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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ギンメイワングは百済で渡った盛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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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 奈良県 飛鳥 地方の盆地を成すかなり低い微微そでなし山(シイタケ 140m) 山なみ丘陵地帯に飛鳥倭王室第29代ギンメイワング(539〜571)の王陵(Hino区姓陝坂井野ミサ詐欺)がゴズノックが位置している. この王陵は百済盛旺(523〜554)の御陵だ. 百済での在位連帯に計算して見る時, 盛旺は日本に渡った後 17年間を飛鳥王室で住んで逝去して今の ‘Hino区姓陝坂井野ミサ詐欺’ に永眠しているのだ. 日本奈良県には百済盛旺がなぜのギンメイワングを兼任したという足跡が相変らず残っている.


5世紀から古代日本の初期王室が実在した地域は 大阪と奈良(奈良) 地だ. 早稲田大学史学科 ミズ老幼(水野裕) 教授は 1978年発刊された著書 ‘日本の古代国家形成’で “大阪地で 5世紀 超硬を中心に百済 到来認印誤診王(応神王)と彼の息子ニントクワング(仁徳王)の時代が展開された”と主張した.
東京大学Inoueミスサだ(井上光貞) 教授もみずの説(説)を全幅的に支持した. その後 1970年代から本格的に総合 研究一史学者イシワタリShinichiで(石渡信一郎・東京税金横領高校) 教師の著述 ‘百済から渡来した誤診天皇’(百済から渡来した応神天皇, 2000)’ などの研究成果は高句麗と百済係到来人たちの日本での騎馬民族王朝の成立を総合糾明し出した.
百済人たちは 6世紀に大阪地域グダラス(百済洲)から徐徐に西の方に内陸奥深い所で王道を移して百済 仏教 国家を立てて盛んになった. その基盤が奈良(奈良) 飛鳥(飛鳥) 地だ. 特に 6世紀中葉から国地域の中の飛鳥一帯でいよいよ百済仏教を土台にする百済係王室が王朝を形成して行くようになった. 西の方内海内側地帯である今の大阪, すなわち当時グダラス 海辺 渡し場(難波津) 地域で高句麗と新羅など外勢侵略に備え, 王室 防御の慈しみに分析される.
◇誤診王(紅王子) 祠堂
その主導的な役目を導いた主人公が百済第25代武寧王(501〜523 在位)の息子である第26代盛旺(523〜554, 百済での在位連帯)だ. 盛旺は 554年極秘裡に第1王子威徳王(554〜598 在位)に譲位して日本に渡った. ‘三国史記’では盛旺が 554年 7月に 50人の騎馬兵を従えて新羅を奇襲して九天(狗川)で新羅の伏兵に浮び上がって逝去したと記録されている. しかし色々 歴史 記録をよく見れば盛旺はこの頃日本の百済人王室で隠れたことで明かされる.
まず盛旺の登極初期から手短に察してみよう. 彼は即位年の 523年に高句麗が侵攻して来ると騎馬だね 1万名を座長(左将) 至忠(志忠)に任せて敗数で撃退させて, 翌年羊(梁)国高まり(高祖)と親交を結んだ. 525年には新羅とも修交した. 529年再び高句麗が南侵して血誠を奪うと騎馬兵など 3のみをズァピョング(佐平) 煙幕(燕謨)に押し付けて 五穀で対抗させたが 2000人余りの軍事だけ失って敗戦した. その後 538年には王道を 熊津(公州)から私費(小富里/扶余)で移して国号を ‘南プヨ’に変えた.
548年 1月高句麗が例(〓)と 公募, 百済の禿山性を攻撃すると盛旺は新羅真興王(540〜576 在位)に援軍を要請して新羅だね 3000人の助けで侵攻君を 大破した. 550年 1月に盛旺は将軍つけること(逹己)に 1万の軍事として高句麗屠殺性を侵攻させた. その年 3月に高句麗は百済金玄聖で攻め寄せた. 553年新羅が百済東北辺方地域に侵攻して 子株(新州)を設置したし, 盛旺はこれに屈服して公州を真興王に 詩集 送った.
