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도공 이삼평
일본 도자기 시조로 열렬히 추앙
일본 규슈의 사가(佐賀)현 아리타(有田)는 일본에서 "도자기의 고향"으로 불린다. 인구 1만4천여명에 불과한 작은 산골마을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4키로미터 길 양쪽에는 무려 650곳에 이르는 도자기 전문점이 줄지어 있다. 이곳의 가마는 200채 가까이 되고 5월 도자기 축제 때에는 전국에서 20여만명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다.

일본 근세 도자기를 대표하는 아리타 도자기는 17~18세기 유럽에 수출되어 유럽 자기에 큰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국제적인 명성도 높다.
이처럼 화려한 아리타 도자기의 명성 이면에는 망향의 한을 달래며 흙과 불과 씨름하며 도자기를 구워낸 조선 도공들의 혼과 땀이 자리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강제로 끌려왔던 수백명의 조선도공이 아리타에 정착하여 가마를 열고 자기를 굽기 시작한 것이 "일본 도자기"의 시발점이 된 것.
△무차별적인 조선 도공 연행=임진왜란시 조선에 출정한 일본의 다이묘(大名·지역 영주)들은 조선 도공들을 붙잡아 가는데 열을 올렸다.
무로마치(室町) 시대 일본에서는 다도가 성행함에 따라 조선에서 수입되는 다기가 큰 인기를 얻었기 때문에 조선 도공들은 일본군의 표적이 되었다.
다이묘들은 뛰어난 도공들을 수백명씩 데려와 각자의 영토 내에 가마를 열고 특색있는 도기를 만들어 내도록 했다.
조선 도공들이 가져온 발 물레와 가마 제작기술을 통해 일본 도자기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고 엄청난 경제적 효과를 창출했다.
에도(江戶) 시대 중기에는 나가사키항을 통하여 서양에 수출되어 유럽 귀족들을 매료시키기에 이르렀다. 기록에 따르면 1653년부터 100년간 유럽으로 수출된 아리타 도자기는 100만점을 넘었을 정도의 번성기를 구가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규슈 출신이 주력이었고 그들이 조선도공을 무더기로 데려온 탓에 규슈의 유명한 도자기 산지는 모두 조선도공들이 시작한 가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본에서는 도자기를 구워낸 곳이라는 의미로 도자기 산지를 야키(燒)로 칭하는데 지명과 함께 불러 도자기를 구분하고 있다.
예컨대 아리타 도자기는 "아리타 야키"로,역시 사가현의 가라쓰(唐津)에서 구워낸 것은 "가라쓰 야키"로 부른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도공 심수관은 "사쓰마(薩摩) 야키" 계열이다.
현재 이들 지역에는 아직도 자신을 조선도공 아무개의 12~14대라고 스스로 칭하는 조선 도공의 후예들을 만날 수 있다.
△추앙받는 도조(陶祖) 이삼평=조선도공 중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아리타에 정착한 이삼평(李參平)이다.
1594년 혹은 1596년께 일본에 끌려간 그는 1616년 아리타의 이즈미산(泉山)에서 자기를 굽기에 알맞은 백자광을 발견하여 시라카와텐구(白川天狗) 계곡 부근에 가마를 짓고 정착했다. 그의 휘하에는 조선도공 155명이 있었다. 그들은 아리타에서 처음으로 자기를 굽기 시작했다.
이삼평에 의해 표면이 거친 도기가 감촉이 매끈한 자기로 발전하게 된 것은 일본 도자기에 있어 실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처음 아리타 야키에는 조선의 문양이 그대로 사용되었다가 나중 가키에몽 등 3가지 고유 양식으로 발전되는데 이로써 일본을 대표하는 도자기의 지위를 굳히게 된다. 특히 가키에몽 양식은 일본 황실에 독점 공급될 정도로 그 품질을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이삼평에 대한 아리타 사람들의 존경심은 각별하여 그를 도조(陶祖)로 우러르는 것도 모자라 신격화하여 모실 정도다. 아리타의 도산(陶山)신사는 천황·다이묘와 나란히 이삼평을 모시고 그를 추앙하고 있다.
신사 뒤편의 산 정상에는 "도조 이삼평비"라고 새겨진 큰 기념비가 있다.
아리타 사람들은 이 석비 뒷면에 이삼평을 "大恩人"이라고 적고 있다. 석비 건립시기는 일제 식민지 시대인 1917년. 당시 조선 멸시 분위기를 감안해 보면 아리타 사람들이 얼마나 이삼평을 우러르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아리타 사람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지난 1990년 이삼평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충남 공주 계룡산국립공원 입구에 기념비를 건립했다. 기념비에는 "보은과 감사의 뜻을 다하고 국제친선과 문화교류의 상징"으로서 건립했다고 취지를 새겼다.
이삼평은 일본에 강제로 끌려왔으나 일본에서 찬란한 도자기 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는 일본 호적을 갖고 일본 도공으로서 죽어갔고 그의 자손은 지금 14대까지 내려오고 있다.
물론 역사의 굴절에 안타까움이 없지 않지만 이삼평을 통해 조선도공의 삶과 업적이 기억되고 국적을 초월해 추앙되고 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왜국 스스로 도자기를 만들 수 없어 이런 犬밥 그릇을 훔치다..
임진 왜란 때 조선 도공을 납치한 후 왜국 정석의 도자기 만들어 냈다..
심수관-앞일본의 한국계 도예가. 일본에 끌려와 사쓰마도기를 만든 심당길의 14대손이다. 가문을 이어 일본 도예계를 주도했으며, 한국 명예총영사를 지내기도 했다.
1598년 일본에 끌려와 박평의(朴平意)와 함께 사쓰마도기[薩摩燒]를 연 심당길(沈當吉)의 14대손이다.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 졸업 후 한때 정치에 뜻을 두어 국회의원의 비서로 일하기도 했으나, 부친의 병으로 낙향, 도예수업을 쌓았다. 1946년 13대 심수관(沈壽官)이 죽자, 14대 심수관을 습명(襲名:선대의 이름을 계승함)하였다. 그 후 도자기 제작에 힘써 일본 도예계를 이끌었으며, 1989년 한국 명예총영사가 되었다. 특히 심수관가(家)는 한국성을 고집하며 400여 년 간 가업을 계승해오고 있는 사쓰마도기의 종가로 유명하다.
히바카리: 히바카리는 심수관家의 一代가 만든 다기로 유일한 작품이다.
히바카리는 심수관家의 一代의 남아있는 유일한 작품이다.
히바카리란 , 즉 흙도 유약도 조선의 것이고,
이것을 빚은 사람도 조선의 도공인데, 오직 이것을 구워낸 불만
일본의것 이라 하여 히바카리로 부르게 돼었다고 한다.
즉, 왜국 정수의 도자기 문화나 다도 문화도
한국으로 부터 훔친 문화라고 하는 것..
이삼평에 의해 표면이 거친 도기가 감촉이 매끈한 자기로 발전하게 된 것은 일본 도자기에 있어 실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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