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국시대 교육기관
삼국시대에 중국 漢代의 유교가 전래됨에 따라 儒學이념의 정치제도와 유교 교육을 위한 교육기관이 설립되었습니다 삼국이 중앙집권적 체제의
古代국가로 성장하면서 교육이나 정치제도에 불교와 함께 유교가 受容되었습니다
1) 고구려
○.태학(太學)
고구려 372년(小獸林王2년)에 인재 양성을 위한 태학이 설립되었습니다 고구려의 태학은 기록으로 한국 최초 국립대학입니다
○.경당(扃堂)
태학이 귀족의 학교인 것에 비해 扃堂은 평민의 자녀가 입학할 수 있는 교육기관으로 추측합니다
<新唐書>에 의하면 고구려 사람들은 학문을 좋아하여 가난한 마을의 사람들도 학문에 힘써 권하며 큰 길가에 장엄한 집을 짓고 扃堂이라고
하였다 扃當의 학생들은 미혼이며 미천한 집안 출신도 포함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扃當에서는 유교 경전이나 활쏘기 등을
가르쳤습니다
2)백제
○.박사제도(博士制度)
백제의 <박사제도>는 近肖古王 (재위 346년~375년) 때에 儒學에 정통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실시되었습니다
○.일본에 유학(儒學)을 傳播하다
백제는 주역 시경 서경 예기 춘추의 유교경전에 능통하면 五經博士라는 칭호를 주었는데 五經博士를 일본에 파견하여 儒學을 전했습니다
武寧王 때는 五經博士,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를 일본에 보내어 儒學을 전했고 聖王때는 五經薄士 왕유귀 (王柳貴)를 일본에 보내어
儒學을 전했습니다
3) 신라
○. 화랑도 정신 世俗五戒
진평왕 (재위 567년~632년)때에 加悉寺에 머무르고 있던 원광법사(圓光法師)에게 貴山 箒項이라는 2명의 소년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세속의 선비가 어리석어 아는 바가 없으니 한 말씀 가르쳐 주면 일생의 교훈으로 삼겠습니다”
圓光法師가 답하기를”지금 세속에 알맞은 5戒가 있으니 ,事君以忠 事親以孝 交友以信 臨戰無退. 殺生有擇이다 라고 가르쳤습니다 이 세속오계는
화랑도의 지침으로 알려져 있는데 세속오계에는 불교와 유교적 이념이 있습니다
2. 통일 신라시대
○. 국학(國學)
신라시대 682년( 神文王2년)에 儒學교육을 위해 국학을 설립합니다 唐나라의 國子監을 참고하여 국학을 설립했습니다 국학의 입학 자격은
<大舍>이하 관등(官等)의 사람이나 官等이 없는 평민까지 자격이 되었으나 현실은 주로 六頭品 以上 子弟들이 입학했고 연령 제한은 15세에서
30세까지 입니다
<大舍>는 신라의 17官等 중에 12등급을 말합니다 신라의 17관등에서는 숫자가 크면 클수록 신분은 낮습니다 학업 기간은 9년이며 과목은 논어
효경(孝經) 예기( 禮記) 주역(周易) 상서( 尙書) 춘추좌씨전( 春秋左氏傳) 문선( 文選)등 입니다
六頭品은 신라의 17官等 체제에서 6등급을 말합니다 신라에는<골품제도가 있는데 17官等 체제에서 1등급에서 5등급 까지 왕족(성골 진골)이며
그 다음 6등급이 六頭品으로 귀족입니다
○.독서삼품과 (讀書三品科)
신라 귀족들이 唐나라로 유학(留學)가는 것이 유행하여 국학이 외면받게 되자 788년 (元聖王4년)에 새로운 관리 등용 제도로 <독서삼품과>
를 설치합니다 <독서삼품과>는 학생의 학업 능력을 3등급으로 나누어 관리를 등용하는 제도입니다 입학 자격은 五頭品 子弟 以上입니다
<삼국사기 권10 신라本紀10 元聖王4년 >기록에 의하면
春秋左氏傳 禮記 文選을 읽고 그 뜻에 능통하면서 논어 孝經을 읽은 사람← 上品 , 곡레(曲禮)논어 孝經을 읽은 사람 ← 中品 ,
곡례 효경을 읽은 사람 ←下品입니다 ,<독서삼품과>는 고려시대 부터 실시했던 科擧制度의 시초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3. 고려시대 교육기관
○.국학 (國學)
고려시대 太祖 때에 신라의 국학을 계승했습니다
○.東西學堂
1261년 (元聖王2년)에 儒學교육을 위해 설립한 중등 교육기관
○.국자감(國子監)
국자감은 중국 隨나라에서 처음 실행한 국가 최고 교육기관으로 唐宋 代에 발전하여 淸代까지 국가 최고 교육기관의 역할을 했습니다 고려는
992년(成宗11년)에 인재를 양성하는 최고 교육기관으로 국자감을 설립했습니다 신라시대 부터 이어온 국학을 계승하여 唐.宋의 제도를
참작하여 국자감을 설립했습니다
학과는 孝經 논어는 1년 ,상서(尙書)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은 2년, 주역(周易) 모시(毛詩) 주례(周禮) 의례(儀禮)는 2년, 예기(禮記) 좌전
