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활한 대일본 외교를 위해서는 당시 중국과 조1선의 연안을 어지럽히며 돌아다니는 일본인의 활동을 엄격히 단속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무로마치 막부에게는 조1선·명과의 무역 이익이 대단히 중요하였다. 이에 무로마치 막부는 적극적으로 일본인를 단속하였는데, 이처럼 당시 조1선·일본·명은 다시 국교를 재개하여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개시했다.

일본에게 있어서 한반도는 고대부터 늘 문화 선진국이었던 만큼 문예, 학술은 조1선으로부터 배우는 입장에 있었다. 당시의 조1선통신사의 삼사는 당대 조1선의 최고 지식인이었고 수행원들도 유능한 학자들이 선발되었으므로 통신사 일행이 머무르는 곳마다 이들과 교류하려는 일본 유학자·지식인 들이 모여들었다. 통신사 일행과의 교류는 일본의 지식인이 새로운 지식을 얻고 자신들의 학문 성취를 조1선 지식인으로부터 인정받는 중요한 기회였기 때문이다.
사신들이 일본에 오는 것을 기다린 사람들은 일본의 유학자들이나 학승들이었다. 그들은 왜란 때 조1선에서 가져온 서적이나 문화재 그리고 학식이나 기술이 풍부한 포로들을 통하여 조1선 문화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에 여러모로 관심이 많았다. 특히 조1선의 인쇄 기술로 인하여 일어난 막부의 인쇄 문화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서 유학자나 학승들을 만나서 한시를 창화하고 서화나 휘호를 남기게 될 것을 예상하여 시문에 뛰어난 이문학관과 서기를 동행하였고, 서화에 뛰어난 사자관과 화원을 1624년 사행 때보다 증원하여 일본에서 예상되는 문화 교류를 적극적으로 맞을 태세를 갖추었다.
당시 일본의 지식인들은 문화적인 갈증을 느꼈고, 이러한 때 통신사는 그들의 갈증을 해소해 줄 수 있는 한줄기 시원한 소낙비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이 갈증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이는 진정한 문화적인 갈증이었다기보다 어떤 집단적인 충동에 의한 군중심리의 표현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사신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잘 파악하고 있었다.
“ 한 마디의 말이나 몇 자의 글도 큰 보배로 여길 뿐만 아니라, 효고에서 벽에 쓴 시 두 폭의 값이 각각 1백냥이고, 부사산율시(富士山律詩) 8수는 온 나라 안이 전해 베끼었는데, 이는 반드시 그 사람들이 참으로 확실히 아는 바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 아니다. 한번 지극한 보배라 하면 온 나라 안이 몰려드니 또한 한번 웃을 만하다.-김세렴, 『해사록』 1637년 2월 12일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일행이 써주는 글과 그림, 한시를 요청하는 일본 사람이 너무 많아 사자관만으로 할 수 없어 글이 뛰어난 사람이 총동원되기도 하였다. 통신사가 방문할 때, 후쿠야마 번을 비롯한 인근의 유학자들은 그들과 한문으로 필담을 하며 교류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 필담에서는 오랜 여행을 위로하며 유학에 대해 교류하거나 한시를 주고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