도 시인하고 있다.

그리고 신사(神社)나 신궁이 일본보다 훨씬 앞서서 신라에 있었다는 것은
‘삼국사기’에도 자세히 실려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BC 57년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우고 서기 4년에 서거했다.
그의 아들 남해(南海) 차차웅(次次雄)이 왕위에 오른 지 3년째 되던 서기 6년, ‘시조묘((始祖廟)’를
세웠다. 이후 신라의 왕들은 대대로 왕위에 오르면 반드시 시조묘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제21대 왕인 소지마립간은 487년 2월에 경주 나정 땅인‘내을(奈乙)’에다‘신궁’을 세웠다.
이후 신라의 왕들은 왕위에 오르면 역시 신궁에 참배했던 것이다.

이렇게 신라의 왕들이 등극한 직후 시조묘와 신궁에 참배한 것은
제1차 주권인 제사권을 행사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로써 제2차 주권인 정사권(政事權)까지
확립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라에서 시조묘를 세움으로써 최초로 제사권을 행사한 남해 차차웅에 대해서는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라 성덕왕(702∼737년 재위) 때의 학자 김대문은

“차차웅은‘자충(慈充)’이라고도 부른다. 이것은 신라어로 무당을 가리키는 것이나,
세인이 무당은 신에게 제사를 올리므로 이를 외경하여 칭하기를 자충이라고 했다”

고 한다.

여기서 ‘자충’이나 삼한(三韓) 시대의 천군(天君), 특히 단군(檀君) 등은
통치권자로서 천신에게 제사드리는 제사장(祭司長)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하면 좋을 것 같다.

왜왕실에서 신라인 스진천황이 신라신인 대국주신(대물주신)에게 몸소 제사지낸 것 역시
신라의 자충이나 삼한의 천군처럼 제사권을 행사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산업이 발달하지 못하고 더더구나 과학적 사고방식이 등장하기 이전의 고대사회에서는
통치권자가 주술적인 방법을 동원해가며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백성들에게 행사함으로써
통치기반을 지켜나갔을 것이다.

그런 견지에서 김열규 교수의 다음과 같은 견해도 공감이 간다.

“신석기시대에는 사람이 죽어도 그 영혼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영혼불멸의 사상이 있었으며,
인간과 영혼 사이를 연결해주는 주술사로서의 무당의 존재를 인정하는 샤머니즘(Shamanism)이
널리 유행하였다.


특히 샤머니즘은 주술적인 방법으로 악귀를 물리쳐 씨족원들을 환난으로부터 구제한다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한국에서는 고조선의 단군이나, 삼한의 천군, 신라의 차차웅 등에서
주술사의 모습이 발견된다.”(‘韓國神話와 巫俗硏究’, 1977) 앞에서 우즈다 징고로우 교수가 지적한 ‘신성한 무녀’도 똑같은 맥락에서 살필 수 있다고 본다.

일본 개국신인 스사나오노미코토는 신라신

스진천황이 종교와 함께 가지고 온 신화에도 신라신의 모습이 나타난다.

일본 개국의 대표신인 ‘소잔오존(素盞烏尊, 스사나오노미코토)’과
그의 누이인 ‘천조대신(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은 신라신이다.(사진3 참조)





사진 3

그런데 일본 신도주의자들은
천조대신을 떠받드는 동시에 그녀의 남동생인 소잔오존을
‘악(惡)왕자’라고 적대적으로 표현,
이른바 ‘악신(惡神)’으로 비하시켜왔다.

사실 그 이유는 자못 단순하다.
소잔오존은 하늘신의 터전(高天原)에서
지상으로 하강할 때 그의 고국인 ‘황금의 나라’
신라땅 우두주(牛頭州)로 내려갔다는 것이
‘일본서기’에 역력하게 실려 있기 때문이다.

즉 소잔오존은 어떻게 조작할 수 없는 신라신인 것이다.
반면에 소잔오존의 친누이인 천조대신의 경우는
그냥 하늘나라에 살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에도시대 후기에 앞장서서 신도주의 존왕론(尊王論)을 만든
국수주의자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 1776∼1843년) 등에 의해서,
천조대신은 국신(國神)으로 모셔져 정상에서 떠받들게 되었고,
모국인 신라에 갔다가 이즈모 땅으로 건너온 소잔오존은 배격당하기에 이른 것이다.

히라타 아쓰타네의 국수주의적 신도사관 조작이 얼마나 황당무계하고
터무니없는 짓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일본의 권위 있는 인명사전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그는 고증학적인 요소를 내버리고 신도적 요소를 발전시켜,
복고주의와 국수적·배외적(排外的) 입장에서 유교와 불교까지도 배격했다.

또한 국학사상을 중심으로 장대한 사상체계를 수립하기 위해서,
천지시원(天地始原)으로부터 현세와 내세에까지 고사(古史)와 고전(古傳)에다
새로운 해석을 첨가시키고 기독교며 심령술, 신선술까지도 이용했다.
그 때문에 그의 사상체계는 도리어 비합리적이며 신앙적으로 조작되었다.”(앞 ‘인명사전’)

히라타 아쓰타네 같은 국수주의자들의 장난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권위 있는 사학자들에 의해 신라신인 소잔오존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았다. 일본 최초로 과학적 역사학의 태두로 존경받던 토우쿄우대 사학과의 쿠메 쿠니타케(久米邦武, 1839∼1931년) 교수는 1907년에 쓴 ‘일본고대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소잔오존은 신라국의 군주로 관련지어서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으로서 숭배했다.…

소잔오존은 처음에 신라에 계셨고,
그곳은 우두주(牛頭州)인 소시머리((ソシモリ, 曾尸茂梨)로서 강원도 춘천부이다.…
소잔오존을 뒷날에 부르기를 우두천황(牛頭天王) 또는 신라명신(新羅明神)으로서 …

지금도 쿄우토(京都) 굴지의 사당인 야사카신사(八坂神社)에 모시며 끊임없이
사람들의 존숭을 받고 있다.”(‘日本古代史’, 1907)

소잔오존(스사노오노미코토)이 신라신이며
일본의 이즈모(出雲) 땅으로 건너가 일본 개국신으로서 눈부신 활동을 했다는 내용은
이 책의 제6장 제22절부터 25절까지 상세히 다루고 있다.

또한 흥미진진한 한일동족론도 이 책에 담겨 있으나, 지면 관계상 생략하기로 한다.

한편으로 쿠메 쿠니타케 교수는
‘일본고대사’라는 책을 쓰기 전인 1891년에 ‘신도는 제천의 고속(神道は祭天の古俗)’이라는
장편 논문을 발표하여 학계는 물론이고 세인의 찬사를 받은 바 있다.

이 논문은 신라신인 소잔오존이 이즈모 땅에서 행한 족적, 한일 동족론에 대한 규명,
그리고 일본천황들이 제사지내는 신은 ‘천조대신’이 아니라 고구려의 동맹(東盟)의 신을 비롯해
부여의 영고(迎鼓)의 신, 예의 무천(舞天)의 신 등 고조선의 천신들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지적한 것이었다.

