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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집행을 기다리면서 쓴 從北세력 앞 경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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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혁명당 김질락 手記: "어떠한 공산주의자도 숟가락을 가지고 밥을 떠먹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가지고 밥을 퍼먹는 것은 아니다."趙甲濟     
  
  북한정권이 1960년대 후반 남한에 구축한 地下黨(지하당)인 통일혁명당의 창당멤버중 한 사람인 김질락은 사형집행을 기다리면서 獄中(옥중)에서 手記(수기. 原제목 "주암산")를 썼다. 수기의 해설에 따르면 그는 1934년 영천에서 출생하였다. 1965년 11월 초 김종태, 이문규와 함께 지하당의 창당 발기인이 되었다. 그는 1967년 5월엔 월북하여 북한노동당에 가입한 후 23일간 교육을 받고 돌아왔다. 1968년 정보부에 검거되었고, 7.4 남북 공동성명 직후인 1972년 7월15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手記는 슬프다. 그는 자신을 인생 낙오병이라면서 이 글을 碑文(비문)이라 하였다. <영영 되찾을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을, 영원히 매장해버리려는 나의 이 작업에 대해 산 자들을 나를 고발할 것이요, 죽은 자들은 나를 증언할 것이다>는 머리글부터가 처연하다. 사형을 기다리면서 獄中(옥중)에서 쓴 이 글이 얼마나 자유의지를 반영하고 있는지 검증할 방법은 없다. 이 글을 쓰도록 허용한 당국의 뜻이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글을 읽고 나면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오늘에 더욱 가치 있는 자료라는 생각이 든다. 반공국가에서 反국가단체인 북한정권의 지령을 받아가면서 숨어서 지하당을 만들고 목숨을 건 월북을 하고 거기서 공화국에 환멸을 느껴간 과정에서 웃음이나 밝은 면을 찾기는 불가능하다. 그는 이념전선의 뒤안길에서 보낸 너무나 절박하였던 삶을 너무나 성실하게 써놓았다. 아름다운 서울에서 자유와 번영을 누리면서 살고 있는 필자로선 ‘나의 시작은 나의 끝이었다’는 머리말의 제목부터 읽어 내려가기가 부담스러웠다. 
  
  특히 김질락씨의 따님인 김수아씨가 아버지의 머리글 뒤에 붙인 ‘아버지 나라도 지금 꽃이 피나요’란 글은 너무 슬퍼 아름다운 글이다. 
  <봄에 왔을 때는 아버지를 만난다는 기쁨이 있었는데 왠지 그날은 무섭고 답답했습니다. 구치소 앞마당의 비에 젖은 새까만 삼륜차를 보면서 벌써 눈물을 흘렸답니다. 그 삼륜차 안에는 棺(관)이 있었습니다. 멍석이 씌워져 빗발을 가리고 있던 아버지의 관. 하얀 바지저고리 차림의 아버지가 아니라 숨이 끊어진 屍身(시신)으로의 아버지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김수아씨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은 이 책에 溫氣(온기)를 준다. 그는 <아버지의 사상과 행동은 뒤로 하고서도 우리에게 주지 못한 아버지의 행복은 결코 값싸게 흥정하여 사들일 수도 없고 맛보고 싶은 때 마음대로 맛 볼 수도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답니다>라면서 이렇게 다짐하였다. 
  <수아에게는 아직도 많은 날들이 주어져 있고 지난날의 상실은 오히려 소중하고 정성스럽게 가꾸어, 뼈를 주신 아버지의 薰氣(훈기)를 잃지 않으려합니다.>
  