◇ギンメイワングルング周辺
その翌年の 554年 7月に盛旺は 50人の騎馬兵を従えて真夜中に新羅九天を奇襲して負傷を負って戦死したと言うのが三国史記の説明だ. しかしこれは非常に多い矛盾を持っている. 数万名医騎馬兵を従えることができる盛旺がやっと 50人の騎馬兵を自ら従えて新羅に侵攻したということは不合理説だ. すなわち盛旺は戦死を装うために夜間の不意打ち作戦を選んだという推論が可能で彼が実戦に参戦したかは知られなかった. もし盛旺が戦死を仮装(家長), 宣伝して風聞をまき散らしてなぜの百済王室に完全に渡ったことではないか.
◇誤診王(紅王子) 社だ内部
盛旺は倭王室で完全に隠れる以前である 539年に倭王室の百済係センカワング(宣化王・536〜539)が逝去すると日本に渡って倭王を兼任し始めたと見える. この時から盛旺は百済と日本を出入りしている途中 554年戦死うわさをまき散らして太子威徳王に譲位した後グダラス西の方遠く 安全一国飛鳥盆地に仏教国家 建設に取り掛かったのだ. こちらだけは高句麗や新羅が攻め寄せ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確信を持ったと思ったはずだ.
そうだったら, 盛旺は何の力で今の大阪地であるグダラスでありあの遠く西の方国地域飛鳥盆地を同時に支配領域を拡張させることができただろうか. 当時国地方の支配者は百済人小家僕イナメ(蘇我稲目・?〜570)だったし彼は百済係倭王室の実権者だった. 京都府立大学史学科がドワキデージ(門脇禎二) 教授は “小家僕イナメの曽祖父は百済祖神(朝臣) 木理ほどでユリャクワング(雄略 456〜479 在位) の時のウェナラで渡って来て王室の三長(三蔵)を 官長した”(‘飛鳥’ 日本NHK放送出版協会, 1995)で著わした. これと共にゴクがクインデハックカナザワショサブで(金沢庄三郎・1 872〜1967) 教授は “ユリャクチォンファングは百済ゴングックシン(建国神)を 祭祀 仕えた”(‘日鮮同祖論’ 1929)で明らかにしたりした. 高句麗の朱蒙を先祖子株で奉じたというのだ.
またカナザワ教授は “百済第21代開路王(455〜475 在位) 時代倭王室に渡って重臣になった木理ほどの息子は小家僕仮ラッコ(蘇我韓子)で孫は小家僕雇馬(蘇我高麗)だったし曽孫子は前で指摘した小家僕イナメ(蘇我稲目)で高孫者は小家僕牛馬して(蘇我馬子・?〜626)だ”と指摘した. 百済祖神木理ほどの曽孫子である小家僕イナメは 朝廷の最高代わり(その頃ウデシン)として百済を行き交った盛旺を徹底的に担いだ. 二名の妹(ギタシヒメ, オアネノ−キミ)を皆盛旺の後宮で入宮させたし, 同時に王室の権力も掌握した.
飛鳥地で百済盛旺が倭王室のギンメイワングとして君臨することができた最大の 背景は百済到来である誤診王と彼の息子ニントクワングの時代からイッデオ倭王室をずっと掌握して来たからだ. その間ユリャクワングの時の寵愛を受けて倭王室に住んでいたごとに王子(末多王子)が百済で帰国して第24代トンソン王になった(‘日本書紀’).