이 논문이 발표된 뒤 쿠메 쿠니타케 교수는
자택에서 국수주의자들로부터 기습 테러를 당하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일본 신도의 뿌리가 고조선과 신라의 신도에 있다는 사실은,
당시까지 국수적 신도주의자들에 의해서 철저하게 숨겨져온 것이었다.

국수적 신도사관에 의해 ‘대일본제국’의 천황국가론에 일대 타격이 된 이 사건 이후
본격적으로 학문의 자유는 유린당하기 시작했다.

그 필화사건 때문에 쿠메 쿠니타케 씨는 토우쿄우대 교수직에서 추방당하는 등 불행을 겪었지만,
16년이 지난 후에는 일본 역사의 명저로 꼽히는‘일본고대사’와‘나라사’를 동시에 써냄으로써
자신의 소신을 꺾지 않았다.

소잔오존이 신라신이라는 사실은 그 이후에도 현대 일본의 여러 학자들이 시인하고 있으며,
오늘날 나카가와 토모요시(中川友義) 교수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야사카신사의 기온마쓰리





사진 4

일본 신도의 주체인 신라신 소잔오존을
제신(祭神)으로 받드는 대표적 신사가
쿄우토의 야사카신사(八坂神社)다.

야사카신사는 해마다 7월17일부터 24일까지
‘기온마쓰리’를 거행해
소잔오존의 ‘신령’을 위령한다.

일본에서‘마쓰리’라는 제사 축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 스사노오노미코토(소잔오존)에게 제사드리는 축제다.

야사카신사의 제사 축제 때 소잔오존의 신령을 모신 큰 수레들이
자그마치 20대나 기나긴 행렬을 이루며 쿄우토 번화가를 행진한다.

신령의 수레(야마 14대, 호코 6대)가 행진하는데,
이때 수레꾼들이 “왔쇼이, 왔쇼이!” 하고 우렁찬 구령을 외쳐댄다.

소잔오존이 왜나라에 건너오셨다는 뜻으로 경상도 말 “왔서에”의 구음변화가 바로 “왔쇼이”다.
이 점에 대해 일본 학자의 견해를 들어보자.

“마쓰리에서는 으레 수레꾼들이 ‘왔쇼이, 왔쇼이!’하는 구령을 지르게 마련이다.
오늘날 이것은 전국적인 구령이 되었다.
이것은 고대 조선어로서‘오셨다’는 의미라고 한다.”(重金碩之, ‘風習事典’, 1982)

아무튼 일본에서는 소잔오존에게 제사드리는 쿄우토의 ‘야사카신사’가 그 총본사이며,
그 밑으로 전국 각지에 2000 곳이 넘는 ‘야사카신사’들이 산재하고 있다.

말하자면 일본신도에서는, 전국 각 고장의 야사카신사에서
신라신 소잔오존을 일본 제1의 개국신으로 떠받들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사진4 참조)

소잔오존이 신라에서 처음 건너왔던‘이즈모’땅에는 소잔오존과 그의 처‘쿠시이나다히매’를
함께 제사지내는 옛 신사 ‘야에가키신사(마쓰에 시)’가 있다는 것도 밝혀둔다.

또 소잔오존을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으로 받들어오는 대표적인 신사는
오우미(近江)의 유명한‘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이다.(사진5 참조)

이 지역 역시 고대 신라인들의 옛터전으로서, 신라 고분(핫케쓰 고분군)이 있으며,
수많은 스에키(신라 도기)며 각종 유물들이 출토된 바 있다.

이외에 신라신사(新羅神社)라는 명칭의 신사들도 아직 일본 각지에 존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이마죠우의 신라신사, 다지미의 신라신사, 히매지의 신라신사 등이 유명하다.

신라명신을 제사드리는 신라신사를 감추기 위해
신국(辛國, 카라쿠니)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단 ‘신국신사’도 전국 각지에 허다하다.

그런가 하면 이두식으로 ‘신라’를 가리키는 ‘시라기(白木)’의 신라신사 등
일본의 군국주의체제에서 명칭이 바뀐 곳들도 여러 곳에 있다.

신라 천일창(天日槍) 왕자를 제신으로 모신 신사들도 전국 도처에 허다하며,
또한 신라인 진씨(秦氏)가문이 신라 농신(農神)에게 제사드리는 큰 규모의 신사들이
쿄우토의 대표적인 신사들이라는 것도 밝히고 싶다.

이를테면 오늘의 일본 쿄우토의 대표적인 신사들인 후시미(伏見)의 이나리대사(稻荷大社)를 비롯해
마쓰오대사(松尼大社), 카미카모신사(上駕茂神社), 시모카모신사(下駕茂神社) 등
대규모의 신사들이 신라인의 고대 신사라는 사실이다.

농작물에 나타나는 신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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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

どうして日本では新羅を徹底的に憎んで排他の時して来ただろうか?
が大きい疑点のため筆者は長年の歳月日本の中の新羅研究に集中して来た.
日本王室が 9世紀草葉から歴史文書に大っぴらに新羅を敵視して来た理由は果してどこにあるか?

結論的にそのミステリーは日本の国家宗教になった ‘日本信徒(日本 神道)’の根が
外でない古代新羅の信徒(神道)だったという事実を日本王室が隠そうとばたついたのにある.
筆者はその歴史の内幕を日本古代文献などを通じて一つ一つ考証分析した.

新羅を敵視した日本王室文書

古代日本が新羅を排撃して敵視した事実は日本王室文書にその証拠が現われている.
天皇加衣法令柱石書である 30冊の ‘ヤングジブして(令集解)’には次のような内容が見える.

“‘肉(古記)’に伝えるところによると, 日本天皇の打とう時に調書を下げて問うのを
‘隣国’と ‘有り難くない国’はどうして区別するか.
返事するのを ‘隣国は大きい唐であり, 有り難くない国は新ライだな.”(第3冊)

が文書で引用した本 ‘肉’は西紀 738年に被せられた歴史記録を示す.
だから文書記録上 ‘ヤングジブして’(859〜876年成立)が作成された 9世紀ではない
もう 8世紀初から日本は新羅を排撃して来たのだ.
これに対して著名な史学者オオとイワオ(大和岩雄, 1928〜)さんはこんなに指摘する.

“韓半島から渡って来た到来人たちを ‘帰化人’と記録している古代歴史書
‘日本書紀’(720年編纂)でも 3国(新羅・百済・高句麗)を明らかに区別している.
3国を文化の 先進お吸物だと認めているがただ百済からの文物到来のみを強調して,
有り難くない国(以下‘蕃国’と称する)で扱ったことは主に新羅だった.

新羅を藩国にしたことは,
統一新羅(668年百済と高句麗を皆征腹した時期以後)になる以前から
新羅を敵国で見做したからだ.

統一新羅時代以後からは新羅が韓半島の大部分を支配したので,
新羅と朝鮮と藩国を一体化する解釈もできたが,
‘日本書紀’が被せられた頃の ‘有り難くない国(藩国)は新ライだな’は
多分に新羅を敵国で思う観点で生じたのだ.”(‘新羅蕃国視に対して’, 1978)

易しく言ってオオとこれと奥義見解は,
百済人系列の日本王室が新羅を憎んだことは新羅が 660年に百済を滅亡させたところだけで
起因するのではなくもうその以前の時代からだったということだ.

