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1선통신사 떴다… 붉은 주단 깔고 횃불 훤히 밝혀라”
[사신 행차에 日열도가 들썩… 단절 200년… 韓·日 심포지엄]
사신 일행만 400~500명… 식성·술 취향까지 파악
최고위급엔 큰 도미 2마리, 수행원엔 작은 도미 반마리
30년에 한 번꼴 왕래… 거대한 문화교류 행사
조1선통신사(朝1鮮通信使)가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온 섬이 비상이었습니다. 사신들 취향을 미리 파악하고 준비하느라 부산을 떨어야 했지요.”
시마무라 게이지로(柴村敬次郞·75) 란토(蘭島)문화진흥재단 부이사장은 300년 전 일을 조목조목 수치까지 들어가며 설명했다. 지난 20일 히로시마 조1선통신사 자료관에서 허경진 연세대 교수 등 필담창화집(筆談唱和集) 번역사업팀을 맞은 자리에서 한 이야기다. 허 교수팀은 일본 초청 공동심포지엄 참석차 왔다가 조1선통신사 길 답사에 나선 참이었다.
시마무라 부이사장은 에도(江戶) 시대 통신사 접대가 “보통 일이 아니었다”는 말을 반복했다. 우선 삼불(三不) 원칙이 있었다. 통신사 접대에 있어서 실패, 실례, 사고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가령 히로시마번 영주는 통신사가 행차할 때면 재빨리 첫 기항지인 쓰시마까지 사람을 보내 사신들의 술 취향 정보까지 수집했다.
사신 일행만 400~500명에 접대원 700~800명, 타지에서 파견된 사람들까지 합치면 2000명이 훌쩍 넘었다. 이 많은 사람을 한 번에 수용하려면 기존의 숙박 시설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새로 짓는 숙소 외에도 일부 주민들은 집을 내놓고 숲 속에서 지내야 했다. 6척의 선단이 도착하면 항구에서 영빈관까지 붉은 주단길이 펼쳐졌다. 모두 수입 원단이었다. 사신 행렬이 밤에 도착하게 되면 해안에 횃불을 400개씩 밝혔다. 무엇보다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사신들의 입맛. 예전 사신들이 도미를 좋아했다는 기록을 보고 최고위급에겐 1인당 큰 도미 2마리, 하급 수행원에겐 2인당 작은 도미 1마리씩 준비하곤 했다. 귀한 전복은 상관에게만 하루 4개를 올렸다. 최근에 해독(解讀)된 비문에 따르면 당시 접대준비를 하다가 주민 60여명이 익1사한 사고까지 있었다.
주민들에게도 수칙이 하달됐다. ‘바다에서 보이는 집들은 각별히 깨끗이 하라. 보기 흉한 부분은 숨기거나 가려라’ ‘통신사를 구경한답시고 나가서 기웃거리지 마라. 특히 2층에서 내려보지 마라’…. 그래도 주민들은 아랑곳없었다. 당시 쇄국정책을 펴던 일본 주민들에게 조1선통신사는 이국 문물의 전령이자 일생일대의 볼거리였다.
유종현 전 요코하마 총영사는 “조1선통신사는 단순 외교 사절이 아니라 한류의 원조라 할 만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