◇ギンメイワングルング扁額
ユリャクワングが無惨に可愛がったというごとに王子は外でない百済のウェナだと征服者誤診王(開路王の第2王子である紅王子)の第5王子だった. そうするのに “ごとに王子が百済に渡って百済国のトンソン王として王位に上がるようになった帰国道にはスキシ(築紫・ギュシュタング)の兵士 500名医 護送(護送)を受けた”(‘日本書紀’ ユリャク 23年 4ワルゾ)と言うのだ.
百済で帰国する道に 500人の護衛兵士が奉じたと言う事実は何を立証することか. これは言うまでもなく倭王室はすなわち百済人たちの王朝という事実を見せてくれる. またトンソン王が逝去するとなぜのブレスワング(武烈 498〜506)は倭王室に住んでいた司馬王子(トンソン王の第2王子)をまた百済第25代武寧王として送った(‘日本書紀’). ‘三国史記’にはない記事が日本史にはとても詳細に記録されている.
それなら倭王室に住んでいた盛旺が帰国して武寧王から王位を受け継ぐことができたかも知れないという推論が可能だ. ところがこれを糾明する 史料はまだ発見されなかった. 付け加えて説明しようとするとブレスワングが逝去した後誤診王(紅王子)の孫であり, 百済国王になったトンソン王の王子ゲイタイ王(継体王・507〜531 在位)が倭王で上がった. その後ゲイタイ王の第2王子センカワングが死んで王位を受け継いだのが 538年倭王室に仏教を布教した百済盛旺だ. すなわちなぜのギンメイワングとしての盛旺の登極であり, あの時から盛旺は百済とウェナラを往き来して両国の王位を兼任したのだ.
日本史学者小林Yasuko(小林恵子)は “百済盛旺 1 8年(540)に盛旺は高句麗の傘性を攻撃して敗れたし, 盛旺はまっすぐに倭国で亡命した. あの時から彼は倭国国地のがナサシノ−ミヤグング(金刺宮)に新しい居所を情と倭国王になった”(‘二つの顔の大王’ 文芸春秋社, 1991)で淑やかだった.
である王室系図格である ‘シンチァンソングシロック’(新撰姓氏録, 815年王室編纂)に見れば日本第30代王人 “フィ(諱) ビダス(敏逹)は百済王族”という名門が史実(史実)で明かされている. 日本古代文献で日本の一古代王が王の実名(実名)として百済王族という記事が直接記録された唯一事項だ. ビダスワング(敏逹王・572〜585 在位)はギンメイワング(盛旺)の第2王子だ. 盛旺の第1王子はその頃百済第27代威徳王だった.
古代日本私だと地では歴代王たちが百済盛旺の子株を奉じて王室祠堂で盛旺を祭祀を行いながら連れられた. その上に 794年第50台桓武天皇(781〜806 在位)が国地
◇ホン・ユンギ韓国外大教授
にあった王道を平安京(今の京都)に遷都するやいなや百済盛旺の倭王室管轄祠堂は新しい王道である平安京で移される. その所が今京都の時のHiranoジェントルマン(平野神社)だ.
もちろんこの事実はもう 19世紀の著名な国学者バンノ−ブトモ(伴信友・1773〜1846)が “Hiranoジェントルマンの子株は百済盛旺だ”(‘蕃神考’)と言いながら糾明した事がありながら引き継いで今日幾多の史学者たちが認める所だ. 日本王室文献(‘延喜式’ 917 王室編纂)にも百済盛旺子株のまつったHiranoジェントルマンは日本王室が管掌して祭祀仕える祠堂だと記録されている.(次に引き続き)
韓国外大教授 senshyu@yahoo.co.kr 20070731001304010206030000002007-08-01 16:26:002007-08-01 16:26:000 [ホン・ユンギの歴史紀行日本の中の寒流を捜して]<47>日 ギンメイワングは百済で渡った盛旺趙成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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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긴메이왕은 백제서 건너간 성왕

일본 나라현 아스카 지방의 분지를 이루는 나지막한 미미나시산(표고 140m) 산줄기 구릉 지대에 아스카 왜왕실 제29대 긴메이왕(539∼571)의 왕릉(히노쿠마노 사카이노미사사기)이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다. 이 왕릉은 백제 성왕(523∼554)의 능이다. 백제에서의 재위 연대로 따져볼 때, 성왕은 일본에 건너간 후 17년간을 아스카왕실에서 살다 서거해 지금의 ‘히노쿠마노 사카이노미사사기’ 에 영면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나라현에는 백제 성왕이 왜의 긴메이왕을 겸임했다는 발자취가 여전히 남아 있다.