私たちの ‘三国史記’にも出るように新羅・百済・高句麗がお互いに敵視して
戦争をしたから百済人系列の日本王室が新羅をきれいに見た里はずがない.

ところで百済人系列の日本王室で
本国百済の滅亡以前から新羅を敵視したもう一つの理由もある.

その歴史的背景は 538年百済盛旺が百済人系列の倭王である
キンメイ(欽明, 538〜571年在位)天皇に百済仏教を電波させた仕事で捜してみる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

百済仏教が入って行く以前までの日本地では
新羅の信徒(神道)が倭王室を中心に国家宗教として確固な根付いていた.

そのような状況で急に日本王室に百済仏教が伝えることで,
新羅信徒と百済仏教はお互いに衝突を避けることができなくなった.
とうとう信徒と仏教の宗教戦争(587年)で飛話されてしまう事態まで発生したのだ.

新羅信徒と百済仏教の宗教戦争

ここで読者たちの理解を助けるために当時百済系列の倭王キンメイチォンファングと
彼の息子ビタス(敏逹, 572〜585年在位)天皇が百済人という事実を手短に考証しておく.

すなわちキンメイチォンファングの親子である “ビタスチォンファングは百済王族だ”という歴史記録が
日本王室系図である ‘シンチァンソングシロック’(815年編纂)に被せられている.

その上にビタスチォンファングは倭王室で最初で
‘バックゼグング(百済宮)’を作ったという事実が ‘日本書紀’と ‘ブサングリャックギ’など歴史書に載せられている.
当時百済王宮を建てた場所は奈良(奈良)の ‘百済五寸釘(百済大井)’と言う(のは)所だ.

とにかくキンメイチォンファング初期に百済盛旺(523〜554年在位)が仏経と仏像などを送って
百済人倭王室でも仏教を信じなさいと勧めた.

この時最高代わりに小家僕イナメ(蘇我稲目, 505〜570年)が
百済盛旺が送った仏像をキンメイチォンファングから受け継いで自分の邸宅に仕えた.

百済人だった小家僕イナメ代わりは自宅を仏堂に改築して
‘コウゲンジ(向原寺)’と名付けて百済仏教布教に先に立った.

仏像を初めに見た人々はこの新しい宗教に大きい関心を持つようになった.

信徒では祠堂(ジェントルマン)に神さまの位牌などがあるだけなの
仏像のように目に見える実体はなかったのだ.
すなわち今までの信徒信仰で仏教で信仰対象を変える風が吹き始めたのだ.

ここに大きく荒てたことはモノ−ノ−ベノ−お菓子(物部尾輿, 496〜570年) 対連だった.
当時倭王室朝廷は ‘代わり’びりっと次の第2人者職位が ‘対連’職だったし,
対連は軍事と警察, 治安圏を管掌していた.

がモノ−ノ−ベノ−家門は百済から仏教が入って来る前までは
調整で信徒を掌握して天皇を補助したグックシンパ(国神派)のリーダーでもあった.

それで彼は百済仏教が入って来ると不満を抱いてすぐキンメイチォンファングに仏教を排斥する内容の
常住をしながら, グックシン(国神)が仏教に対して震怒すると警告したのだ.

“我が国の天下の王は, いつも天地辞職の 180はく春夏秋冬にかけて祭祀させていただくことが
そのイルイオブニだ. もう初めてウェグックシン(部処-筆者註)を礼拜するというのは当然グックシンの
震怒を買う事です.”(‘日本書紀’)

このように常在するとキンメイチォンファングはこんなに言った.

“それなら望む人であるイナメ代わりに仏像を任せて試験して礼拜させるようにしなさい.”

こんなわけに小家僕イナメ代わりが仏像を自宅で持って行って
コウゲンジという査察を用意したのだ.

ところで仏教に積極的に反対して出たモノ−ノ−ベノ−お菓子が
新羅係神さま(饒速日命)の子孫というのが ‘シンチァンソングシロック’に明かされている.
ここによればモノ−ノ−ベノ−お菓子のお爺さんであるモノ−ノ−ベノ−担いで(物部目)が新ラシンの
12代孫で出ているので, モノ−ノ−ベノ−お菓子は新ラシンの 14代孫であることだ.

こういうわけでよく見ても百済仏教が日本に渡って来る前までは
百済人倭王室でも新羅信徒を奉じて春夏秋冬で天地辞職 180神さまに対する祭祀を
王室で行ったということが分かる.

またこんな状況でも百済仏教が押して入って来たということは
当時本国百済が百済係倭王室に対して力強い影響力を持っていたことを示唆する.

日本歴史では信徒と仏教が衝突するようになった事件を
言ったところ‘崇仏論争(崇仏論争)’と呼ぶ.

が崇仏論争は決して口げんかで終わらなかった.
結局大きい宗教戦争にまで拡がったのだ.

ここでは以後起った宗教戦争内容を手短によく見て移る事にする.
新羅係グックシンパであるモノ−ノ−ベノ−お菓子の息子モノ−ノ−ベノ−森なの(物部守屋, 515〜587年) 対連と
百済係崇仏派である小家僕イナメの息子小家僕牛馬して(蘇我馬子, 550〜626年) 代わりは
お父さん台の仏画を受け継いで結局無惨な血闘をするようになる.

モノ−ノ−ベノ−森は対連が
コウゲンジ査察を火を放って仏像を破壊するフェブルサゴンを起こしたのが 570年の事.

それだけではなく 585年には小家僕牛馬して対連がやっぱり自分の家に建てた仏教査察である
石川情事(石川精舍)を, モノ−ノ−ベノ−森は対連が再び火を放ってしまった.

こんなに続けざまにフェブルサゴンが起こると 587年小家僕牛馬して代わりは王室実権派として官軍を編成して
新羅信徒派であるモノ−ノ−ベノ−森は対連の反抗君と戦争を起こす.
が戦争でモノ−ノ−ベノ−森は対連は戦死してしまう.

以後崇仏派である小家僕牛馬して代わりは倭王室で百済仏教を中興させるのに至る.
もちろん仏教中興過程でやがて新羅仏教と高句麗仏教も渡って来て倭王室に参加するようになる.

も仏教が盛んだからといって信徒が決して影をひそめたことではなかった.
‘シンブルスブハブ(神仏習合)’と言って日本王室では信徒と仏教がお互いに睦まじく手を取り合って
一体感の中に盛んになって行く日本的な特性も見えるのだ.

すなわちジェントルマンと査察が協動しながら共存する特性を見せるようになったのだ.

日本は朝鮮の分局(分国)

とにかく 538年以前の倭王室で仏教の足跡は全然捜してみ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し,
当時までは百済人倭王室でも信徒を尊重して来た.

厳密に指摘したら, この信徒は古朝鮮の檀君崇拜など天神(天神)信仰がその源流だったと見る.
旧態で ‘新ラシンも’と明らかな区別をしたのではない.

集約的に表現しようとすると檀君子孫である古朝鮮の信徒が
日本の彌生時代(BC 3年〜AD 3年)に日本列島で伝えたのだ.

すなわち稲作から鍛冶屋の鉄器生産, 金属工芸, 機の織造などに至るまで古代韓国のありったけ
産業文化が日本に流入されながら自然に私たちの天神信仰である信徒も日本に染みこむようになった.

