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1182씨족의 가계(家系)가 일목 요연하게 기록돼 있다.
왕실 족보를 만들기 시작한 사람은 다름 아닌 히로히토 천왕이 밝힌 간무(桓武) 천황이며, 간무 천황이 쓰기 시작하다 세상을 뜨자 그의 제5왕자인 만다친왕(萬多親王)이 완성한 책이다.
모두 3부로 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천황.황자의 후손이라는 황족이(皇別, 335개 씨족),
2부에서는 천신지신의 후예라는 신족(神別),
3부에는 중국과 한국사람의 조상을 가졌다는 번족이 실려있다(諸蕃).
다음의 사이트를 참조.
http://homepage1.nifty.com/k-kitagawa/data/shoji.html
1. 제 1부에서의 황별(皇別)은 천황의 집안 그 자체가 아니라 단지 원 조상이 천황이나 황자인 씨족들을 지칭하며, 그 족보는 밝히지 않고, 그 선조의 이름을 밝혀, 누구 누구의 후손임을 기록해 두었다.
여기서 44번째까지는 최고의 姓인 마히토(眞人)로, 전적으로 그 기원을 오오진(應神), 게이타이(繼體), 센카(宣化),비따쓰(敏達), 요메이(用明)로 더듬어 올라갈 수 있는 황족들에게만 주어졌다.
신찬성씨록 서문에서도 "마히토가 황별중의 상씨(眞人是皇別之上氏也)이므로, 수도 지역의 마히토(眞人) 씨족을 제 1권에 수록했고, 황별의 첫머리에 실었다."고 말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오오진(應神)계 천황들의 성이 진(眞, 마히토, 眞人)으로 되어 있는데, 이 眞은 백제 왕족 외척(外戚)의 주요성씨중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직속 후계자들은 배우자를 이 眞氏에서만 선택했다. 의심이 가면 삼국사기의 백제본기를 확인해 보자. 주요 요직에 眞高道, 眞嘉謨, 眞武.... 등 수도 없이 등장한다.
성씨록 제 1권의 바로 첫머리에 실려 있는 첫 4개의 마히토(眞人) 황족(1번에서 4번)은, 오오진(應神)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고, 5번째는 게이타이(繼體王)의 후손, 그 다음의 7개 마히토 황족(6번에서 12번)은 비따쓰(敏達)의 후손, 그리고 그 다음 8개(13번에서20번)는 백제 왕자의 후손들(百濟親王之後也)로 기록되어 있다.
12번째 大原眞人, 出自 諡敏達孫 百濟王也
13번째 島根眞人, 大原眞人同祖 百濟親王之後也
그 기록중 주목할 만한 것이 위의 12, 13번째 기록이다.
大原眞人이 비따쓰 천황(敏達王)의 후손인 백제왕족에서 나왔다. 고 기록했다.
비따쓰 천황(敏達王)은 서명왕(舒明王)의 할아버지다.
따라서 비따쓰 천황의 손자가 백제왕족이라면, 비따쓰 천황은 당연히 백제왕족이 되는 것이며,
13번~20번까지의 씨족이 모두 大原眞人과 같은 조상임을 밝히고 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비따쓰(敏達王)는 게이타이(繼體王)의 합법적인 후계자였던 긴메이(欽明)의 둘째 아들이었으며, 게이타이(繼體王)는 오오진의 5세손이다.
즉, 1번에서 20번까지의 모든 마히토 황족들이 "백제왕의 자손들"이었다고 신찬성씨록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21번째부터 44번째까지의 나머지 24개 마히토 황족은, 오오진(應神), 게이타이(繼體), 비따쓰(敏達), 센카(宣化), 요메이(用明), 조메이(舒明), 톈무(天智) 가운데 어느 하나의 자손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일본서기에 의하면, 센카(宣化)는 게이타이(繼體)의 둘째 아들, 요메이(用明)는 긴메이(欽明)의 넷째 아들, 조메이(舒明)는 비따쓰(敏達)의 손자, 텐지(天智)는 舒明의 맏아들, 텐무(天武)는 텐지의 동생이다.
따라서 이것은 신찬성씨록에 실려 있는 전체 44개 마히토(眞人) 황족이, 모두 백제왕의 자손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비따쓰 천황이 백제계 였음이 의심스럽다면, 다음의 기록을 살펴 보자.