5세기부터 고대 일본의 초기 왕실이 실재한 지역은 오사카와 나라(奈良) 땅이다. 와세다대학 사학과 미즈노 유(水野裕) 교수는 1978년 발간된 저서 ‘일본의 고대 국가 형성’에서 “오사카 땅에서 5세기 초경을 중심으로 백제 도래인인 오진왕(應神王)과 그의 아들 닌토쿠왕(仁德王)의 시대가 전개되었다”고 주장했다.
도쿄대학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교수도 미즈노설(說)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그 이후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종합 연구한 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石渡信一郞·도쿄 도세고교) 교사의 저술 ‘백제로부터 도래한 오진천황’(百濟から渡來した應神天皇, 2000)’ 등의 연구 성과는 고구려와 백제계 도래인들의 일본에서의 기마민족 왕조의 성립을 종합 규명해냈다.
백제인들은 6세기에 오사카 지역 구다라스(百濟洲)로부터 서서히 서쪽으로 내륙 깊숙한 곳으로 왕도를 옮겨 백제 불교 국가를 세우고 번성하게 되었다. 그 터전이 나라(奈良) 아스카(飛鳥) 땅이다. 특히 6세기 중엽부터 나라 지역 안의 아스카 일대에서 드디어 백제 불교를 바탕으로 하는 백제계 왕실이 왕조를 형성해 나가게 되었다. 서쪽 내해 안쪽 지대인 지금의 오사카, 즉 당시 구다라스 바닷가 나루터(難波津) 지역으로 고구려와 신라 등 외세 침략에 대비, 왕실 방어를 위함으로 분석된다.
◇오진왕(곤지왕자) 사당
그 주도적인 역할을 이끈 주인공이 백제 제25대 무령왕(501∼523 재위)의 아들인 제26대 성왕(523∼554, 백제에서의 재위 연대)이다. 성왕은 554년 극비리에 제1왕자 위덕왕(554∼598 재위)에게 양위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삼국사기’에서는 성왕이 554년 7월에 50명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신라를 기습하다 구천(狗川)에서 신라의 복병에게 부상해 서거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여러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성왕은 이 무렵 일본의 백제인 왕실로 잠적했던 것으로 밝혀진다.
우선 성왕의 등극 초기부터 간략하게 짚어보자. 그는 즉위년인 523년에 고구려가 침공해오자 기마군 1만명을 좌장(左將) 지충(志忠)에게 맡겨 패수에서 격퇴시키고, 이듬해 양(梁)나라 고조(高祖)와 친교를 맺었다. 525년에는 신라와도 수교했다. 529년 또다시 고구려가 남침하여 혈성을 빼앗자 기마병 등 3만을 좌평(佐平) 연막(燕謨)에게 떠맡겨 오곡에서 대항시켰으나 2000여명의 군사만 잃고 패전했다. 그 후 538년에는 왕도를 웅진(공주)으로부터 사비(소부리/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바꿨다.
548년 1월 고구려가 예(濊)와 공모,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자 성왕은 신라 진흥왕(540∼576 재위)에게 원군을 요청하여 신라군 3000명의 도움으로 침공군을 대파했다. 550년 1월에 성왕은 장군 달기(達己)에게 1만의 군사로서 고구려 도살성을 침공시켰다. 그 해 3월에 고구려는 백제 금현성으로 쳐들어왔다. 553년 신라가 백제 동북 변방 지역에 침공하고 신주(新州)를 설치했고, 성왕은 이에 굴복하여 공주를 진흥왕에게 시집 보냈다.