私たち古代文化が日本文化の源流という事実は
今まで日本の著名な学者たちが真率に自認めて来た.

言わばカキュシュウインデの呉大野スズム(大野 晋, 1919〜) 教授は韓半島から渡って来た人々が

“倭人に金属使い方を教えて, 冶金・金工技術を伝えたし,
染め付け・皮革製造・機織造・瓦製造・医学・暦法・天文学・造仏(造仏)・お寺建築・ゾタブなど
すべてのものを教えた”(‘日本語の 世界’, 1980)

と明らかにした.

空信義子孫たちが地上に下ったという,
日本の天孫降臨神話も朝鮮の建国神話で由来したと言う.

“日本の天孫降臨神話が朝鮮各国の建国神話と著しく類似のことを見せている.…
朝鮮半島南側で稲作をして, その所で金属器を作って生活していた種族が
天孫降臨神話と金属器などを日本に持って来たと思う.”(前の本)

当時農耕を含めたあらゆる産業文化を持って渡った韓半島人々が,
未開な日本の領土に定着しながらその先住民たちを支配するようになったことはあまりにも当たり前で自然な事だ.

それで日本の多くの権威ある史学者たちは
日本天皇家家韓半島から渡って来た人々だと明らかにしている.
松本セイチョウ(松本清張)さんが‘韓日同族説’を非常に説得力あるように明らかにしたことはかなり有名だ.

“一体日本人の原住民はどこから来たのかわからない.
当然インドネシア人が多いと思うのに, たとえばこれら原住民を ‘彌生である’と梔子.
その原住民たちが住んでいた所に, 朝鮮から渡って来た民族がいた.

これがいわゆる朝鮮の ‘出雲(出雲)’ 民族だ.
が出雲民族が第1次到来民族として彌生時代電気卿からかなり多い数渡って来て暮していた.
後を引き継いで朝鮮で天孫族(天孫族), 騎馬(騎馬)民族とも言う人々が続いて渡って来た.…
だから皆思っていることのように私たちが朝鮮文化を吸収したのではなく,
本来お互いにまったく同じな民族だと思う.


また一つ極言(極言)したら, 日本は朝鮮から割れて出た朝鮮の分局(分国)だ.
行なのか不幸なのか対馬(対馬島)海峡があって, 朝鮮が動乱を経験する時(新羅・百済・高句麗など
3国の戦争時期-筆者註) 日本は独立してより一層日本的になって行った.
日本的というのは船主民族の風習を汲み出してそこに融合させたと思う.
アメリカがイギリスから独立したこととも同じだ.”(‘東京新聞’, 1972年 4月1日付け朝刊)

松本セイチョウが指摘した ‘出雲’ 民族は ‘新羅’族を示すことであり,
天孫族は檀君神話を含めて高句麗神話, 新羅神話, 伽揶神話などを持った
我が民族全体をひっくるめて示す.

も騎馬民族の場合も付与, 高句麗, 百済, 新羅など
古代満洲地で住んで行って韓半島で移住した我が民族全体を称えることでもある.

また著名な考古学者未加美スグオ(三上次男)の研究を引用して, 土偶今日台史学との
Inoueミスサタ(井上光貞) 教授は騎馬民族の日本征服を次のように指摘している.

“未加美さんによれば付与や高句麗, 百済などの支配者は狩猟民族的な騎馬民族だ.
それだけではなく日本国家を成立させた主体の大部分もそのような性質の民族が成したことだと
見ても蹉跌がないだろう.

彌生時代に造成されたブックキュウシュウの ‘ドルメン’は
まったく同じな時期の南韓でも行われた墓祭り(墓制)なのに, これは南韓で只今発生した階級社会の
支配者がブックキュウシュウに移動したということを言ってくれるかも知れない.

したがって騎馬民族がキュウシュウで攻め寄せた可能性は
B.C. 2世紀頃の仕事なら変なことがない.”(‘日本国家の起源, 1967)

慶尚道の言葉で祭祀を行うチォンファングが

とにかく仏教が伝える以前古代倭王室で新羅信徒祭祀を守って来たということは
歴史記録でもよく見られる.

6世紀頃の古代歴史記録である ‘駆使期(旧事記)’の ‘天孫本紀(天孫本紀)’には
新羅信徒祭祀を担当して来たモノ−ノ−ベノ−(物部) 家門に対する詳細な系譜が明かされている.

ところでこの祭祀の時はノルラブダゴでもするか, いや当たり前だと言おうか ?
慶尚道言葉の‘新羅語’で神降ろし(降神)の祝文を覚える.

だと祝文の中でずっと繰り返される慶尚道言葉は次のようだ. 原文はもちろん漢字語なのに,
‘おばさん女神(女神)’が新羅からチォンファングが祭祀席へ来なさいと呼ぶ初婚(招魂)だ.

おばさん来るように, オオ, オオ, オオ, オオ, 来るように
阿知女 於介, 於, 於, 於, 於, 於介

日本語にこの祝文の漢字語たちを読む時には慶尚道ではなくそのまま現われる.
が祝文の漢字表記は‘この二つ(郷札)’食人のだ.
これを日本では‘マンヨウカや’式だと呼ぶ.

上の吏読式祝文を我が国の言葉で読んだら
‘アジニョ魚介, うん, うん, うん, うん, 魚介’で全然意味を把握することができない話になる.

こんなに天皇加衣祝文が慶尚道の言葉で読ませるということは言うまでもなく天皇加衣信徒根が
慶尚道言葉を使う新羅信徒と触れ合っていることをよく見せてくれる書き入れ時だとする.

ところで祝文に出る ‘おばさん(阿知女)’と言う(のは)何の意味か?
慶尚道方言で‘おばさん’という言葉なのに今も慶尚道人々はおばさんをおばさんと表現する.

今日奥さんに対する尊称語である‘おばさん(おばさん)’は
古代新羅で身分が貴い女性, 神聖な女性, すなわち ‘女神’を尊称した代名詞だったと見る.

それを裏付けるに値するまた一つの証拠がある.
日本古代史では ‘女神’や貴族出身の若い女性を示す末路
‘五味や(をみな)’という女性代名詞が使われた.

日本古代神話で太初のゲグックシン(開国神)である ‘イザナギノ−ミコト’が最初の娘女神
‘イザナミ乃美Goto’に ‘女’という言葉を使う時 ‘五味や’と呼んだのがその最初だ.
が ‘五味や’は本来我が国の古語である‘母や’から出た言葉だ.

古代韓国では‘女’を‘母や’と歌った.
その跡は咸境道や江原道, 慶尚道など東海圏脂肪でまだ通用する
‘母や’という言葉でもよくよく見られる.

日本では今日一般名詞として ‘オンナ(おんな, 女)’という言葉を使っている.
まさにこれ ‘オンナ’の語源が貴族女性を称する ‘五味や’というのは
早くから著名な日本語学者たちも指摘していた.

“五味や(をみな, 女)はオンナ(おんな)でまた枚(め)とも呼ぶ.
女神(女神)を ‘オミナがミ(をみながみ)’でも歌う.”(金沢庄三郎, ‘広辞林’, 1925)

慶尚道方言ではまた ‘お母さん’を ‘オメ’と言うのに,
ここで枚(女)は ‘おばさん’の辛くて通じる.

