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済州 4.3事件の争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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済州 4.3事件の争点

2003年 10月 15日は当時の総理であるコ・ゴンが朴院スンイ主導した ‘事実上の 4.3見て下書き’を掻っ払い式で通過させた日だ. これによってノ・ムヒョンが大韓民国大統領資格で済州島で錫牲された民間死亡者たちに対して謝った. 国家が暴力をやらかしたというのだ. こういうわけで暴動を主導したパルチサンたちまでも罪のない犠牲者に格上げされて, 軍警は国家暴力団になった.

死亡者たちの中では軍人-警察そしてその家族たちがいたし, 西北青年団もあったし, 幾多の民間人たちがいた. 民間人死亡者たちの中にはパルチサンを中心にする暴徒もあったし, 軍警によって悔しく犠牲された人々もいたし, 暴徒たちによって犠牲された人々もいた. これが 2003年 10月 15日以前まで伝えて下った正統士官だった.

4.3事件は 1948年 5月 10日南韓だけの単独選挙を邪魔するためにパルチサンが起こしたし, この事件を主動したギムダルサムとその後を引き継いだイドックグは今平壌エグックリョルサルングに仕えられている. 北朝鮮が発刊した対南工作社 “主体の旗印よって進む南朝鮮人民たちの闘い”には 4.3事件がこんなに整理されている. “4.3人民一揆は反米救国闘いだ”

1995年中央日報によって発掘されたスティコプ備忘録によれば 1946年 9月左翼系列の「朝鮮レーバーユニオン全国評議会(全評)」が主導した 9月ゼネスト時北朝鮮の小軍政が 2百万円を, 引き継いで発生した 10月 1日大邱暴動の時は 3百万円の資金を支援した. これは当時南韓情勢にソ連が深く介入したことを明らかにするように見せてくれるのだ.

4.3事件もこのような延長線上にあるというのが私たちの直観であるでしょう. 1995年当時まで左派たちは全平の 1946年の 9月ストライキ及び大邱 10月暴動に朝鮮共産党の介入がなかったと主張した. しかしこんな左派たちの虚無孟浪した主張はスティコプ備忘録によって消えてない.

バックワンスン-コ・ゴンが主動した済州4.3報告書も虚無孟浪した主張を込めているということが済州4.3委員会に参加したナゾングサム専門委員, ハングァンドック将軍, ユゼガブ教授, ギムゾムゴン教授, 李滉優教授たちの主張だ. その虚無孟浪した主張というのは大きく二つだと言う. 一つは済州事件が当時軍警と西北青年団(北が言うテロ集団)が済州道民を不当に弾圧したのに対した正当な抗拒だったということで, 他の一つは済州事件が南労堂指令を受けたところなしに済州道民たちが独自的に主導した抗争というのだ.

果して当時の軍警と西北青年団が特別に遠く済州島まで渡って特に済州島道民のみを集中的に弾圧-犠牲させるに値する理由があったのか, 実際にそれほど弾圧した事実があるかどうかを察しなければならないはずだし, 果して北朝鮮エグックヨルサルングにつけている第1代及び第2代主動者であるギムダルサムとイドックグが 4.3事件を南労堂(朝鮮共産党)の介入なしに単独で主導したのか, そして 4.3事件が果して米軍政の弾圧に反撥した抗争なのかそれとも単独政府樹立を邪魔するための武将暴動なのか, 重点的に糾明しなければならない作業が私たちに付与されている.

下は済州4.3委員会ナゾングサム専門委員が指摘した内容だ.

1.過ち記述された真相報告で

真相調査報告書の最優先課題は 4・3特別法に明示されたところのように真相糾明で次が犠牲者ミョングイェフェボックイだ. ところで見てからは真相糾明よりは犠牲者名誉回復に重点を置いた. 4.3事件が南労堂の指令によって勃発したのではなく住民が警察及び西北青年団の弾圧に抗して起きた武将一揆だと言いながら民衆抗争で誘導した. したがって 4・3事件は正義のある義挙なので 4・3によって死亡者は皆犠牲者というのだ. こんな目的を果たしてひいては最終目標である補償までを眺めながら次のように報告書を記述した.