◇긴메이왕릉 주변
그 이듬해인 554년 7월에 성왕은 50명의 기마병을 거느리고 한밤중에 신라 구천을 기습하다 부상을 입어 전사했다는 게 삼국사기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는 매우 많은 모순을 갖고 있다. 수만 명의 기마병을 거느릴 수 있는 성왕이 겨우 50명의 기마병을 몸소 거느리고 신라로 침공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즉 성왕은 전사를 가장하기 위해 야간의 기습 작전을 택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며 그가 실전에 참전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혹시 성왕이 전사를 가장, 선전해 풍문을 퍼뜨리고 왜의 백제 왕실로 완전히 건너간 것은 아닐까.
◇오진왕(곤지왕자) 사당 내부
성왕은 왜왕실로 완전히 잠적하기 이전인 539년에 왜왕실의 백제계 센카왕(宣化王·536∼539)이 서거하자 일본에 건너가 왜왕을 겸임하기 시작했다고 보인다. 이때부터 성왕은 백제와 일본을 넘나들다가 554년 전사 소문을 퍼뜨리고 태자 위덕왕에게 양위한 뒤 구다라스 서쪽 멀리 안전한 나라 아스카 분지에다 불교 국가 건설에 착수했던 것이다. 이곳만큼은 고구려나 신라가 쳐들어오지 못한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성왕은 무슨 힘으로 지금의 오사카 땅인 구다라스며 저 멀리 서쪽 나라 지역 아스카 분지를 아울러 지배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었을까. 당시 나라 지방의 지배자는 백제인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570)였고 그는 백제계 왜왕실의 실권자였다. 교토부립대학 사학과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수는 “소가노 이나메의 증조부는 백제 조신(朝臣) 목리만치이며 유랴쿠왕(雄略 456∼479 재위) 때 왜나라로 건너와 왕실의 삼장(三藏)을 관장했다”(‘飛鳥’ 日本NHK방송출판협회, 1995)고 저술했다. 이와 함께 고쿠가쿠인대학 가나자와 쇼사브로(金澤庄三郞·1 872∼1967) 교수는 “유랴쿠천황은 백제 건국신(建國神)을 제사 모셨다”(‘日鮮同祖論’ 1929)고 밝히기도 했다. 고구려의 주몽을 조상 신주로 받들었다는 것이다.
또 가나자와 교수는 “백제 제21대 개로왕(455∼475 재위) 시절 왜왕실로 건너가 중신이 된 목리만치의 아들은 소가노 가라코(蘇我韓子)이며 손자는 소가노 고마(蘇我高麗)였고 증손자는 앞에서 지적한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이며 고손자는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626)이다”고 지적했다. 백제 조신 목리만치의 증손자인 소가노 이나메는 조정의 최고대신(그 당시 우대신)으로서 백제를 오가던 성왕을 철저하게 떠받들었다. 두 명의 누이(기타시히메, 오아네노키미)를 모두 성왕의 후궁으로 입궁시켰고, 동시에 왕실의 권력도 장악했다.
아스카 땅에서 백제 성왕이 왜왕실의 긴메이왕으로서 군림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은 백제 도래인 오진왕과 그의 아들 닌토쿠왕의 시대로부터 잇대어 왜왕실을 계속 장악해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유랴쿠왕 때 총애를 받으며 왜왕실에 살고 있던 마다왕자(末多王子)가 백제로 귀국하여 제24대 동성왕이 되었다(‘일본서기’).