부상략기(扶桑略記)를 보면,
元年夏四月, 是月宮于百濟大井
"비다쓰 천황(敏達王)이 즉위한 뒤에 ‘백제대정궁(百濟大井宮)을 야마토 (大和)의 도읍에 마련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日本書紀에서 다시 한번 확인해 준다.
敏達天皇元年(五七二) 四月 是月
是月. 宮於百濟大井. 以物部弓削守屋大連爲大連. 如故. 以蘇我馬子宿 爲大臣
일본서기에는 舒明天皇또한 백제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기록을 포함하고 있으며, 본문 전체가 백제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어, 백제의 역사서와도 같은 느낌을 준다.
舒明天皇十一年 七月: 秋七月。詔曰。今年造作大宮及大寺。則以百濟川側爲宮處
舒明天皇十三年 十月丁酉《九》: 十三年冬十月己丑朔丁酉。天皇崩干百濟宮。
이 외에도 일본서기에는 백제 왕족과 倭 황족 사이의 관계를 보이는 기록은 너무도 많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雄略天皇五年(辛丑四六一)七月; 百濟新撰云 辛丑年 蓋鹵王遣弟昆支君 向大倭 侍天王 以脩兄王之好也
"백제신찬에 이르길, 신축년 개로왕은 그의 동생 곤지를 야마토에 보내 천왕을 모시고 옛 왕들의 우애를 돈독히 하도록 했다."
2.403개의 신별(神別)은, 373개의 천신(天神)씨족과 30개의 땅의 신(地神, 일본 토착 씨족) 씨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천신씨족은 오오진~야마토 시대 혹은 그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온 한국인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야마토 왜의 지배 씨족들은 오오진(應神)계통의 백제왕족 후손인 335개 황족과, 373개의 천신씨족, 제번씨족 속에 포함되어 있는 158개 백제 씨족들, 그리고 한국의 그밖의 지역(신라, 고구려,가야)에서 건너온 61개 씨족이 기록되고 있다.
한국과 직접 관련이 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나머지 씨족은 255개인데, 이 가운데 30개는 땅의 신, 109개는 중국, 116개는 기타 미정잡성(未定雜姓) 계통이다.
그러나 이른바 미정잡성 속에도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 출신이 각각 18, 7, 8, 1. 모두 해서 34개 씨족들 가운데 한국인과 직접 관계가 없는 씨족은 222개 밖에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성씨록에서 처음부터 백제에서 유래했다면서 제번으로 기록되어 있는 104개
씨족들은, 백제 대왕의 후손이 2개, 백제왕의 후손이 47개, 백제 사주의 후손이 11개, 백제 오미의 후손이 6개, 백제 기미의 후손이 5개, 평민 출신이 6개로 되어 있다.
신찬성씨록에는 백제 왕을 조상으로 하는 다음과 같은 씨족들을 소개하고 있다.
半毗氏 百濟國沙半王之後也--->백제 7대 사반왕(沙半王, 234)을 조상으로하는 半毗氏
出自百濟速古王孫比流王也--->백제 1대왕 比流을 조상으로 하는 세개의(春野連, 面氏, 汶斯氏)씨족을
기록하면서, 비류왕이 초고왕(백제 5대왕 166~214)의 후손이라고 기록
出自百濟國人近速王孫檍소 ---->백제의 13대왕 근초고(346~ 375)의 후손을 조상으로 하는 (石野連) 씨족을 기록


빨간선 위: 인덕릉출토 동경과 환두대도에 보이는 삼족오(三足烏)
그 아래가 무령왕릉 출토 환두 대도, 금동제 신발, 금제 뒤꽂이의 삼족오
이 동경은 중국에서는 출토된 적이 없는 한일 고유의 동경이다.
무령왕릉의 동경과 인덕릉(仁德陵)의 동경이 왜 이렇게 똑같은지 이해가 되리라 믿는다.
고대 倭는 한국 도래인들이 세운 국가인 것이다.
3.후지노키(藤木) 고분- 이 고분은 6세기 후반에 축조된 것으로, 스슌(崇峻)천황의 고분이다. 후지노키 고분의 석관에서 나온 부장품 가운데는 이것의 소유자는 많은 후손을 갖게 될 것이다라는 뜻의 의자손(宜子孫) 세글자가 새겨져 있는 거울이 들어 있다.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거울에도 똑같은 세글자가 새겨져 있다.