-事件は単独選挙を沮止しなさいという南労堂の暴動指令と済州徒党の組職守護のために起こしたのに. 彼らは米軍政の単独選挙実施と顧問・致死社でもなどを取り上げてここに対立するために住民たちが自発的に武将一揆したと規定した.

しかし単独選挙と単独政府樹立は牛軍政が先に実施しただけでなく統一政府樹立のためのUNによる南・ブックチォングソンを牛軍政が反対した. 南労堂は自体養成した遊撃隊と自衛隊を動員して軍事作戦をするように 4月 3日夜明け 2時に漢拏山の烽火を信号で済州全域で右翼に対してテロをほしいままにした. したがって住民が自然発生的に決起したという主張は当たらない. 4・3事件は建国を邪魔した公算反乱なのに事実を隠蔽-歪曲して南労堂側の蛮行は縮小して軍・傾仄の過ちは拡大して南労堂側に正当性を付与することで事件を武将一揆で遁甲させた.

-事件の性格は暴動よりは反乱なのに武将一揆で記述した. これは北朝鮮の対南工作社が規定したそのままだ. 民衆一揆や民衆抗争で 4.3事件を規定したことは 4.3事件が反乱ではなく義挙というのだ.

-真相糾明報告では南労堂リーダー朴憲永とソ連軍との関係を隠蔽したし, 4.3事件にナムノ−ダングが介入した事実を隠蔽して, 4.3事件が警察の爆圧と行政の紊乱のため発生した住民の武将一揆だと規定した.

-事件を指導した今年区の存在を隠蔽した. 事件を指導した人物は済州島出身南労堂済州島だ人物ではなく南労堂全南徒党と中央党で派遣された指導員だった. 全南徒党で派遣した今年で(オルグ)は計画段階から介入したし, 中央党の今年区は事件勃発以後に介入した. 事件の指導人物が知れば終着駅が分かるにも今年区の存在を隠蔽することで事件が単純な主導内の事件であることで縮小した.

-南労堂側の住民虐殺事例は縮小するとか隠蔽して軍・傾仄の事例は過度に拡大した. 被害申告受付結果討伐隊(軍・頃・右翼)による犠牲が 86%, 南労堂側にの一犠牲が 14%で出たのでこの割合で事例を紹介するべきさにも本文で引用した事例を除いてからも別途の事例だけ計算しても南労堂側の虐殺事例はやっと 4ページである一方討伐隊側の事例はおおよそ 130ページを割くなど 3%台 97%と言う(のは)とても片手落ちで紹介している.

も住民虐殺は南労堂側が先にやらかしたのにこれを指摘していない. 南労堂は右翼人士たちを拉致して竹窓で何回や突いて石で頭を打ったし, 日本刀で各をはなすとか切り身にしたし, 甚だしくは手足に杭を打って, 針金を燼門で入れて口で出るようにするとか女人たちをつまむという輪姦した後日本刀でところかまわず突き刺して生き埋めしたりした. 済州出身牧師 1号の利刀種牧師も生き埋めされた. それなのに見てからはこれを全然記述しないで軍・敬意過ちだけ繰り返し的に記述したが, これは軍・驚異無条件住民を虐殺したから住民が一揆したと主張しようとする意図のためだ.

-南労堂の掛け声や主張をどんな批判なしに紹介した. 4・3勃発時南労堂は ‘救国闘い’ ‘断線(単線)断定反対’ ‘統一独立’ などの政治性掛け声を叫んだ. 4・3は消滅危機に処した南労堂を求めるための旧党次元の闘いであって国家を求めるための救国闘いではなかったのだ. そしてスタリンの指令によって断線(単線)断定を先に行った方は北朝鮮側であり, UNによる統一政府樹立を拒否した方も北側だった.

-人命被害を人口減少を分析しなくて申告の 2倍で脹らました. 報告書作成時犠牲者申告数は 14,028人だったし, 死亡者は 15,000‾16,000人に推算された. それなのに済州4・3委員会は事件期間の中で人口感小分けを考慮して民間人死亡者は 25,000‾30,000ミョングラで主張した. 4・3委員会は人口減少の原因分析なしに事件の前・後の人口減少するのを人命被害で見做して犠牲者数を新まゆの 2倍で脹らました. これは道知事責任の下に行政力を総掛かりした住民申告を覆したのだ.