  이 책은 김질락을 죽음의 길로 포섭해간 통일혁명당 사건의 주범 金鍾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는 나의 셋째 삼촌이었다. 아버지의 5형제, 7남매 가운데 다섯째, 끝에서 둘째였다. 나보다는 여덟 살 손위인 삼촌이었고 맏이인 아버지보다는 열여덟 살이나 아래인 셋째 동생이었다.>
  김질락은 手記(수기)를 통하여 김종태의 인간됨을 많이 비판한다. 달변가, 자만가, 영웅심의 소유자라고 평했다. 日帝(일제)시절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가 공부를 하고 돌아와선 1946년 10.1 대구좌익폭동에 연루되어 한동안 고향에서 종적을 감춘 적도 있다고 했다. 동국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김종태는 仲兄(중형)인 김상도가 자유당 국회의원이 되자 그의 비서로서 정치에 입문하였다. 김질락은 이 활동가 삼촌의 영향권 안에 흡입되어간 사정을 설명하면서 <나에게 있어 그는 베어버릴 수 없는 그림자 같았고, 말할 수 없는 정신적 부담이었다>고 썼다. 
  김종태는 법과대학을 지망하는 조카를 위협하여 정치학과로 진학하도록 했고, 선거 때마다 청년조직을 맡게 하였으며, 득표율이 가장 낮은 지역에 배치, 골탕을 먹였다고 한다. 책을 읽어 가면, 김질락은 좀 心弱(심약)한 사람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집안의 최고 엘리트인 김종태의 권위에 눌려 내키지 않으면서도 그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으리란 느낌이다. 
  <우리 사회의 대가족 제도가 얼마나 큰 결점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해서 나는 나 자신의 경우를 본보기로 내세우고 싶다. 어떤 짓궂은 사람이 있어 나한테 굳이 변명하기를 권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의 시작은 나의 끝이었다’(My beginning is my end)라고.>
  
  
  그가 삼촌에게 포섭되어 통일혁명당에 연루되는 과정은 아마 요사이도 나라 한 구석에서 일어나고 있을 전형적인 사례이다. 人情(인정)으로 인간관계를 만든 뒤 이념적으로 설득해가다가 결정적 순간에 선택을 강요하는 좌익들의 수법은 지금도 되풀이되고 있을 것이다. 김질락은 김종태에게 먼저 포섭된 양춘우가 자신을 설득하는 상황을 이렇게 썼다. 
  <그는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자신이 걸어온 기구한 인생에 대해 말하면서 그와 그의 가족의 가난이 모두 국가의 책임이며, 그 궁극적인 요인은 모순된 제도에 있고, 이 모순이 제거되지 않는 한 밝은 앞날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스톤이 쓴 《A Hidden History of Korean War》의 일역판 《조선전쟁비사》를 인용하여 6ㆍ25는 북괴가 먼저 침략한 것이 아니라 한국이 먼저 쳐들어갔다고 우겼으며, 김일성이 진짜 김일성으로서 항일전쟁의 투쟁경력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핏대를 올렸다. 또한 박헌영이 미국의 간첩이었음이 사실이라는 등 실로 허망 된 얘기를 마구 털어놓았다.
  일부 불쌍한 지식인들 가운데는 자기의 두뇌를 필요 이상으로 과신한 나머지 남보다 그것을 곧 자기의 것으로 흡수하고 그것은 곧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라고 맹신 또는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북괴간첩들이 내세우는 선전내용은 ① 6ㆍ25 침공의 부인 ② 박헌영의 간첩설 ③ 김일성 항일빨치산 투쟁사의 정당화 ④ 계급의식의 고취 ⑤ 反정부 투쟁에 대한 고무찬양 ⑥ 반미사상의 고취 등이다.>
  김종태는 통일혁명당을 만들 때 북한의 지령을 받고 있었지만 순진한 동조자에겐 ‘동등한 관계의 형제당’이라고 속였다. 
  “그 점에 대해선 조금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정당의 목적과 성격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바이고 이북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한다면 우리가 하고자 하는 당은 이북의 노동당과는 대등한 위치에 있는 형제당의 관계에 있는 겁니다. 우리 당은 비단 이북의 노동당만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공산당과도 형제당이 되는 것이며 국제공산당의 일원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북한노동당에 의하여 滅絶(멸절)된 남로당의 운명이 보여주듯이 남한의 從北세력은 절대로 북한정권에 대하여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없다. 이는 힘의 원리이고, 권력의 법칙이다. 
  