(左傳)은 3년으로 교수받아야 하고 律學 書學은 국어 설문 자림(字林) 삼창(三倉) 이아(爾雅)등을 독서해야 합니다
4. 조선시대
1) 교육제도 (1) 초등 교육기관 ,
○.서당은 국가에 관련되지 않고 국민이 자발적으로 운영하던 교육 기관입니다 서당 (書堂)은 마을 단위로 1개씩 있었고 사립으로 운영되어
양반이나 평민의 자녀도 자유롭게 입학할 수 있었고 학습은 천자문 동몽선습 통감절요 사서삼경 등 입니다 서당은 글을 가르치는 훈장(訓長)의
수준에 따라 교육 수준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2).중등 교육기관
○.사부학당(四部學堂)
조선시대 四部學堂은 고려시대 元聖王 2년 (1261년)에 설립된<東西學堂>에서 起源했습니다 漢城의 동부 서부 남부 중부, 四部에 설립한 조선시대
국립 중등 교육기관입니다 입학 자격은 10세 以上 양반이나 西人(조선시대 仁祖 이후 주도권을 잡았던 당파)의 자녀들이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향교(鄕校)
四部學堂은 서울(漢城)에 설립한 국립 중등 교육기관이고 향교는 각 지방에 설립한 국립 중등 교육기관입니다
향교는 16세 이상 양반이나 鄕里 즉 조선시대 지방 관청에 소속된 하급 관리의 자녀가 입학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조선시대 후기에는 평민도
小學의 시험을 통과하면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향교에는 교생들이 토론을 하거나 강의를 듣는 明倫當이 있는데 明倫當 건물 좌우에는 東齊와
西齊라는 숙소가 있습니다
양반들이 거주하는 숙소는 東齊이고 평민들이 거주하는 숙소는 西齊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양반들은 儒生이라고 불렀고 평민은 校生이라고
부르는 등 신분의 차이는 있었습니다

안동 ,屛山書院
○.서원(書院)
서원은 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 1495년~1554년)이 始祖입니다 사부학당(四部學堂)이나 향교가 국립인데 비해 서원은 사립 중등교육기관입니다
입학 자격은 科擧시험의 小科에 합격한 사람 또는 학습에 의지가 있고 품행이 단정한 사람 중에 儒林의 승인을 받은 사람은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3) 고등 교육기관 ,
○.성균관(成均館)
조선시대 성균관은 현재의 국립 대학교에 해당합니다 고려시대 국자감의 전통을 계승하여 설립한 조선시대의 국가 최고 교육기관입니다
고려시대 992년에 국자감이 설립되었는데 1275년에는 국자감이 국학으로 개칭되었고 1298년에 국학은 다시 成均監으로 개칭되었다가
1308년에 성균관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이후 1356년에 다시 국자감으로 개칭되었다가 1362년에 최종적으로 성균관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국자감 →국학 →성균감(成均監) →성균관 →국자감 →성균관)
성균관의 입학 자격은 科擧시험의 小科에 합격한 사람 즉 生員 進士를 우선 입학시켰는데 만약 定員이 부족하면 四部學堂의 生徒 중에 15세 以上
이며 小學 四書 五經 이 3과목 중에 1과목이라도 능통하면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2) 과거제도( 科擧制度 )
조선시대에 양반이 되려면 科擧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필수였는데 양반들만 科擧시험에 응시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법적으로
평민 以上신분이면 누구나 科擧시험에 응시 자격이 되었습니다
(1) 科擧시험 응시 자격
科擧制度는 중국 隋나라에서 시작하여 宋 唐대에 발전했고 한국에서 시행된 시기는 고려시대 958년(光宗9년 )부터 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법전 <經國大典 권3 禮典 諸科>조항에 科擧시험 응시에 금지되거나 제한되는 사유에 대한 규정이 있는데 科擧시험 응시에 금지되는 사유에는
逆謀罪人의 아들이나 자손 ,뇌물을 받은 관료의 아들이나 자손, 재혼했거나 행실이 나쁜 부녀의 아들 및 손자입니다
