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 식민지 시절 일본인이 저지른 악행은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가지가지 여러가지를 여러 경로를 통해서 접했겠지만 이 책에 나오는 특징적인 부분만 소개한다. 책 자체 당시 일본인들의 생활상에 대한 것이다 보니 당시 조선 내 일본인들의 직업과 관련된 부분들이 많다.
일본인들이 정착 초기부터 패전 이후 조선을 떠나기까지 가장 많이 종사했던 일이 고리대금업과 도매업이라고 한다. 조선 내 일본인의 주요 경제 수단이었다. 일본인들의 고리대금업은 심하게는 10일에 1할이라는 이자를 매기기도 했다. (단리이자라고 해도 1년이면 3600%) 이들의 고리대금업의 주요 목적은 높은 이자를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돈을 빌릴 때 담보로 제공한 토지를 빼앗는 것이었다.
고리대금업자들은 조선인이 돈을 갚으러 오면 일부러 집을 비워서 돈을 갚을 수 없도록 만들었고 결국 이자가 늘어나 갚기 어렵게 만들기도 했다. 빚을 잘 갚지 못하면 조선인의 집의 문을 못으로 박아서 드나들지 못하게 했는데 이 방법이 금지되자 나중에는 자기 집에 감옥을 만들어서 빚을 갚지 못한 조선인을 가두고 친구나 친척이 빚을 갚은 후에야 풀어주었다.
참고자료 "종군위안부자료집"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 침략 등 일본이 전쟁을 이어나가면서 어린이와 여성들이 "위안부" 등으로 강제로 동원되기도 했다. 이것이 조선인에 의한 자발적인 상업 행위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바로 뉴라이트의 수장 "안병직"이 그렇다. 그는 한나라당의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이기도 하다.) 일본인의 저작에서도 당시 위안부가 취업을 빙자한 사기였거나 강제 납치였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사진 속 참고자료)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에 가담한 자들은 수십 명에 달했다. 이들이 일본으로 송환되자 한성의 일본 거류민 대표 유지들이 송별 연회 베풀고 주모자들을 개선장군처럼 받들었다.
일본인 상인들은 조선인을 멸시하고 신용을 중히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하도 상인들이 문제가 많다보니 부산의 일본 영사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많은 일본 상인들이 지나인(중국 상인)을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는 이러한 뽐내고 건방진 기풍 때문이라"고 보고했다. 일본 상인들은 어음도 종종 부도처리가 되어 조선인들의 일본 상인에 대한 신용은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토지 측량을 해서 조선의 토지를 조사할 때 측량 기사들은 일본 사람들이었다. 조선인의 땅과 경계를 접한 땅을 가진 일본인들은 측량 기사에게 한턱 낼테니 측량을 유리하게 조작해달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하도 많아 측량 기사도 기가막힐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