  김질락은 평양에 가서 들은 이야기를 이렇게 전한다. 
  <내가 평양에 갔을 때만 해도 노동당 간부들은 인혁당이 어떻게 해서 노출되었는가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들이 역대 민비(민족주의 비교연구회) 회장들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확인하고 3ㆍ24에서 6ㆍ3에 이르는 국내혼란이 북괴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는 확증을 나는 얻고 있었다. 통혁당에 관련하고 평양을 다녀온 후에야 나는 6ㆍ3사태의 진상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있었고, 그 시점에서 한일회담은 불가피했었다는 것이 비로소 납득이 갔다. 또한 북괴의 상황과 대조하여 한국의 좌표를 보다 정확하게 내다볼 수 있게 되었고, 국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 5ㆍ16혁명은 역사적인 필연의 논리였다는데 전적으로 수긍이 갔다. 만일 4ㆍ19 직후의 혼란기가 좀 더 계속되었더라면 한국은 오늘의 성장과 번영을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조차 없다. 뒷날 알게 된 일이지만 종태 삼촌은 인혁당의 주요 인물들을 자기 산하에 거두려고 애썼고, 인혁당은 인혁당대로 종태 삼촌을 이용하려 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서로들 반목하여 공작 일반의 수법에 있어서 각자 우월하다는 등의 논란이 있었다는 넌센스가 있다.>
  <6ㆍ25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책들이 충실한 자료를 근거하여 북괴의 남침이 국제적으로 공인된 기정사실임을 증언하고 있지만 나는 단 한마디로 6ㆍ25사변이 북괴의 불법남침에 의한 것임을 증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북괴가 6ㆍ25사변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하는 語感(어감) 자체가 이미 전쟁도발을 의미하고 있음은 바보가 아닌 이상 금방 느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평양에 있는 북괴의 혁명박물관이란 데를 들어가 보면 6ㆍ25에 대한 김일성의 5단계 전략은 사전에 이미 계획된 것으로 첫 남침에서부터 패주해서 후퇴한 사실까지 모두 그의 탁월한 전략에 의하여 성공적으로 완수된 것으로 자랑하고 있다. 그들 자신이 침략자였음을 노골적으로 시인하는 것 이외의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
  
  
  김질락의 수기를 읽으면 온통 이념과 관념 이야기이다. 그런데 결국은 이런 것들의 귀착점이 인간의 먹고 사는 문제란 고백을 스스로 하고 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공산당의 공식적인 회합이나 선전, 선동의 슬로건으로 많이 사용되지만 어떠한 공산주의자도 숟가락을 가지고 밥을 떠먹지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가지고 밥을 퍼먹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마르크스나 엥겔스, 그리고 레닌이나 모택동을 자나 깨나 주워섬기지만 그들이 실제로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사고나 언동은 인간의 본래적인 습성과 인간생활의 인습에서 결코 한 치도 더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여기 이북에서 남파된 무장간첩이 있다고 하자. 그가 생각하는 것은 조국통일이나 김일성의 문제가 아니다. 그는 지금 생사의 기로에서 자신의 생명을 방위하기에 온갖 본능적인 지혜와 교육에 의한 후천적 경험을 총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때 당과 사상을 떠나 있으며, 그를 얽어매고 있는 당의 유일한 끄나풀은 이북에 두고 온 부모와 처자에 대한 가련하고 애절한 미련뿐인 것이다.>
  