もこの枚で又の日語尾某(母) 者を成す‘某’の発音も出たと思う.

新ラシン(園神)とバックゼシン(韓神)





写真 1

現在の日本チォンファングがでも
新ラシンである ‘ソノ加美(園神)’と
百済新人 ‘カラカミ(韓神)’の祭祀を仕えている.

もちろん日本チォンファングが内部事項は一切の公開されていなくて
日本の専門学者たちも近来にはチォンファングが祭祀に関して
全然言及していない.


しかし明らかな事実は古代から日本の天皇たちが王宮で祭祀の面倒を見た最高の神さまは
新ラシンであるワンシン(園神, そのかみ)と百済新人韓信(韓神, からかみ)だったという点だ.
その事実は日本古代チォンファングが文書に詳細に明かされている.

‘エングギシキ(延喜式, 延喜式)’というこのチォンファングが文書は
西紀 905年多異高天皇(897〜930年在位)の人に従って執筆が始まった以後 927年に完成された.
えんえん 23年にわたって完成されたこの文書は日本天皇加衣すべての王室制度と規範が 50冊分量に編纂された
重要な歴史記録だ.

王命によってこれを作成した主体はフジワラノ−トキヒだと(871〜909年) 大臣と
彼の弟フジワラノ−タダヒだと(880〜949年) 代わりに兄弟だ.

王室貴族家門の二人の兄弟は天皇の最側近として,
左代わりと台鼎代わりなど最高長官職にあった百済係人物たちだ.

が ‘延喜式’の第1冊神妙(神祇)便には書き始めにチォンファンググングで仕える祠堂の 3神さまが出る.
一番前には新ラシンをまつった ‘ウォンジェントルマン(園神社, ソノ加美老爺の時で)’が出て
二番目で ‘韓信社(韓神社, カラカミノ−ヤシで)’が登場する.(写真 1参照)

もこの記録にイッデオでよく見れば, 天皇たちが連れられた王室の神さまは皆 285神さまに至る.
その戍にも一番の前に新羅係ジェントルマンであるウォンジェントルマンで仕える一人の神さまが出て,
引き継いで百済係ジェントルマンである韓信社で仕えるお二人様の神さまが登場する.

その次に新羅係の多くの神々を仕えたジェントルマンが並ぶ.
‘加茂ジェントルマン(賀茂神社)’ ‘マスオデサ(松尾大社)’ ‘稲荷せりふ(稲荷大社)’ などがそれだ.
次ではバックゼシン君の方を仕えた ‘Hiranoジェントルマン(平野神社)’ なども登場する.

これは ‘延喜式’ 編纂当時天皇たちが百済系列の王たちだったにもかかわらず
新ラシンたちを仕えたジェントルマンとバックゼシンドルを仕えたジェントルマンたちの序列に差があることを見せてくれる.

これはまたチォンファングが神話(神話)の神々が大部分新ラシンだったし,
日本古代史(古事記,日本書紀)に登場する神々も新ラシンが主導的だったという点と関係が深い.

ところで日本の神通補は
新ラシンと百済信義系譜を一氏神のフソンシンで表現している点がおもしろい.

712年日本歴史上最初に編纂された ‘古事記(古事記)’の一書き入れ時を紹介する.

“デニョンシン(大年神)が新活水碑身の娘であるイノ−ビメと婚姻して生んだ子は対局語渾身(大国御魂神),
次は韓信(韓神), 次はズングブリシン(曽富理神), 次は百一身(白日神), 次は星辰(聖神)だ.”

‘デニョンシン’と言う(のは)新ラシンである ‘消残・鎖残オゾン(素盞烏尊, スサノ−オノ−ミコト)’のアドルシンだ.
がデニョンシンから生まれた五つ息子神々は当然新羅係だろうが, 第2自認韓信(韓神)だけは
バックゼシンだ. どうして新ラシンの子たちの中にバックゼシンが入っているかはこれからの研究課題だ.

ただここで一つ指摘しておくことがある.
日本最初の歴史書 ‘古事記’を書いたアンマンリョ(安万侶, ヤスマで, 723年死亡)は
調整で内務長官格である ‘閔府警’として, 百済系列の祖神だった.

とにかく韓信は日本チォンファングが祭祀に新ラシンと一緒に仕えるバックゼシンイだが,
‘ズングブリシン’は新ラシンワンシン(園神)を示すもう一つの表現だ.
‘ズングブリシン’は日本語で ‘SOHO里’の神さま, すなわち ‘ソウル’の神さまだ.

ズングブリシンとも呼ばれるワンシンが新ラシンというのは日本の権威ある史学者たちの通説であり,
今日土台UedaMasaaki(上田正昭, 1927〜) 教授は次のように論述した.

“歴史書 ‘古事記’にはデニョンシンとイノ−ビメの間で生まれた 5神々の中で,
韓信とズングブリシンなど朝鮮の神々が登場している.

ズングブリシンというのは小市頭(ソシモリ, 牛頭)と連関がある,
新羅(新羅) 軟膏を持った神さまの名前と思っても良い.

韓信(韓神)はワンシン(園神)と並んで調整の王宮の中にまつった神さまに尊崇されているし,
宮廷の猿魂祭前夜に祭祀させていただいて, その所で ‘カグだと(神楽)’も演奏するようになる.

それで 9世紀中葉にはもう存在していた
‘カグラウタ(神楽歌, チォンファングが祭祀意識の時祝文楽譜に載せられた祭祀歌)’の歌詞には
‘私韓信はたいてい(韓)をムェショオノ−だと’と歌うのだ.”(‘日本神話’, 1970)

韓国語にする初婚社





写真 2

今も日本天皇は土偶今日のチォンファンググング中で
‘身の上制(新嘗祭, ニイナメサイ)’を執り行なう.
毎年 11月23日挙行される天神祭祀だ.

歴代日本天皇たちは大臣たちと新館を従えて
直接身の上制祭祀を執り行なった.

この時間違いなく新羅のおばさん(阿知女) 女神を初婚して,
“おばさん, 来るように, オオ, オオ, オオ, オオ, 来るように”の祝文を
続けざまに覚えるのだ. この祝文が盛られたことを合わせて新楽歌(神楽歌)と称える.

祭祀書き起こしに新ラシンとバックゼシンをまつった神殿の前で薪の火を立てて
‘おばさん’を初婚する意識である‘おばさん露臥者(阿知女法)’で意識を支払うことを示して
チォンファングが祭祀の ‘シンアック(神楽, カグだと)’と称える.

この時 2人の大臣が神殿左右に立って厳肅に ‘おばさん’女神の初婚社祝文を順次叫ぶ.

(本邦) おばさんオオ, オオ, オオ, 五.
(マルバング) 来るように
おばさんオオ, オオ, オオ, 五.
(本邦) 来るように
オオ, オオ, オオ, オオ,

(マルバング) 五
来るように

なので信物(新物) 雑記祭祀がつながりながら
新悪意本祝文である韓信(韓神)を覚えて, 楽器を演奏して, 新館が謹厳にダンスをする.

韓信の祝文は次のようだ.