그래서 평민은 科擧시험의 응시 금지 사유에 해당되지 않아 법적으로 科擧시험의 大科 文科에도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평민보다 신분이
높은 庶孼(양반의 첩의 아들)은 科擧 응시에 제한이 있었는데 大科 文科에는 응시할 수 없었고 무과(武科) 잡과(雜科)에는 응시할 수 있었습니다
잡과에는 통역 의과 음양과(陰陽科) 율과(律科)등 있는데 평민들도 비교적 儒學시험이 쉬운 武科나 잡과에 응시하는 비율이 높았습니다
(2).평민출신의 문과 급제자 (及第者) 及第者는 科擧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말합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科擧시험 문과 급제자의 평민 출신 비율이 太祖 때 40% ,正宗 때는 50%정도였습니다 조선 중엽에는 科擧시험 문과 급제자
(及第者)의 평민의 비율이 오히려 낮아져 中宗 때는 20% ,宣祖 때는 16%입니다 조선 후기에는 科擧시험 문과 급제자의 평민 출신 비율이 다시
높아져 正祖 때에 53%, 高宗 때는 58%입니다
조선중기 科擧시험 급제자의 평민 비율이 낮아진 것은 임진왜란으로 농업 수공업이 붕괴되고 인구가 감소했으며 조선사회가 중기에 접어들면서
양반의 문벌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라고 짐작하고 있고 조선 후기에는 科擧시험의 문과 급제자의 평민 출신 비율이 높아진 이유는 신분 사회의
붕괴에 있다고 짐작하고 있습니다
5.개화기(開化期)의 신분제 폐지와 교육의 확대
개화기는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1876년 부터 1910년 8월까지 말하는데 이 시기는 조선시대 후기 대한제국 시대와 겹칩니다
1886년 노비 세습제도가 폐지되었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도가 법적으로 폐지되었습니다 동시에 科擧制度가 폐지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사회적 변화로 신분제가 무너지고 있었던 것을 확인하는 것이었고 국민들의 교육의 기회는 확대되어 갔습니다
1) 근대적 교육의 시작
○ 개화기 (開化期) ,개량 서당
開化期 무렵 시대적 변화에 부응하기 위해 민간에서는 조선시대 부터 있었던 서당을 개량하여 신식학교를 설립하거나 새로운 형태의 서당을
신설하는 것이 진행되고 잇었고 정부에서는 공립학교 설립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개량 서당>은 儒學중심의 서당 교육에서 벗어나 서양에서 도입된 신학문의 교과서로 교육하며 수업 年限은 4년이며 신학문을 배운 지식인을
교사로 채용하여 운영했습니다
元山學舍. 五山學校 등은 기존에 있었던 서당을 개편하여 설립한 학교이고 <仁峴 서당>은 1882년에 설립한<개량 서당>입니다<仁峴 서당>은
1883년에는 < 한문 학원>,<종현 학원>등으로 불리다가 1906년에 4년제 啓星 보통학교로 개교했습니다
경성제국 대학 교수로 활동했던 일본인 小田 省吾는 <교육시론>에서 " 조선에는 서당이 많아 한자를 가르치고 있고 그래서 조선에서는 어디에
가더라도 무식한 사람이 거의 없는 상태이다 "라고 썼다고 합니다 구한말 당시 서당은 약2만개 또는 3만개 있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 한국 최초 근대적 학교
최초 근대적 학교는 공식적으로 1883년에 설립한 <元山學舍>라고 인정되고 있는데 최초 근대적 학교에 대한 논란은 있습니다 元山學舍가
설립되기 5년 전에 1878년에 설립된 <동래 무예 학교>가 최초 근대적 학교라는 의견, 1882년에 설립된 <仁峴 서당>이 최초 근대적 학교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동래 무예 학교>의 근거는 조선왕조 실록입니다 元山學舍를 설립할 당시의 기록에 “무예는 동래부(東萊府)의 규례를 본받아 출신과 한량(閑良)
200명을 선발하고 별군관(別軍官)을 처음으로 두어 달마다 의무적으로 시험을 보아 시상하였습니다 “
(高宗實錄 20권 高宗20년 10월 14일 4/4기사 조선개국 492년)
1883년에 설립된 同文學의 경우는 학교는 아니고 <외국어 통역자>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동문학(同文學)