  김질락의 手記(수기)엔 당시 서울상대를 졸업하고 숙명여대 강사로 있던 신영복씨를 포섭해가는 과정이 자세히 실려 있다. 신영복씨가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장기복역을 하고 나온 뒤 유명인사가 되었기에 더 흥미롭게 읽었다. 
  이 책의 主무대는 음습한 폐쇄공간이다. 邪敎(사교)집단과 공산당의 공통점이 있다. 인간을 폐쇄공간으로 몰아넣고 오직 한 사람(또는 하나의 조직)을 숭배하도록 집중적으로 교육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꽉 막힌 상황에 몰려서 비교대상이 없으면 교육 받은 대로 한 점을 향하여 몰입, 몰두하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은 한번 들면 놓기 힘들다. 다가오는 죽음의 발자국 소리를 느끼면서 써내려간 心情(심정)이 전해 오기 때문이다. 生을 걸고 증언한 책의 밀도가 대단하다. 김질락씨는 상당한 문학적 재능까지 보여준다. 
  <나는 나의 사망을 매장해버리는 데 그치지 않고 나의 사망을 증거로 북괴를 고발하고 북괴로 말미암아 무서운 죽음의 길을 헤매고 있는 모든 가엾은 사람들에게 나를 증거하여 경고한다.>
  통일혁명당의 후예들인 오늘의 從北좌익세력에 보내는 충고로 들린다. 이 수기를 내게 된 경위를 설명하면서 편집자는 편집실을 찾은 김질락씨 부인의 한 마디를 소개하였다. 
  “남편은 계속 서대문 구치소에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요즘도 아무리 서쪽 노을이 아름답다 해도 보고 싶지 않아요.”
  편집자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떠나는 사람은 魂의 무게이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몸과 혼, 온몸으로 지탱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썼다. 이념적으로 완전히 轉向하였고, 집행도 미뤄져 온 김질락을 7.4 공동성명 직후에 교수형에 처하게 된 정치적 배경에 대하여는 별도의 조사가 필요하겠다. 이 수기는, 38세에 죽은 김질락이 미리 써놓은 자신의 碑文(비문)이자 통일혁명당의 후예들인 오늘의 종북세력 앞으로 남긴 경고장이기도 할 것이다.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40957&C_CC=A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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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刑執行を待ちながら使った 従北勢力前警告場

統一革命党ギムジルラック 手記: どんな共産主義者もさじを持ってご飯をすくって食べるのマルクスレーニン主義を持ってご飯をよそって食べることではない.趙甲済     
  
  北朝鮮政権が 1960年代後半南韓に構築した 地下党(地下だ)である統一革命党の創党メンバー中一人であるギムジルラックは死刑執行を待ちながら 獄中(獄中)から 手記(手記. 原題目 ¥"住岩山¥")を書いた. 手記の解説によれば彼は 1934年霊泉で出生した. 1965年 11月初ギムゾングテ, イムンギュとともに地下当たりの創党発起人になった. 彼は 1967年 5月には越北して北朝鮮労動党に加入した後 23日間教育を受けて帰って来た. 1968年情報部に検挙されたし, 7.4 南北共同声明直後の 1972年 7月15日に死刑が執行された. 
  手記は悲しい. 彼は自分を人生落伍病だと言いながらこの文を 碑文(碑文)といった. <永久に取り戻すことができないそのすべてのものなどを, 永遠に埋葬してしまおうとする私のこの作業に対して住んだ者等を私を告発することであり, 死んだ者等は私を証言するでしょう>はまえがきからが哀れだ. 死刑を待ちながら 獄中(獄中)で書いたこの文がいくら自由意志を反映しているのか検証する方法はない. この文を書くように許容した政府の意味が敷かれているかも知れない. 
  それでもこの文を読み上げれば胸が息苦しくなりながら今日にもっと価値のある資料という気がする. 反共国家で 反国家団体である北朝鮮政権の指令をもらって行きながら隠れて地下当たりを作って命をかけた越北をしてそこで共和国に幻滅を感じて行った過程で笑いや明るい面を尋ねることは不可能だ. 彼は理念電線の裏街道で過ごしたあまりにも切迫した生をあまりにもまじめに書いておいた. 美しいソウルで自由と繁栄を享受しながら暮している筆者としては ‘私の手始めは私の終りだった’は端書きの題目から読み下して行くのが負担だった. 
  