“押すよ無名肩にかけて, 私韓信もたいてい(韓)をムェショオノ−だと.
たいてい(韓)をムェショ, たいてい(韓)をムェショ来る.

パルヨブバンウルと手にズィオザブゴ, 私韓信も限りをムェショオノ−だと. 限りをムェショ, 限りをムェショ来る.
(本邦) 来るようにおばさんオオ, オオ, オオ, 五
(マルバング) 来るように.”

ここで韓信(韓神)は当然バックゼシンであり, たいてい(韓)は韓半島のはく志す.
またこの場合韓銀女神であるおばさんを示したりするのに, 檀君のお母さんであるウングニョシン(熊女神)を
その昔の新羅語(慶尚道言葉)で ‘おばさん’で称したのではないかと思う.

おこる ‘日本書紀’のスイニング(垂仁, 3世紀頃)天皇当時の歴史記事で

“新羅王子チォンイルチァング(天日槍)がゴムシンダン(熊神籬, クマノ−ヒモロギ)を持って
新羅から日本に渡って来た”

と言う記事で類推して見られるのに, 江戸時代(1607〜1867年)の著名な考証学者
トウテイカン(藤貞幹, 1732〜1797年)はゴムシンダンに対してこんなに指摘している.

“ゴムシンダン(クマノ−ヒモロギ)のヒモロギ(ひもろぎ)は新羅語だ.”(‘衝口発’)

すなわち ‘ヒモロギ’は祭祀仕える神棚という新羅語(慶尚道言葉)と言う.
今日この言葉はその名残が分かるあてがない.

しかし新羅のチォンイルチァング王子が ‘熊の神棚’を仕えて, 倭王室に渡って来たと言うことは,
当時スイニングチォンファングに檀君のお母さん新人ウングニョシンに対する祭祀の面倒を見るようにするためだったと見る.

その理由はスイニングチォンファングと彼の父王であるスジン(崇信, 2世紀頃)天皇が新羅人だったからだ.
これに対しては筆者の著書 ‘日本文化史’(序文当たり, 1999)に詳しく記録されている.

スジンチォンファングは在位当時新ラシンである対局与えた(大国主神, 大物主神でも呼びかけ)を
奈良(奈良) 地三輪山(三輪山)に新党を調えて祭祀を行ったことが明かされた.

現在も対局主神は
国の三輪山オオミワシンサ(大神神社)で仕えているということを明らかにしておく.(写真 2 参照)

それなら日本チォンファングが祭祀祝文の ‘韓信’と ‘たいてい’に対して,
日本の専門学者たちはどんなに解いているか.

有珠だジングゴロウ(臼田甚五郎) 教授は新楽歌に関して次のように真率に指摘している.

“たいてい(韓)をムェショオンダは祭祀様式は韓国式(韓風)だ.

神さまネリギの信物(神物)雑記で連想することは,
神聖な巫女(巫女, 一般的な巫子ではなく古代王室の王女などを示し-筆者註)が
神さま(神)を饗応するイメージだ.

が新楽歌の位置で考察したら, 信義宴も子株(神酒)を勧める段階に入れば,
出てくださった(地主神)である韓信が新たに尋ねて来る新人天皇(天皇) 及びチォンファングが(天皇家)に対して
帰順応待することを見せてくれていると上程される.”(‘神楽歌’, 1992)

有珠だジングゴロウ教授の指摘を付衍して説明すればこのようだ.
日本チォンファングがで仕えている韓信はもう日本で腰を据えているトズシンだ.

がトズシンが韓半島から渡って来る新人天皇と天皇の家族たちを
今のチォンファングがに喜んで仕えるのが祭祀の意味というのだ.

もうちょっと露骨的に言ったら,
古代日本は韓半島の征服者たちが渡って来て韓半島の氏神に祭祀を行いながら暮している所であり,
も韓半島にある天皇族たちの氏神たちまで初婚して喜んで祭祀を執り行なっているというのだ.

スジンチォンファングと韓日同族説

日本の古代王室は言うまでもなくて現代にイルギまでも天皇加衣氏神祭祀は
徹底的に守られて下っている.

古代から日本王室の第1次株券(主権)は祭祀圏(祭司権)で, 第2次株券は情事圏(政司権)だ.

前でもう手短に明らかにするけれども,
スジンチォンファングは新ラシン対局主神を祭祀を行うようになることで,
信徒国家の基礎を立てて初めて盤石みたいな情事(支配)の基盤を成した.

そんな見地で, 大阪教育大史学との土埋高にケンサブロウ(鳥越憲三郎) 教授が
次のように主張したことは共感するに値する.

“今までの史学で抜けていた大きい問題は氏族や不足の守護神,
すなわち彼らが奉じて祭祀を行う神社(神社)のゼシン(祭神)とそれに係わる宗教観念だ.
これはゴデサエソだけではなく, 中世史・近世社でもまったく同じく言える.

特に古代ではその社会を動かす因子(因子)がすぐ ‘宗教観念’だった.
その宗教観念をほったらかしておいて古代社会を糾明しようとすることは絶対に不可能だと言っても
過言ではない.”(‘神神の中の古代豪族’, 1974)

このような主張を実証する代表的な事例が前でよく見た信徒と仏教の宗教戦争だ.
それなら百済仏教が入って来る以前である 2世紀頃日本に流入された新羅信徒はどんなに宗教観念で
着根されただろうか.

ここには新羅出身でなぜの支配者になったスジンチォンファングの活躍を漏らすことができない.
がスジンチォンファングに対して土偶今日台エカミナミオ(江上波夫, 1906〜) 教授は

“スジンチォンファングは高句麗係騎馬民族の子孫に南下して伽揶地方に住んでいた人で,
日本最初の征服王だ”(‘騎馬民族国家では’, 1948)

と立てた事がある.

日本敗戦直後の 1948年 5月に発表した彼の主張は
いわゆる ‘任那日本府説’をその背後に敷いている学説だ.

筆者はスジンチォンファングが高句麗係伽揶出身の日本征服王ではない,
新羅出身の日本征服王で見ている.

スジンチォンファングは新ラシンである対局与えた(対物与えた)を国(〓良) 地三輪山に仕えて
日本古代歴史上最初で祭祀圏を発動した師弟王(司祭王)でもある.

筆者はまた新羅である集団である出雲(出雲)族出身のスジンチォンファングが初めて彼が治めた国家を
韓国語で ‘奈良(奈良)’と言って吏読式表記をしたことにお察しする.

これは筆者ばかりの主張ではない.
もう 1900年に歴史地理学者であるYoshida土偶で(吉田東伍, 1864〜1918年) 博士は

“奈良(奈良)はこの地元を占拠して支配した出雲族が ‘国家’という意味で至恩名称”
(‘大日本地名辞書’, 1900)

と明らかにした.
彼は ‘国’というハングルまで辞書に直接書きながら, 韓国語の足跡を立証した事がある.

も日本古語学者であるマスオカシズオ(松罔静雄) 教授も
‘日本古語辞書’(日本古語大辞典, 1937)でやっぱりまったく同じな事実を明らかにした.

捏造された 9人の天皇たち

ところでここで一言もっと指摘して思う事実がある.