-不利な資料は不正, 縮小, 銀pHか逆に解釈して, 有利な資料は最大限活用した. 3勃発の前南労堂中央党の暴動指令が 3番(回)もあったのに暴動指令はなかったと指令説を否認した. ポックドングジリョングムンがある 1月 22日の捕獲文書, 2月 18日頃内道した異才復衣暴動指令, 陸地へ行ってから復帰して 3月 15日 ‘今度巨事に警備隊を最大限動員しなさい’と言う今年区の指示があった.

2.大統領謝り

キム・デジュンは 1998年 11月 23日全世界に生中継された CNNとのインタビューで “4・3は南労堂が起こした暴動”と言及した. それなのに 5年後の 2003年 10月 31日ノ・ムヒョンは真相報告書を根拠で南労堂側がほしいままにした反国家的行動や過ちは不問に付したまま国家公権力(軍・頃)の過ちに対してだけ道民と遺族たちに謝った.

軍と警察は国家の命令に従って公算反乱を押えたにも功績を認められ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し, 5・10選挙を邪魔して民主国家建国を沮止して, 済州に人民共和国を樹立しようとしたが殺された南労堂院たちの家族と子孫たちに軍・驚異無条件間違ったと公開発言したことは公権力である軍・頃を虐殺者で断定したのだ.

3.犠牲者名誉回復

犠牲者名誉回復と言う(のは) 4・3事件で死亡者が軍・敬意過剰鎭圧で悔しく死んだことを国家が公認するのだ. 事件の鎭圧過程で鎭圧君の間違いで罪のない良民が犠牲されることはできるがこれはあくまでも南労堂に入党しないとか公算武将台に加わらない者ではなければならない. ところで大統領の謝りを受け出すと 4・3委員会は特別法まで作って反乱に積極加担者で分類されて軍事裁判で無期懲役や死刑言い渡しを受けた者等まで犠牲者に認めて名誉回復をさせた. 特に死囚は大統領の裁可を受けた後に刑を執行したので大統領の決栽事項までも 4・3委員会が無效化させたわけだ. 民主国家建国を邪魔して共産国家建設を試みるとか積極同調した死囚と無期囚まで名誉回復をさせたことは明白な国家アイデンティティの毀損だ.

4.済州島教育機関での 4・3教育

済州島では 4・3報告書を参考して教育庁が発刊した教材を中心に小・の中で・高学生たちに 4・3に関して教育をさせている. ところで歴史を歪曲させた誤った教材を持って教育をしたら内容がそらぞらしい. 多分 4・3事件の時共産主義者たちの祈祷や蛮行は言及なしに軍と警察が無条件道民たちを殺したが, うちのお爺さんやお婆さんたちがその時死んだと教育するでしょう.

5. ‘4・3平和公園’での左翼理念教育

済州島ボンゲドンに国庫補助を受けて作られた平和公園があるのにその所の史料官は多くの資料たちを展示して映像物まで振ってくれているのに, 内容となると公算武将台の蛮行事実は反らしておいて軍・驚異良民を虐殺する場面のみを浮上させている. 言わば平和公園と言うのが左翼理念教育長で活用しているわけだ. 政府が国庫 6百億ウォンをかかって公園を作ったが, 済州島旅行客が主類である公園訪問者たちに左翼理念を教育していることは現在も進行中の国家アイデンティティ毀損だ.

6.その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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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의 쟁점

제주 4.3사건의 쟁점

2003년 10월 15일은 당시의 총리인 고건이 박원순이 주도한 ‘사실상의 4.3보고서 초안’을 날치기 식으로 통과시킨 날이다. 이에 의해 노무현이 대한민국 대통령 자격으로 제주도에서 희생당한 민간 사망자들에 대해 사과했다. 국가가 폭력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로써 폭동을 주도한 빨치산들까지도 무고한 희생자로 격상되고, 군경은 국가 폭력배가 되었다.

사망자들 가운데는 군인-경찰 그리고 그 가족들이 있었고, 서북청년단도 있었으며, 수많은 민간인들이 있었다. 민간인 사망자들 중에는 빨치산을 중심으로 하는 폭도도 있었고, 군경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도 있었고, 폭도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도 있었다. 이것이 2003년 10월 15일 이전까지 전해 내려온 정통사관이었다.