◇긴메이왕릉 편액
유랴쿠왕이 끔찍하게 귀여워했다는 마다왕자는 다름 아닌 백제의 왜나라 정복자 오진왕(개로왕의 제2왕자인 곤지왕자)의 제5왕자였다. 그러기에 “마다왕자가 백제로 건너가 백제국의 동성왕으로서 왕위에 오르게 된 귀국 길에는 쓰키시(築紫·규슈땅)의 병사 500명의 호송(護送)을 받았다”(‘일본서기’ 유랴쿠 23년 4월조)는 것이다.
백제로 귀국하는 길에 500명의 호위 병사가 받들었다고 하는 사실은 무엇을 입증하는 것인가. 이는 두말할 나위없이 왜왕실은 곧 백제인들의 왕조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동성왕이 서거하자 왜의 부레쓰왕(武烈 498∼506)은 왜왕실에 살고 있던 사마왕자(동성왕의 제2왕자)를 다시 백제 제25대 무령왕으로서 보냈다(‘일본서기’). ‘삼국사기’에는 없는 기사가 일본사에는 아주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그렇다면 왜왕실에 살고 있던 성왕이 귀국해 무령왕으로부터 왕위를 계승했을 수도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이를 규명할 사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부레쓰왕이 서거한 뒤 오진왕(곤지왕자)의 손자이며, 백제국 왕이 된 동성왕의 왕자 게이타이왕(繼體王·507∼531 재위)이 왜왕으로 등극했다. 그 이후 게이타이왕의 제2왕자 센카왕이 죽어 왕위를 계승한 것이 538년 왜왕실에 불교를 포교했던 백제 성왕이다. 즉 왜의 긴메이왕으로서의 성왕의 등극이며, 그때부터 성왕은 백제와 왜나라를 왕래하며 두 나라의 왕위를 겸임했던 것이다.
일본 사학자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는 “백제 성왕 1 8년(540)에 성왕은 고구려의 우산성을 공격하다 패했으며, 성왕은 곧장 왜국으로 망명했다. 그때부터 그는 왜국 나라 땅의 가나사시노미야궁(金刺宮)에다 새로운 거처를 정하고 왜국왕이 되었다”(‘二つの顔の大王’ 文藝春秋社, 1991)고 단정했다.
일 왕실 족보격인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815년 왕실 편찬)에 보면 일본 제30대 왕인 “휘(諱) 비다쓰(敏達)는 백제왕족”이라는 명문이 사실(史實)로 밝혀져 있다. 일본 고대 문헌에서 일본의 한 고대왕이 왕의 실명(實名)으로서 백제왕족이라는 기사가 직접 기록된 유일 사항이다. 비다쓰왕(敏達王·572∼585 재위)은 긴메이왕(성왕)의 제2왕자이다. 성왕의 제1왕자는 그 당시 백제 제27대 위덕왕이었다.
고대 일본 나라 땅에서는 역대 왕들이 백제 성왕의 신주를 받들며 왕실 사당에서 성왕을 제사 지내며 모셔왔다. 더구나 794년 제50대 간무왕(781∼806 재위)이 나라 땅
◇홍윤기 한국외대 교수
에 있던 왕도를 헤이안경(지금의 교토)으로 천도하자마자 백제 성왕의 왜왕실 관할 사당은 새 왕도인 헤이안경으로 옮겨진다. 그곳이 지금 교토시의 히라노신사(平野神社)이다.
물론 이 사실은 이미 19세기의 저명한 국학자 반노부토모(伴信友·1773∼1846)가 “히라노신사의 신주는 백제 성왕이다”(‘蕃神考’)라며 규명한 바 있으며 뒤이어 오늘날 수많은 사학자들이 인정하는 바다. 일본 왕실 문헌(‘연희식’ 917 왕실 편찬)에도 백제 성왕 신주를 모신 히라노신사는 일본 왕실이 관장하며 제사 모시는 사당이라고 기록돼 있다.(다음에 계속)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20070731001304010206030000002007-08-01 16:26:002007-08-01 16:26:000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47>日 긴메이왕은 백제서 건너간 성왕조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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