‘日本書紀’など古代歴史書には招待王から第9大王までの操作された王たちを書き入れているし,
第10代王に新羅であるスジンチォンファングを位置づけとある.

だからおおよそ 9人の王たちを捏造しておいたのだ.

日本の著名な学者たちによって彼と一緒に虚偽操作された ‘燕リ天皇’たちは早くから批判受けて来た.
しかしまだ国粋的な右翼士官信奉者たちは捏造された 9人の王を立てている.

日本歴史での捏造は昨日今日の仕事ではない.
近来の各種歴史教科書歪曲だけではなく旧石器遺物さえ捏造することで
世界的な恥をかいている.

このような日本人の捏造歴史裏面には韓国に対するコンプレックスが作用している.

日本が韓国よりもっと長年の歴史時代を享受したという偽りを作り上げるために,
日本歴史を韓国より 600ニョンシックや上に引き上げておいたことであり,
史実(史実)に全然ない 9人の王たちまで捏造するのに至ったのだ.

参照で倭王室に ‘天皇号(天皇号)’が登場したことは 668年頃だ.
712年に最初の日本歴史書 ‘古事記’が登場する時に古代のすべての倭王のワングホも
天皇で一斉に統一させて表記したことなことも明らかにしておく.

また本論に帰って
実質的に日本の第1代天皇であるスジンチォンファングは祭祀圏と情事圏を確立する一方,
日本の先住民族を新羅の産業文化圏におつまみさせるのに至ったのだ.

すなわち 先進 新羅の稲作と農機具・刀などを製作する鉄器産業,
スエキ(須恵器, 鉄のように堅い器というスェッグルッで ‘過ごすこと’という古代新羅語でできた名称-筆者註)と言って土を焼いて作る陶器産業,
機による織造産業など 先進文化産業は当時未開な日本先住民たちにとって
出雲民族の信徒(神道)信仰に満足に順応するように作用したのだ.

こんな跡たちは日本昔の文献たちでもよく見つけることができる.

言わば ‘鍛冶屋’を漢字語で ‘カラカヌするの(韓鍛治)’と言うとか,
地を売る‘シャベル’を韓国シャベルという意味の‘カラサビ(韓)’で表現するとか
再起を ‘カラスキ(韓鋤)’と歌うことから古代韓国の文物が渡ったことを分かる.

新羅で初めて建てられた 神宮

しかしそのすべてのものの中で一番重要なことは
統治権者が持って渡った神話(神話)と信徒(神道)という宗教だ.

日本信徒の宗主国である新羅で ‘神宮(神宮)’が初めて立ったという事実(史実)は
日本史学者たちも自認めている.

そして神社(神社)や神宮が日本よりずっと先立って新羅にあったということは
‘三国史記’にも詳らかに積まれている.

三国史記によれば BC 57年朴赫居世が国を建てて西紀 4年に逝去した.
彼の息子南海(南海) チァチァウング(次次雄)が王位に上がってから 3年目になった西紀 6年, ‘時祖廟((始祖廟)’を
立てた. 以後新羅の王たちは代代に王位に上がれば必ず時祖廟に行って祭祀を執り行なった.

第21代王人所持麻立干は 487年 2月に競走ナゾング地である‘ネウル(奈乙)’に‘神宮’を建てた.
以後新羅の王たちは王位に上がればやっぱり神宮に参拜したのだ.

こんなに新羅の王たちが上がった直後時祖廟と神宮に参拜したことは
第1次株券である祭祀圏を行使したことで見られるし, こういうわけで第2次株券である情事圏(政事権)まで
確立したと見られるのだ.

ところで新羅で時祖廟を立てることで最初で祭祀圏を行使した南海チァチァウングに対しては
もっとよく見る必要がある. 新羅成徳王(702〜737年在位) 時の学者金大門は

“チァチァウングは‘自充(慈充)’とも歌う. これは新羅語で巫子を示すことや,
世人が巫子は神さまに祭祀をあげるのでこれを畏敬して称するのを自充だと言った”

と言う.

ここで ‘自充’や三韓(三韓) 時代のチォングン(天君), 特に檀君(檀君) などは
統治権者として天神に祭祀させていただく祭司(祭司長)を示すことで解けば良さそうだ.

倭王室で新羅であるスジンチォンファングが新ラシンである対局与えた(対物与えた)に自ら祭祀を行ったことやっぱり
新羅の自充や三韓のチォングンのように祭祀圏を行使する行為だったことだ.

産業が発達することができずにドドだね科学的考え方が登場する以前の古代社会では
統治権者が呪い的な方法を動員海歌であり神聖不可侵の権威を民たちに行使することで
統治基盤を守って行ったはずだ.

そんな見地でギムヨルギュ教授の次のような見解も共感が行く.

“新石器時代には人が死んでもその魂は消えないという霊魂不滅の思想があったし,
人間と魂の間を連結してくれる呪術師としての巫子の存在を認めるシャマニズム(Shamanism)が
広く流行った.


特にシャマニズムは呪い的な方法で悪鬼を退けて氏族院たちを患難から救済するという意味を
持ったことで, 韓国では古朝鮮の檀君や, 三韓のチォングン, 新羅のチァチァウングなどで
呪術師の姿が発見される.”(‘韓国神話と 巫俗研究’, 1977) 前でウッズだジングゴロウ教授が指摘した ‘神聖な巫女’もまったく同じな脈絡で察することができると思う.

日本開国新人スサナオノ−ミコトは新ラシン

スジンチォンファングが宗教とともに持って来た神話にも新ラシンの姿が現われる.

日本開国の大標信である ‘消残・鎖残オゾン(素盞烏尊, スサナオノ−ミコト)’と
彼の妹である ‘天助代わり(アマテラスオオミカミ)’は新ラシンだ.(写真3 参照)





写真 3

ところで日本信徒主義者たちは
天助代わりを担ぐ同時に彼女の弟である消残・鎖残オゾンを
‘悪(悪)王子’と敵対的に表現,
いわゆる ‘悪神(悪神)’で卑下させて来た.

実はその理由はいかにも単純だ.
消残・鎖残オゾンは空信義基盤(高天原)で
地上に降りる時彼の故国である ‘黄金の国’
シンラタング牛痘株(牛頭州)に下がったということが
‘日本書紀’にありありと見えるように積まれているからだ.

すなわち消残・鎖残オゾンはどんなに操作することができない新ラシンであることだ.
一方に消残・鎖残オゾンの親妹である天助代わりの場合は
そのまま天国に暮したのだ.

そのため江戸時代後期に先に立って神道主義ゾンワングでは(尊王論)を作った
ナショナリストヒラタアスタだね(平田篤胤, 1776〜1843年) などによって,
天助代わりはグックシン(国神)で仕えられて頂上で担ぐようになったし,
母国である新羅へ行ってから出雲地に渡って来た消残・鎖残オゾンは排撃されるのに至ったのだ.

ヒラタアスタネのナショナリズム的信徒士官操作がいくら荒唐無稽して
途方もないジッイオッヌンジに対しては日本の権威ある人名辞典で次のように批判している.

“彼は考証学籍な要素を投げ捨てて信徒的要素を発展させて,
復古主義と国粋的・排外的(排外的) 立場で儒教と仏教までも排撃した.