1880년 개화기 조선은 서양의 여러 나라와 교류하며 조약을 맺게 되면서 외국어를 할 수 잇는 관료가 필요하다고 깨닫고 외교 업무를 담당할
기구와 외국어 교육기관의 설립을 추진합니다 1882년 12월에 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기구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을
설치하고 1883년 4월에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부속기관으로 외국어 교육을 목표로 하는 동문학(同文學)을 설치했습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朝美修好通商條約)체결 이후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協辦 (외교부 차관)및 총세무사(總稅務司)로 부임한 독일인
묄렌도르프(paull Georg von Mollendorff )는 동문학의 설립에도 참여했습니다
김만식(金晩植)이 동문학의 掌敎를 맡았고 묄렌도르프가 중국에서 데리고 온 2명의 중국인(吳仲賢, 唐紹威)을 교사로 채용하고 후에 영국인
핼리팩스가 영어 교사로 채용되었습니다 동문학은 학생들을 모집하여 한국 최초 외국어 교육 기관으로 1883년 8월 1일에 첫 출발하였습니다
2) 근대적 학교 설립

○ 육영공원
同文學이 폐쇄되고 1886년 육영공원이 설립되었습니다
○ .동래 무예학교
1878년 부산 동래부(東萊府)에 설립된 무예 학교입니다 이 학교는 1732년 東萊府使, 정언섭(鄭彦燮)이 세운 시술재(時術齋)의 후신으로 설립
되었습니다 동래 무예 학교의 설립자는 정현석(鄭顯奭)입니다 정현석은 황해도 관찰사.김해부사(金海府使), 덕원부사(德源府使) 진주목사
(晋州牧使)등을 지낸 관리(管理)이며 후에 원산학사(元山學舍)를 설립합니다
○ .원산 학사 (元山學舍)
1880년 4월 개항된 함경남도 元山에는 일본의 영사관이 설치되고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면서 일본인 상인들 200명이 元山에 도착합니다
일본 상인들의 활동에 위기를 느낀 원산 덕원(德源)지역 주민들은 일본 등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느끼고 그 대책으로
세로운 학문을 교육시키기 위해 신식 학교 설립을 추진합니다
원산(元山)덕원( 德源)지역 주민들은 학교 설립을 위해 기금을 마련하여 당시 <德源腐史> 겸 <元山監理>를 재직하고 있던 鄭顯奭에게
학교설립을 요청합니다 1883년 8월28일 주민들의 요청을 받은 鄭顯奭은 학교 설립에 관한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했고 그 해 10월20일
공식 승인 받았습니다
초기에는 문예반 50명 무예반 200명을 모집했고 교과 과정은 필수과목과 특수과목으로 분류했는데 문무 공통 필수과목에는 산수 농잠 격치
기기 광산채굴 등을 가르쳤고 특수과목에는 문예반은 經義, 무예반은 兵書를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원산학사(元山學舍)
는 문예반만 갖추고 소학교로 변경됩니다
원산학사는 당시 정부의 개화 정책에 따라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아 근대적 학교를 설립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있습니다
○.오산학교(五山學校0
오산학교는 이승훈(李昇薰)이 1907년 평안북도 定州에서 기존의 서당을 개량하여 설립한 4년제의 중등학교입니다 과목은 역사 지리 영어 산술
물리 생물 창가 체조 훈련 등입니다
1911년 日帝가 조작한 105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新民會에 가담하고 있던 安明根이 西間島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모금 활동을
하였는데 이것을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암살하기 위해 모금 하는 것이라고 일본 경찰이 날조하여 新民會 회원 128명을 체포하고 105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사건입니다
이때 五山학교의 설립자였던 李昇熏은 신민회 회원과 함께 체포되었는데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 대표 33인에 참가하여 체포되고 3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新民會는 안창호(安昌浩) 양기탁(梁起鐸) 등이 결성한 비밀 단체로 국권 회복을 목표로 한 비밀단체입니다
