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에 고려는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과 경제적 수탈로 상당한 어려움에 빠졌다. 이 때문에 반원정책은 중요한 과제였으며 내정 개혁도 원나라가 건재하고 부원세력이 강력하게 존재하는 한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공민왕대에 이르러서는 반원 정책과 내정 개혁이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 무렵 국내 문제를 한층 복잡하게 만들고 반원 정책 추진을 곤란하게 하는 새로운 요인이 등장하였는데 그것은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이었다.
왜구가 창궐하기 시작한 것은 충정왕 2년부터였다. 이후 공민왕대와 우왕대에 침략이 급증하였다. 충정왕 2년부터 공양왕 4년까지 42년 동안 506번 왜구가 침략했으니 연평균 12회였으며 우왕 연간에는 침입이 가장 심하여 연평균 27회에 달하였다.
왜구의 창궐은 당시 일본 국내 사정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일본은 치안이 어지럽고 무뢰배들의 횡포가 늘어나 각지에 궁웅할거하는 혼란기였으며,
이러한 시기를 맞아 무사들은 쟁란에 편승하여 소유영지를 넓히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회 정세 속에서 농지를 잃은 농민과, 전쟁에 동원되었으나 보상을 받지 못해 경제적으로 무력해진 하급 무사 등의 불만이 높아갔다. 바쿠후의 통제력이 약한 변방에서 이들이
출발하여 고려와 원ㆍ명을 괴롭힌 것이다.
왜구의 침입이 많을 때는 400여 척의 배가 왔으며, 적을 때는 20척이었다. 그리고 1개 선박의 탑승인원은 적은 경우 20명 정도였고, 대부분은 이보다 훨씬 많았다.
왜구는 해적의 오합지졸이 아니라 배후에 유력한 토호가 있어 직접 조종하였다. 대표 조종자는 쓰시마 도주와 이키 도주였다. 침입한 왜구들은 약탈ㆍ방화ㆍ살인을 일삼았는데, 가장 중요한 약탈 대상은 미곡이었다. 미곡을 약탈하기 위해 왜구들은 조곡을 운반하는 조선을 습격하였으며, 양곡을 저장한 조창을 공격하였다.
우왕대부터는 미곡 약탈만이 아니라 인민의 노략살상까지 저질렀다. 포로를 잡아가 노비로 삼아 값싼 노동력을 공급받을 수 있었고, 노예로 팔기도 하였다. 왜구의 공격 지역은 섬 지방이나 연안에 한정되지 않고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와 피해를 주는 일이 빈번하였으며 기병도 나타났다.
왜구의 침입은 충청ㆍ전라ㆍ경상도 지방에 집중되었다.
삼남뿐 아니라 개경 앞까지 나타났으며, 황해도를 거쳐 평안도, 동해안 쪽으로는 함경도에까지 이르렀다.
최영ㆍ최무선ㆍ이성계 등이 왜구를 무찌르다.
왜구가 침입하자 처음에는 사신을 보내 중지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리하여 고려에서는 적극적은 토벌책을 강구하였다.
우왕 2년 7월 대규모로 왜구가 연산 개태사에 침입하자 원수 박인게가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에 최영이 출정을 자청해 여러 장수와 함께 홍산에 이르렀으나 지세가 험하여 모두 나아가 싸우기를 꺼려하였다.
이에 최영이 몸소 사졸보다 먼저 돌진하자 사기가 크게 올라 적을 무찌를 수 있었다.
우왕 6년 8월에는 왜선 500여 척이 진포에 침입하였다.
타고 온 배는 모두 밧줄로 굳게 묶어둔 채 몇몇 병사만이 남아 배를 지키고 나머지는 모두 상륙하여 부근의 김제ㆍ옥구ㆍ 익산 등지로 흩어져 병화와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에 조정에서 나세를 상원수로 삼고, 최무선을 부원수로, 심덕부를 도원수로 삼아 이를 물리치도록 하였다.
진포에 이르러 최무선이 만든 화포로 적선을 불태우니 적선이 묶여 있어 흩어지지 못하고 모두 불에 타 버렸다. 이 진포싸움에서 겨우 살아남은 360여 명의 적들은 옥주로 달아나 먼저 상륙한 적들과 합류하였다.
육지에서 날뛰던 왜구가 남원 운봉현을 방화하고 인월역에 주둔하여 북상하겠다고 호언하였다.
조정에서 이성계를 양광ㆍ전라ㆍ경상도순찰사로 삼고, 변안열을 체찰사, 우인열ㆍ이원계ㆍ박림종ㆍ도길부ㆍ홍인계ㆍ임성미 등을 원수로 삼아 대토벌 작전을 펼쳤다.
이 전투에서 왜구를 섬멸하였는데, 전사한 왜구의 피로 강이 붉게 물들어 일주일 동안이나 핏빛이 가시지 않았으며, 포획한 말이 1,600여필이었고 병기도 수두룩하였다. 왜구는 겨우 70여 명만이 살아 지리산으로 도망하였다.
바다에서는 정지가 활약하였다. 우왕 3년 순천ㆍ낙안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으며, 1383년 봄에는 왜선 120여 척이 경상도 연해에 들어와 약탈하자 해군을 거느리고 가서 무찔렀다.
왜구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은 이후에도 이어져, 공양왕 원년에는 박위에게 쓰시마섬을 정벌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우왕 말년부터 왜구의 침입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수십 년에 걸친 왜구의 침입은 고려에 엄청난 피해를 가져다 주었다. 조세를 운반하는 조선을 약탈하고 조창을 습격한 것은 국가 재정을 파탄으로 몰고 갔으며 섬 지방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변하였다.
한편 왜구 소탕을 위해 화약ㆍ화포ㆍ화전 등 화기를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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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라 왜구들을 경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