  特にギムジルラックシのお嬢様である金数お嬢さんがお父さんのまえがき後に付けた ‘お父さん生えるも今花が骨折ります’と言う(のは)文はとても悲しくて美しい文だ. 
  <春に来た時はお父さんに会うという喜びがあったがなんだかその日は恐ろしくて息苦しかったです. 拘置所前庭の雨に濡れた真っ黒な三輪車を見ながらもう涙を流したんです. その三輪車の中には 棺(管)がありました. むしろが着せられて雨脚を選り分けていたお父さんの管. 白い羽織袴身なりのお父さんではなく息が切れた 屍身(死体)でのお父さんがその所にありました.>
  金数お嬢さんのお父さんに対する思い出と懐かしさはこの本に 温気(温もり)を与える. 彼は <お父さんの思想と行動は後にしてからも私たちに与え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お父さんの幸せは決して安っぽく掛け合って仕こむこともできなくて味わいたい時わがまま味わうこともできないということを今は甘くないです>ラーメンからこんなに念をおした. 
  <スアにはまだ多い日々が与えられていて先日の喪失はむしろ大事で念入りに作って, 骨をくださったお父さんの 薫気(人いきれ)を失わアンウリョします.>
  
  この本はギムジルラックを死の道でポソブヘガン統一革命党事件の主犯 金鍾泰に対する話で始まる. 
  <彼は私の三番目叔父だった. お父さんの 5兄弟, 7兄と妹の中五番目, 終りで二番目だった. 私よりは八歳目上である叔父だったし上の子であるお父さんよりは十八歳や下である三番目弟(妹)だった.>
  ギムジルラックは 手記(手記)を通じて金種胎衣人間されることをたくさん批判する. 口逹者, ザマンが, 英雄心の持ち主と評した. 日帝(日製)時代単身で日本に渡って勉強をして帰って来ては 1946年 10.1 大邱左翼暴動に掛かり合ってしばらく故郷で足跡を隠したこともあると言った. 東国大経済学科を卒業したギムゾングテは 仲兄(重刑)である金常道が自由党国会議員になると彼の秘書として政治に入門した. ギムジルラックはこの活動家叔父の影響圏中にフブイブドエオガン事情を説明しながら <私において彼は切り取ってしまうことができない影みたいだったし, 言えない精神的負担だった>その書いた. 
  ギムゾングテは法科大学を志望する甥を脅威して政治学科に進学するようにしたし, 選挙の毎に青年組職を引き受けるようにしたし, 得票率が一番低い地域に配置, 背負い投げを食べさせたと言う. 本を読んで仮面, ギムジルラックはちょっと 心弱(心弱)一人ではなかったか推測される. 家の最高エリートである金種胎衣権威に押されて気が向かないながらも彼に付いて行かない数オブオッウリと言う(のは)感じだ. 
  <私たちの社会の大家族制度がいくら大きい欠点を持っているのかに対して私は私自分の場合を見習うことに立てたい. どんな皮肉な人がいて私に敢えて弁解するのを勧めたら私はこんなに言うでしょう. ‘私の手始めは私の終りだった’(My beginning is my end)と.>
  
  
  彼が叔父に包攝されて統一革命党に掛かり合う過程は多分このごろも国一隅で起きている典型的な事例だ. 人情(認定)でヒューマンリレーションズを作った後理念的に説得してから決定的瞬間に選択を強要する左翼たちの手法は今も繰り返されているでしょう. ギムジルラックはギムゾングテに先に包攝された陽春優が自分を説得する状況をこんなに使った. 
  <彼は出て話を取り交わす時自分が歩いて来た数奇な人生に対して言いながら彼と彼の家族の貧乏が皆国家の責任であり, その窮極的な要因は矛盾した制度にあって, この矛盾が除去されない限り明るい未来は期待することができないというのだった. 彼はストンが書いた 《A Hidden History of Korean War》の和訳版 《朝鮮戦争秘史》を引用して 6・25は北傀儡が先に侵略したのではなく韓国が先に攻めこんだと言い張ったし, 金日成が本当の金日成として抗日戦争の闘い経歴は否認することができない事実だと青筋をあげた. また朴憲永がアメリカのガンチォブイオッウムが事実というなど実に虚妄になった話をでたらめに打ち明けた.
  一部可哀相な知識人たちの中では自分の頭脳を必要以上に過信したあげく人よりそれをすなわち自分の物で吸収してそれはすぐ誰も否認することができない真理だと盲信または固執するきらいがある. 一般的に北傀儡スパイたちが立てる宣伝内容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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