일본 경찰은 오산학교의 교원들을 모두 검거하고 학생이나 인근 마을 주민들을 협박하며 학교 건물을 불태웠고 학교를 폐쇄했습니다 이후 1919년
7월에 조만식(曺晩植) 장지영(張志映) 등 노력으로 五山학교는 재건되었습니다

1895년 한성 사범 학교
3) 교사 양성을 위한 한성(漢城 )사범학교 설립
1894년 교육행정을 관장하는 學務衙門을 설치하여 科擧制를 페지했고 학교 교육에 있어 신분 제한을 페지했습니다 1895년 정부는 국민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기 위해 한성에 사범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과목은 수신 한글 한문 역사 지리 수학 물리 화학 습자
체조 박물 교직이며 본과는 2년제 속성과는 6개월로 운영했습니다
5 ) 근대적 인쇄소와 교과서 편찬
1883년 博文局 설립 漢城旬報를 발간 ,학부 편집국에서 교과서 간행 ,1884년 3월 민간에서 근대적 인쇄소 겸 출판사 廣印局을 설립했습니다
한국 최초 근대식 교과서는 1895년 <학부 편집국>에서 간행한 국민 소학 독본입니다
6 )최초 근대적 초등학교
1895년 7월19일 칙령 제145호 <조선 小學校令>이 공포됩니다 1894년에 개교한 서울 校洞소학교는 한국 최초 초등학교 라고 알려져 있는데
원래 조선왕실의 학교로 설립되었습니다 <한성 사범 학교>가 설립된 후 校洞소학교는 일반인 자녀도 입학할 수 있는 <한성 사범소학교>로
개편되었고 후에 校洞소학교로 개칭됩니다
한국에서 제일 오래된 초등학교 라고 알려진 <仁峴 서당>은 1882년 서울에서 개교했고 이후 1906년 <보통학교令>에 의거하여 계성(啓星)
보통학교로 개편되었는데 1895년<小學校令>공포 이후 정부의 認可를 받아 공식적으로 개교한 소학교를 최초 초등학교 라고 한다면
校洞초등학교 라고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6 .일제강점기 교육
1).皇國臣民化 내선일체 교육
日帝는 皇國臣民化 정책으로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요했고 학교 교육이나 교과서의 내용, 종교 언어 언론 등을 통제했습니다 일본 정부의 이민
정책에 따라 조선에도 많은 일본인이 정착해 살게 되었고 소학교도 일본인 학교, 한국인 학교가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1910년 당시 일본인의 초등학교는 <공립 소학교>라고 했으며 한국인의 초등학교는 <공립 보통학교>라고 했는데 1938년 이후 한국인의
초등학교도<소학교>라고 개칭되어 1941년에는 조선이나 일본 학교도 모두 국민학교로 개칭되었습니다
황국신민화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조선인의 학교에 일본인 교원(敎員)을 파견합니다 1910년에는 81명 ,1919년에는 769명 일본인 교원들이
조선인의 <공립 보통학교>에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총독부 통계 연보>에 의하면 1910년에서 1918년까지 보통학교 교장은 모두 일본인이었는데 1919년 3.1운동 이후<차별 완화>라는 명분으로
18명의 조선인이<보통 학교>교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만 1919년 당시 전국 <공립 보통 학교>의 535개 중에 3.3%에 그치는 것이었습니다
1945년까지 당시 국민학교 교장은 대부분 일본인이었습니다 한국인 교원과 일본인 교원의 비율을 보면 일본인 교원은 1910년에서 1936년까지 27%`34%까지 증가했고 ,1940년에는 47%를 차지합니다
2) 그러면 학교비(學校費)와 교원(敎員)의 봉급
○학교비
1929년 기준으로 일본의 교육비는 歲出의 81%인데 비해 1930년 조선총독부의 교육비는 歲出의 3.5%에 불과했습니다 그나마 조선총독부의
교육비도 조선 거주의 일본인 학교의 교육 비용으로 부담되었고 조선인 학교 교육 비용은 해당 지역 주민들의 공금에서 부담하게 했습니다
총독부는 1920년 <조선 學校費令>을 공포하고 조선인 학교 교육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군수 도지사 부윤에게 자문을 구하는 기구로 <學校費
비평회>를 설치했습니다
