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수지역은 "가야국의 분국"
`왜국` 일 건국기초 주장은 억지
서기 173년엔 왜국여왕 히미코 신라에 사신 보내 즉위 신고하기도
고대 일본인을 왜인이라고 한다.
일본서기 진무기는 "남 규슈에 키가 작고 수족이 긴 종족이 살고 있었다"고 전하고 후한서 동이전과 위지 왜인전에는 "신장이 3,4척"으로 나와있다.일본의 저명한 사학자 에가미 나미오박사는 "왜인은 한국인이 진출한 이전부터 중국에 알려져 있었다"고 설파했다.일본 선주족은 오래 전에 진출했고 매우 왜소했던 모양이다.
중국 최초의 지리지 산해경 등 역사서에는 남양에서 일본으로 북상한 왜인을 남왜,만주와 연해주 거주의 왜인을 북왜라 했으며,중국 발해만 연안,내몽고 동남부,요령성 북부,중국 남부 그리고 한반도 경상도 지방에도 왜인이 있었다고 돼 있다.일본열도 이외의 여러 곳에 왜인집단이 형성돼 있었다는 증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왜"라는 기록은 기원전 50년 왜구가 신라를 침범했다는 대목이 시초이다.중국 한서지리지 왜인전은 "3세기께 낙랑해중에 왜인이 1백여국으로 분할돼 있다"고 적고 있다.위지 왜인전에는 "북 규슈 야마다이국은 여왕 히미코가 29국을 연합해 지배하고 있어 동경1백장과 왕인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요즘 일본은 이를 금과옥조로 삼아 교과서마다 야마 국 왜 대왜 대화 일본을 모두 "야마토"로 읽는다.이는 "일본은 고대로부터 한국보다 훨씬 앞서 국가체제를 갖춘 강성한 나라였으므로 후진의 한국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역사관을 심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또 일본은 야마토를 대왕이 통치했으며 일부 나라에서는 조선반도에 있었던 중국의 관청에 사신을 보냈고 히미코 여왕은 위나라와 교류를 활발히 했다고 교육한다.통일된 왜국이 하나의 맥락으로 오늘에 이르면서 강국으로 성장했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왜국여왕 히미코가 즉위 직후인 서기 173년 5월 신라왕에게 사신을 보내 수교를 청했다는 내용이 있다.신라와 각별히 연고가 두터워 즉위신고를 했다는 설도 있다.히미코의 이름은 태양숭배족을 암시하는 조선고어이며 "가장 존경받는 위인"을 의미, 가야-신라계 분국의 수령이었다고도 한다(박병식저 우가야황국 211쪽).
일본서기에 의하면 서기 405년 백제학자 왕인박사가 천자문과 논어를 가져가 처음으로 일본에 문자를 전파했으며 이전에는 한문글자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따라서 일본은 왜국이란 국호를 가질 처지가 아니었으며 여러 지역별로 수령이 할거하고 있어 고유국호를 제정할 입장도 아니었던 것이다.
중국 사서의 "왜국"이란 기록은 중화사상에 근거해 "왜소한 종족"이라는 천시관념에서 통칭해 왔던 것을 기록에 남기기 위해 불가피하게 국명처럼 써 놓은 것에 불과하며 후일 국명으로 통용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위지 왜인전의 "가야인이 규슈에 진출하여 평민은 한 두명,지위 높은 자는 4,5명의 왜인여성을 데리고 와 처로 삼았다"는 기록을 보면 가야인과 왜인의 내왕이 많았음을 뒷받침하고 있다.
한서지리지는 "일본은 왜국의 별종"이라 했다.일본열도내에만 왜국이 있었다면 "왜국의 별종"이란 표현은 성립될 수 없다.그러니까 가야인이 대거 규슈지역에 진출하고 있었으므로 "가야에 예속된 왜국의 별종" 혹은 "가야국의 분국"이었다는 학설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결국 일본이 "왜국"을 일본의 건국 기초라고 주장하는 것은 건국연대를 오래 잡아 천황은 한 혈통으로 세습해 만세일계를 누리고 있다고 과시,후세 사람들에게 맹목적으로 우월감을 부풀게 하는 황국사관의 일환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