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귀족들의 도일 망명에 대한 <일본서기>(663)의 기록을 보면, 왜의 구원군과 백제 저항군이 어깨를 나란히 해서 싸웠던 주류성(충남 서천, 전북 부안 우금산성 등으로 추측됨)이 당나라와 신라 군대에 함락되자 백제 귀족들의 공통된 의논은 다음과 같았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을 어찌 다시 갈 수 있으랴. 다만 호례성에 가서 일본군 장수들과 논의해야 할 일을 상의하자.”
항구로 보이는 호례성에 가서 왜국 구원군의 장수들과 상의할 일이란 처자를 데리고 도일하는 방법이었다. 백제의 여명마저 다 끊어졌다는 걸 확인한 백제 유신(遺臣)들에게 최후의 선택으로 도일 망명이 생각됐던 것은 절대 우연은 아니었다. 그만큼 백제와 일본이 역사·문화적으로 가까웠던 것이고, 또 그만큼 ‘혈맹 일본’에서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강했을 것이다. 아래에서 더 자세히 기술하겠지만, 이 기대만큼은 적중했다. 그들은 일본에 가서도 어느 정도 신분 유지가 되고 백제인의 자존심을 살리면서 살 수 있었다.
신라보다 차라리 왜국을 선택한 백제인들은 대체로 누구였던가? <일본서기>에서 보이는 여러 이름 가운데 좌평(佐平)이라는 최고 관등을 지닌 왕족 여자신(餘自信)이 눈에 띈다. 백제 부흥운동의 지도자로 유명한 여자진(餘自進)과 이명동인으로 보이는 그는, 일본에서 다카노 미야쓰코(高野造)라는 유명 가문의 선조가 됐다. 이들이 오늘날 오카야마현 쓰야마시 다카노 지역에서 세거하게 됐는데, 그 지역의 유서 깊은 신사인 다카노 신사는 바로 이 가문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거기에서 지금도 다카노 미야쓰코 가문의 조상신을 위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여자신과 함께 백제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간 또 한 명의 귀족은 귀실(鬼室)이라는 유명 가문의 대표자 격인, 귀실집사(鬼室集斯)라는 인물이었다. 그가 단순히 처자만 데리고 간 것도 아니고 400여 명의 ‘백제 남녀’를 대동하고 갔다는 기록은 <일본서기>(권27)에서 전해진다. 그들이 가문의 예속민(노비 등)이었는지, 아니면 전란을 피하려는 일반 양민이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어쨌든 백제 귀족들의 도일 망명이 대규모 집단이주의 성격을 지녔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귀실집사는 백제 부흥운동의 영웅인 귀실복신 장군의 가까운 친척이어서 그랬는지 왜국 정권으로부터 상당한 예우를 받았다. 일본에서 받은 그의 관품은 12위인 소금하(小錦下)였다. 정치적 기반이 없다시피 한 망명객 출신으로서는 상당한 출세라고 봐야 한다. 거기에다 그는 학직도(學職頭)라는 관직을 얻어 유교적 교육기관의 책임자가 되는데, 그만큼 소양과 학식을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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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망명 귀족은 일본에서도 역시 고급관료나 귀족이 되었군요...
역시 백제계 일본왕의 背後때문인가?
1. 백제인이 받았던 12위 小錦下는 어느 정도의 職位인가?
2. 백제인이 집단 거주하였던 近江國·(오늘날의 siga縣)은 어디에 있는 지방인가?
3.백제왕족은 오오사카에 거주하고 백제귀족은 지방에 거주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