학교비(學校費)는 <조선 공립 보통 학교>의 교육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입니다 학교비의 戶稅 납입 의무자는
40전, 가옥세는 한국인 1호당 10전을 부담했다고 합니다
○,교원들의 봉급과 수당
한국인 교원의 봉급에 비해 일본인 교원은 2배 3배 더 많은 봉급을 받았는데 이것은 총독부가 일본인 교원들에게 1910년 3월28일 칙령 제135호
에 의거하여 판임관봉급령<判任官俸給令>을 적용했고 한국인 교원들에게 1910년 9월 30일 칙령 제403호에 의거하여 <한국인 文官의 分限
및 급여에 관한> 건을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인 교원들에게 판임관 봉급령(判任官 俸給令)을 적용했다는 것은 일본인 교원을 조선총독부의 관리로 취급했다는 뜻입니다
1910년대 일본인 남자 교원 봉급은 50원이며 ,한국인 남자 교원 봉급은 19원이었습니다 조선 사회에서 불만이 나오자 총독부는 1919년 10월
한국인 교원에게도 일본인 교원과 마찬가지로 <判任官 俸給令 >을 적용합니다 그럼에도 1920년 부터 1934년 까지 일본인 남자 교원의 봉급은
112원에서 119원이며 한국인 남자 교원 봉급은 55원이었습니다
한국인 교원 보다 일본인 교원 봉급이 2배 많았던 이유는 일본인 교원들은 외지수당 국경수당 사택비 등 여러 수당과 함께 가봉(加俸)을 받고
있었는데 한국인 교원들은 <판임관>이 적용된 이후에도 외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여러 수당과 加俸을 받지 못했습니다
加俸은 봉급의 60%를 더 얹어 주는 수당인데 게다가 일본인 교원들에게 주는 加俸은 총독부의 보조금에서 지급되는 것이 아니고 한국인에게
부과된 學校費에서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조선의 <학교비 평의회>에서 “아직 학교를 세우지 못한 面이 있는데 학교 설립을 위해 고액의 봉급을 받는 일본인 교원들을 줄이고
능력있는 한국인 교원들을 채용해야 한다” 는 주장이 나왔다고 합니다
3).고등교육
경성제국 대학은 조선 총독부의 예산으로 운영되었는데 전체 학생 70%는 일본인이거나 조선 출신 일본인이었습니다
4)서당에 관한 규칙
조선에서의 소학교 교육은 의무교육은 아니었으므로 가난한 집안 아이들은 서당에 다녔습니다 서당에서는 한글교육과 조선어의 수업이 진행
되고 있었으므로 총독부는 서당을 통제하기 위해 1918년 2월 <서당에 대한 규칙>을 공포합니다
내용은 >서당 개설에 도지사의 認可를 받아야 한다 ,총독부가 편찬한 교과서만 사용해야 한다 ,총독부가 적격자 라고 인정하지 않은 사람은
교사가 될 수 없다 ,道장관은 서당을 폐쇄할 수 있다 > 입니다
이런 총독부의 통제로 조선인들의 日帝에 대한 반감으로 서당은 오히려 1919년 이후 일시적으로 증가했지만 계속 감소합니다 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1922년 당시 서당은 2만 5,482개였으나 1940년에는 서당이 4,105개로 감소했다고 합니다
5) 사립학교 탄압

사진 오른쪽 희미한 글씨 . 私立日新學校 제5회 졸업생 이라고 써있습니다 촬영은 1914년으로 추정 1924년은 잘못 쓴 것 .(현재 울산 병영 초등학교)
일본인 교사는 칼을 착용하고 교단에 올랐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합니다 이런 상황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교육이 나라를 구하는 것이라고
깨닫고 사립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합니다 日帝는 조선 민족 교육울 실시하는 사립학교를 탄압하기 위해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데 1908년 8월 26일 <私立學校令>을 반포하고 그 해 10월 1일에 시행합니다
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의 보호 및 병합>에 의하면 1908년 京城시내에 약100개 사립학교가 있었고 전국적으로 5.000개의 사립학교가
있다고 했습니다 ,<사립학교 令>은 사립학교 설립시에 學部代臣에게 認可를 받도록 규정하는 것입니다 1909년 총 1,708개 사립학교 중에
認可를 받은 사립학교는 242개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日帝의 사립학교 탄압 정책으로 1908년 5,000개의 사립학교가 1910년에는 1.973개 ., 1919년에는 690개로 감소했습니다