も国学思想を中心に壮大な思想体系を樹立するため,
天地始原(天地始原)から現世と来世にまで考査(古史)と古典(古伝)に
新しい解釈を添加させてキリスト教や心霊術, 新仙術までも利用した.
そのため彼の思想体系は返って非合理的で信仰的に操作された.”(前 ‘人名辞典’)

ヒラタアスタだね同じナショナリストたちのいたずらにもかかわらず日本の権威ある史学者たちによって新ラシンである消残・鎖残オゾンの存在は消えなかった. 日本最初で科学的史学の泰斗に尊敬された土偶今日台史学とのクメクニタケ(久米邦武, 1839〜1931年) 教授は 1907年に使った ‘日本古代史’で次のように明らかにした.

“消残・鎖残オゾンは新羅国の君主にかかって新羅台名臣(新羅大明神)として崇拜した.…

消残・鎖残オゾンは初めに新羅にいらっしゃったし,
その所は牛痘株(牛頭州)である小市頭((ソシモリ, 曽尸茂梨)として江原道春川部だ.…
消残・鎖残オゾンを又の日に呼ぶのを牛痘天皇(牛頭天王) または新羅名臣(新羅明神)として …

今もキョウト(京都) 屈指の祠堂であるヤサカシンサ(八坂神社)に仕えながら絶え間なく
人々の尊崇を受けている.”(‘日本古代史’, 1907)

消残・鎖残オゾン(スサノ−オノ−ミコト)が新ラシンで
日本の出雲(出雲) 地に渡って日本ゲグックシンとして眩しい活動をしたという内容は
が本の第6章第22節から 25節まで詳しく扱っている.

も興味津津な韓日同族論もこの本に盛られているが, 地面関係上略する事にする.

一方でクメクニタケ教授は
‘日本古代史’という本を書く前の 1891年に ‘信徒は提川の高速(神道は祭天の古俗)’という
長編論文を発表して学界は勿論で世人の賛辞を受けた事がある.

が論文は新ラシンである消残・鎖残オゾンが出雲地で行った足跡, 韓日同族論に対する糾明,
そして日本天皇たちの祭祀を行う神さまは ‘天助代わり’ではなく高句麗の同盟(東盟)のはく含めて
付与の迎鼓(迎鼓)の神さま, 例の舞天(舞天)の神さまなど古朝鮮の天神たちというのを
具体的に指摘したのだった.

が論文が発表された後クメクニタケ教授は
自宅でナショナリストたちから不意打ちテロにあう危機を経ったりした.

日本信徒の根が古朝鮮と新羅の信徒にいるという事実は,
当時まで国粋的信徒主義者たちによって徹底的に隠されて来たのだった.

国粋的信徒士官によって ‘大日本帝国’の天皇国家論に一帯打撃になったこの事件以後
本格的に学問の自由は踏み躪られ始めた.

その筆禍社でもだからクメクニタケさんは土偶今日台教授職で追放されるなど不幸を経験したが,
16年が経った後には日本歴史の名著で数えられる‘日本古代史’と‘国社’を同時に使い出すことで
自分の所信を折らなかった.

消残・鎖残オゾンが新ラシンという事実はその後にも現代日本の多くの学者たちが自認めているし,
今日Nakagawaトモヨシ(中川友義) 教授は次のように使っている.

ヤサカシンサのギオンマスリ





写真 4

日本信徒の主体である新ラシン消残・鎖残オゾンを
ゼシン(祭神)で奉ずる代表的ジェントルマンが
今日討議ヤサカシンサ(八坂神社)だ.

ヤサカシンサは毎年 7月17日から 24日まで
‘ギオンマスリ’を行って
消残・鎖残オゾンの ‘神霊’を違令する.

日本で‘マスリ’という祭祀祭り中
一番代表的なことがこのスサノ−オノ−ミコト(消残・鎖残オゾン)に祭祀させていただく祭りだ.

ヤサカシンサの祭祀祭りの時の消残・鎖残オゾンの神霊を仕えた大きい車たちが
少なくとも 20代も長長しい行列を成してキョウト繁華街を行進する.

神霊の車(野馬 14台, 号して 6台)が行進するのに,
この時車師たちが “ワッショイ, ワッショイ!” して大きく力強い口令を叫びたてる.

消残・鎖残オゾンがウェナラに渡って来たという意味で慶尚道言葉 “ワッソに”の口音変化がすぐ “ワッショイ”だ.
が点に対して日本学者の見解を聞いて見よう.

“マスリでは通例車師たちが ‘ワッショイ, ワッショイ!’する口令を上げるものと決まっている.
今日これは全国的な口令になった.
これは古代朝鮮語として‘いらっしゃった’と言う意味と言う.”(重金碩之, ‘風習事典’, 1982)

とにかく日本では消残・鎖残オゾンに祭祀させていただく今日討議 ‘ヤサカシンサ’がその総本司であり,
その下に全国各地に 2000 ヶ所が越える ‘ヤサカシンサ’らが散在している.

言わば日本信徒では, 全国各故障のヤサカシンサで
新ラシン消残・鎖残オゾンを日本第1のゲグックシンで担いで今日に至るのだ. (写真4 参照)

消残・鎖残オゾンが新羅で初めて渡って来た‘出雲’地には消残・鎖残オゾンと彼の妻‘クシイナダヒメ’を
一緒に祭祀を行う昔のジェントルマン ‘ヤエがキシンサ(松江時)’があるということも明らかにしておく.

また消残・鎖残オゾンを ‘新羅台名臣(新羅大明神)’で奉じて来る代表的なジェントルマンは
呉愚迷(近江)の有名な‘新羅船新党(新羅善神堂)’だ.(写真5 参照)

が地域も高麗大学新羅人たちの古巣として, 新羅古墳(ハッケス古墳群)があり,
幾多のスエキ(新羅陶器)と各種遺物たちが出土された事がある.

以外に新羅ジェントルマン(新羅神社)という名称のジェントルマンたちもまだ日本各地に存在している.
言わばイマジョウの新羅ジェントルマン, 多智微意新羅ジェントルマン, ヒメジの新羅ジェントルマンなどが有名だ.

新羅名臣を祭祀させていただく新羅ジェントルマンを隠すため
神国(辛国, カラクだから)という名前に変えて団 ‘神国ジェントルマン’も全国各地にあまたある.

そうであるかと思えば吏読式に ‘新羅’を示す ‘新羅(白木)’の新羅ジェントルマンなど
日本の軍国注意体制で名称が変わった所々も多くの所にある.

新羅チォンイルチァング(天日槍) 王子をゼシンでまつったジェントルマンたちも全国諸所にあまたあって,
も新羅である陳氏(秦氏)家門が新羅農神(農神)に祭祀させていただく大きい規模のジェントルマンたちが
今日討議代表的なジェントルマンたちというのも明らかにしたい.

言わば今日の日本今日討議代表的なジェントルマンたちであるフシミ(伏見)の稲荷せりふ(稲荷大社)を含めて
マスオデサ(松尼大社), 加美加茂ジェントルマン(上駕茂神社), 姑加茂ジェントルマン(下駕茂神社) など
大規模のジェントルマンたちが新羅人の古代ジェントルマンという事実だ.

農作物に現われる新羅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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