4.3사건은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빨치산이 일으켰으며, 이 사건을 주동한 김달삼과 그 뒤를 이은 이덕구는 지금 평양 애국렬사릉에 모셔져 있다. 북한이 발간한 대남공작사 “주체의 기치 따라 나아가는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에는 4.3사건이 이렇게 정리돼 있다. “4.3인민봉기는 반미 구국 투쟁이다”

1995년 중앙일보에 의해 발굴된 스티코프 비망록에 의하면 1946년 9월 좌익계열의「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全評)」가 주도한 9월 총파업 때 북한의 소군정이 2백만 엔을, 뒤이어 발생한 10월 1일 대구폭동 때는 3백만 엔의 자금을 지원했다. 이는 당시 남한정세에 소련이 깊숙이 개입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4.3사건 역시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 우리들의 직관일 것이다. 1995년 당시까지 좌파들은 전평의 1946년의 9월 파업 및 대구 10월 폭동에 조선공산당의 개입이 없었다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이런 좌파들의 허무맹랑한 주장은 스티코프 비망록에 의해 사라지고 없다.

박원순-고건이 주동한 제주4.3보고서 역시 허무맹랑한 주장을 담고 있다는 것이 제주4.3위원회에 참여했던 나종삼 전문위원, 한광덕 장군, 유재갑 교수, 김점곤 교수, 이황우 교수들의 주장이다. 그 허무맹랑한 주장이라는 것은 크게 두 가지라 한다. 하나는 제주사건이 당시 군경과 서북청년단(북이 말하는 테러 집단)이 제주도민을 부당하게 탄압한 데 대한 정당한 항거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주 사건이 남로당 지령을 받은 바 없이 제주도민들이 독자적으로 주도한 항쟁이라는 것이다.

과연 당시의 군경과 서북청년단이 특별히 멀리 제주도까지 건너가서 유독 제주도 도민만을 집중적으로 탄압-희생시킬만한 이유가 있었는지, 실제로 그렇게 탄압한 사실이 있는지를 살펴야 할 것이며, 과연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혀있는 제1대 및 제2대 주동자인 김달삼과 이덕구가 4.3사건을 남로당(조선공산당)의 개입 없이 단독으로 주도했는지, 그리고 4.3사건이 과연 미군정의 탄압에 반발한 항쟁인지 아니면 단독정부 수립을 방해하기 위한 무장폭동인지, 중점적으로 규명해야 하는 작업이 우리에게 부여돼 있다.

아래는 제주4.3위원회 나종삼 전문위원이 지적한 내용들이다.

1.잘못 기술된 진상보고서

진상조사보고서의 최우선과제는 4·3특별법에 명시된 바와 같이 진상규명이고 다음이 희생자 명예회복이이다. 그런데 보고서는 진상규명보다는 희생자 명예회복에 중점을 두었다. 4.3사건이 남로당의 지령에 의해 발발한 것이 아니라 주민이 경찰 및 서북청년단의 탄압에 항거하여 일어난 무장봉기라고 하면서 민중항쟁으로 유도했다. 따라서 4·3사건은 정의로운 의거이므로 4·3으로 인해 죽은 자는 모두 희생자라는 것이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고 나아가서는 최종목표인 보상까지를 내다보면서 다음과 같이 보고서를 기술하였다.

-사건은 단독선거를 저지하라는 남로당의 폭동지령과 제주도당의 조직수호를 위하여 일으켰는데도. 저들은 미군정의 단독선거 실시와 고문·치사사건 등을 거론하고 이에 맞서기 위하여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무장봉기했다고 규정했다.

하지만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은 소 군정이 먼저 실시했을 뿐만 아니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유엔에 의한 남·북총선을 소 군정이 반대했다. 남로당은 자체 양성한 유격대와 자위대를 동원하여 군사작전을 하듯 4월 3일 새벽 2시에 한라산의 봉화를 신호로 제주 전역에서 우익에 대해 테러를 자행하였다. 따라서 주민이 자연발생적으로 궐기했다는 주장은 맞지 않다. 4·3사건은 건국을 방해한 공산반란인데도 사실을 은폐-왜곡하고 남로당 측의 만행은 축소하고 군·경측의 잘못은 확대하여 남로당측에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사건을 무장봉기로 둔갑시켰다.