4.스다하치만(隅田八幡) 신사의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과 무령왕릉의 지석의 사마(斯麻)
癸未年八月日十, 大王年, 男弟王, 在意柴沙加宮時, 斯麻, 念長壽, 遺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 取白上銅二百旱, 作此鏡.
"서기 503년 8월10일, 대왕(백제 무령왕)시대, 남동생인 왕(게이타이 천황)이 오시사카궁(忍坂宮)에 있을 때, 사마께서 아우의 장수를 염원하여 보내주시는 것이노라. 개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등 두 사람을 파견하며, 최고급 구리쇠 200한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도다."
거울의 주인은 남제왕(男弟王)이며, 이 거울을 만들어 보낸 이는 형 사마(斯麻). 男弟는 일본어로 오호도. 혹은 男大迹(남제적). 이 오호도는 계체왕(繼體王)의 또 다른 일본식이름이다.
1971년 公州 宋山里에서 발견된 무령왕릉의 지석의 명문에는 斯麻王 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5.위에서 살펴본 신찬성씨록의 기록과 유물로 우리는 倭가 전국력을 쏟아, 백제의 부흥운동을 지원했던, 일본의 황족은 백제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日本書紀』卷二六齊明天皇六年 十月
百濟國窮來歸我。以本邦喪亂靡依靡告。
"백제가 다하여 내게로 돌아왔네. 本邦이 망하여 없어지게 되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의지할 곳도 호소할 곳도 없게 되었네."
倭에 있어 백제는 本邦 이었던 것이다.
『日本書紀』卷二七天智天皇二年(六六三)九月丁巳《七》◆九月辛亥朔丁巳。百濟州柔城始降於唐。
是時國人相謂之曰。州柔降矣。事無奈何。百濟之名絶于今日。丘墓之所豈能復往。
"백제의 주유성이 당에 함락되었다. 그러자 나라사람들은 서로 다음과 같은 말을 주고 받았다. 주유가 함락됐구나. 이젠 어찌할 도리가 없구나. 오늘로서 백제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말았구나. 이제 우리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그곳을, 어찌 다시 찾아 볼수 있을 것인가!"
일본서기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나 신라가 倭에 조공을 하였다거나, 인질을 보냈다는 기록은 백제와 왜가 한 왕조로서 왜의 천황이 백제의 왕보다 연장자일 경우, 충분히 가능한 일인 것이다.
6.다음은 언젠가 원문을 제시하라는 일본인의 요구가 있었던 부상략기의 기록과 함께, 구세관음상(救世觀音像)에 관한 기록.
부상략기의 推古天皇條
元年正月。蘇我大臣馬子宿檷依合戰願。於飛鳥地建法興寺。立刹柱日。嶋大臣井百餘人。皆著百濟服。觀者悉悅。以佛舍利籠置刹柱礎中
"추고천황 원년 1월에 소아마자대신이 간절히 소원했던 아스카에 호류사를 세우면서, 사탑을 건립하던 날, 소아대신을 비롯하여 백여 명 모두가 백제옷을 입었으며, 보는 이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사탑의 기초 속에 부처님 사리를 안치했다."
소아마자의 아들이름이 가라코(韓子)였고 손자의 이름은 高麗(고구려를 말함:고마)였다고 한다.
왜 소아마자를 비롯해 모두가 백제옷을 입고 중요한 행사를 거행했을까?
이 바로위의 기록에 金堂安置金銅救世觀音像。百濟國王吾入滅後。
戀慕渴仰所造之像也。在百濟國之時。佛像經律。論法服尼等。
"금당에 안치된 금동 구세관음상은 백제 국왕이 서거한뒤에, 국왕을 몹시 그리워하면서 만든 불상이다.
이 불상이 백제국에 있을 때에 백제로부터 불상과 함께 불경, 율론과 법복, 여승 등이 왜왕실로 건너왔다."
부상략기 이후의 기록인 호류지의 고문서 성예초에도 이 사실이 실려 있다. 그 내용에는
"백제 위덕왕이 서거한 부왕 성왕(聖王)을 그리워하여 그 존상을 만들었다."라고 하여 구세관음상이 백제 위덕왕이 만들어 倭에 보낸 사실을 재확인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