-사건의 성격은 폭동보다는 반란인데도 무장봉기로 기술했다. 이는 북한의 대남공작사가 규정한 그대로이다. 민중봉기나 민중항쟁으로 4.3사건을 규정한 것은 4.3사건이 반란이 아니라 의거라는 것이다.

-진상규명보고서는 남로당 지도자 박헌영과 소련군과의 관계를 은폐하였고, 4.3사건에 남노당이 개입한 사실을 은폐하고, 4.3사건이 경찰의 폭압과 행정의 문란 때문에 발생한 주민의 무장봉기라고 규정했다.

-사건을 지도한 올구의 존재를 은폐하였다. 사건을 지도한 인물은 제주도 출신 남로당 제주도당 인물이 아니라 남로당 전남도당과 중앙당에서 파견된 지도원이었다. 전남도당에서 파견한 올구(조직자)는 계획단계부터 개입하였고, 중앙당의 올구는 사건발발 이후에 개입하였다. 사건의 지도인물을 알면 종착역을 알 수 있는데도 올구의 존재를 은폐함으로써 사건이 단순한 주도내의 사건인 것으로 축소했다.

-남로당 측의 주민학살 사례는 축소하거나 은폐하고 군·경측의 사례는 과도하게 확대하였다. 피해신고 접수결과 토벌대(군·경·우익)에 의한 희생이 86%, 남로당 측에 의한 희생이 14%로 나왔으므로 이 비율로 사례를 소개해야 마땅함에도 본문에서 인용한 사례를 제외하고도 별도의 사례만 따져도 남로당측의 학살사례는 겨우 4쪽인 반면 토벌대측의 사례는 무려 130쪽을 할애하는 등 3%대 97%란 너무 편파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주민학살은 남로당측이 먼저 저질렀는데도 이를 지적하지 않고 있다. 남로당은 우익인사들을 납치하여 죽창으로 여러 차례나 찌르고 돌로 머리를 쳤으며, 일본도로 각을 떼거나 토막을 냈고, 심지어 팔다리에 말뚝을 박고, 철사를 항문으로 넣어 입으로 나오게 하거나 여인들을 집단 윤간한 후 일본도로 난자하고 생매장하기도 하였다. 제주출신 목사 1호인 이도종 목사도 생매장당했다. 그런데도 보고서는 이를 전연 기술하지 않고 군·경의 잘못만 반복적으로 기술하였는데, 이는 군·경이 무조건 주민을 학살했기 때문에 주민이 봉기했다고 주장하려는 의도 때문이다.

-남로당의 구호나 주장을 아무 비판 없이 소개하였다. 4·3발발 시 남로당은 ‘구국투쟁’ ‘단선단정 반대’ ‘통일독립’ 등의 정치성 구호를 외쳤다. 4·3은 소멸위기에 처한 남로당을 구하기 위한 구당차원의 투쟁이지 국가를 구하기 위한 구국투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타린의 지령에 따라 단선단정을 먼저 실행한 쪽은 북한측이며, 유엔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거부한 쪽도 북측이었다.

-인명피해를 인구감소를 분석하지도 않고 신고의 2배로 부풀렸다. 보고서 작성 시 희생자 신고 수는 14,028명이었고, 사망자는 15,000~16,000명으로 추산되었다. 그런데도 제주4·3위원회는 사건기간 중 인구감소분을 고려하여 민간인 사망자는 25,000~30,000명라고 주장하였다. 4·3위원회는 인구감소의 원인분석 없이 사건 전·후의 인구 감소치를 인명피해로 간주하여 희생자 수를 신고치의 2배로 부풀렸다. 이는 도지사 책임 하에 행정력을 총동원한 주민신고를 뒤집은 것이다.

-불리한 자료는 부정, 축소, 은페하거나 거꾸로 해석하고, 유리한 자료는 최대한 활용했다. 3발발 전 남로당 중앙당의 폭동지령이 3번이나 있었는데도 폭동지령은 없었다고 지령설을 부인했다. 폭동지령문이 있는 1월 22일의 노획문서, 2월 18일경 내도한 이재복의 폭동지령, 육지에 갔다가 복귀하여 3월 15일 ‘이번 거사에 경비대를 최대한 동원하라’는 올구의 지시가 있었다.

2.대통령 사과

김대중은 1998년 11월 23일 전 세계에 생중계된 CNN과의 인터뷰에서 “4·3은 남로당이 일으킨 폭동”이라고 언급했다. 그런데도 5년 후인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은 진상보고서를 근거로 남로당측이 자행한 반국가적 행동이나 잘못은 덮어둔 채 국가공권력(군·경)의 잘못에 대해서만 도민과 유족들에게 사과했다.

군과 경찰은 국가의 명령에 따라 공산반란을 진압했음에도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고, 5·10선거를 방해하여 민주국가 건국을 저지하고, 제주에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려다가 죽임을 당한 남로당원들의 가족과 후손들에게 군·경이 무조건 잘못했다고 공개 발언한 것은 공권력인 군·경을 학살자로 단정한 것이다.

3.희생자 명예회복

희생자 명예회복이란 4·3사건으로 죽은자가 군·경의 과잉진압으로 억울하게 죽었음을 국가가 공인하는 것이다. 사건의 진압과정에서 진압군의 실수로 무고한 양민이 희생될 수는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남로당에 입당하지 않거나 공산무장대에 가담하지 않은 자여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의 사과를 받아내자 4·3위원회는 특별법까지 만들어 반란에 적극 가담자로 분류되어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이나 사형언도를 받은 자들까지 희생자로 인정하어 명예회복을 시켰다. 특히 사형수는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후에 형을 집행했으므로 대통령의 결재사항까지도 4·3위원회가 무효화시킨 셈이다. 민주국가 건국을 방해하고 공산국가 건설을 시도하거나 적극 동조한 사형수와 무기수까지 명예회복을 시킨 것은 명백한 국가정체성의 훼손이다.

4.제주도 교육기관에서의 4·3교육

제주도에서는 4·3보고서를 참고하여 교육청이 발간한 교재를 중심으로 초·중·고 학생들에게 4·3에 관하여 교육을 시키고 있다. 그런데 역사를 왜곡시킨 잘못된 교재를 가지고 교육을 하니 내용이 뻔하다. 아마 4·3사건시 공산주의자들의 기도나 만행은 언급 없이 군과 경찰이 무조건 도민들을 죽였는데, 우리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그 때 죽었다고 교육할 것이다.

5. ‘4·3평화공원’에서의 좌익 이념교육

제주도 봉개동에 국고보조를 받아 만들어진 평화공원이 있는데 그곳의 사료관은 여러 자료들을 전시하고 영상물까지 틀어주고 있는데, 내용인즉 공산무장대의 만행사실은 젖혀두고 군·경이 양민을 학살하는 장면만을 부각시키고 있다. 말하자면 평화공원이란게 좌익이념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셈이다. 정부가 국고 6백억원을 들여 공원을 만들었는데, 제주도 여행객이 주류인 공원방문객들에게 좌익이념을 교육하고 있는 것은 현재도 진행 중인 국가정체성 훼손이다.

6.기타

①남로당의 반란일인 4월 3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을 기도하고 있다. 대한민국 건국을 저지하려 했던 날을 대한민국에서 기념일로 지정하다니 언제 대한민국이 공산국가가 되었나? 이는 북한의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해야 할 일인데, 이를 우리가 대신해주고 있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다

②민간인 피해보상액으로 2조 6,000억여원을 국회에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4·3위원회에서 희생자로 결정한 13,500여명에게 1인당 2억원 씩 계산한 모양인데, 그 안에는 골수 공산주의자로 군·경과 전투를 하다가 전사했거나 사형수와 무기수까지 들어있으므로 이는 말도 되지 않는다. 희생자 심사를 몇 사람이 비밀로 했는데, 희생자에게 보상이 꼭 필요하다면 심사서류를 공개하고 개인별로 사법부에 의해 재심을 받아야 한다.

법관이 아닌 민간인이 검증받지 못한 자료를 근거로 사법부의 재판결과까지를 멋대로 뒤집어 공산주의자나 군·경에 맞선 자까지 희생자로 만들었으므로, 그들에게 2억원씩을 국민의 세금으로 보상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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