1911년 10월<私立學敎令>을 <私立學校 규칙>으로 개정하여 사립학교 설립시에 총독부의 認可를 받도록 규정합니다
1915년 3월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지방 장관들에게 사립학교 설립을 하지 못하도록 했고 기존의 사립학교의 경우 교육 내용이나 교원 학생들을
감시하면서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위배되는 요소가 있다고 판단되면 학교를 강제로 폐교시켰습니다
6) 조선<공립,보통학교>증설
日帝는 황민화 정책으로 조선의 <공립 보통학교> 설립을 제한적이지만 허용합니다 1919년 3面에 1校 정책 .1929년에는 1面에 1校 정책으로
조선의 ,공립 보통학교는 증가합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조선인 지원병 모집을 계획하며 조선의 청소년에게 일본어 교육을 확대해야 한다고
느끼고 초등 교육 확대를 추진합니다 학교 증가에 따라 학급수도 증가해 일본인 敎員은 더 증가하여 1942년에 일본인 당시 (국민학교 )교원은
2.936명 증가했고 한국인의 국민학교의 교원은 9.654명이 증가했습니다 인구 비율로 보면 일본인 교원 비율이 높습니다
1910년 당시 조선에 官公立 초등학교가 100개 있었는데 1945년 까지 2.834개로 증가했습니다 그런데 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사립학교는 1908년
5.000개에서 1910년에는 1.973개로 감소했고 1919년에는 690개로 감소합니다
중요한 것은 공립학교는 증가했지만 사립학교나 서당은 감소했는데 여기에는 日帝의 정치적 목적이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반일 애국 정신을
고취시키는 사랍학교나 서당은 탄압하고 日帝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맞는 官公立 학교의 확대를 추진하여 아직 일본어가 서투른 아이들에게
일본어를 국어로 가르치며 황민화 교육을 강화했다는 것입니다
7.일본인 교사의 증언

이 책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태어나 19세 부터 대구<달성 공립 국민학교>에서 5년간 교사로 근무한 일본인 스기야마 토미(杉山)씨의 기록 <식민지
조선에 살면서>입니다 스기야마씨가 직접 쓴 것이 아니고 구술서이며 이 책을 쓴 사람은 나카노 하키라(中野晃)서울 특파원입니다 스기야마는
당시 조선인 아이들을 충량한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해 뛰었던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마음으로<식민지 조선에 살며서>를 출간 했다고 합니다
이 책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나의 아버지는 조선에 건너와 처음에는 전라도 영광에서 넓은 땅을 소유하며 과수원울 경영하면서 재산을 모았다 이후 경상도 대구로 옮겨와
모자점을 하였는데 호황을 누렸다 이런 부모 덕분에 그는 조선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조선어를 몰랐고 ,조선어를 몰라도 어려움이 없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것을 모르고 교사 생활을 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후 국가총동원 체제에서 조선인 아이들을 훌륭한 황국신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교사 자신의 책무라고 믿었다
1940년 조선에 창씨개명이 실시되었다 조선식 이름을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는 것이었다 신입생 중에 조선인 이름의 아이가 있으면 집으로 보내
부모에게 일본식 이름을 받아 오도록 조치하였다

1943년 대구 神社 앞, 1학년 아이들과 스기야마(杉山)
스기야마는 자신이 근무했던 대구 <달성 공립 국민학교>는 조선어가 금지였고 교실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해야 했다 만약 조선어를 쓰면 체벌을
주었다 1943년 1학년 아이들은 일본어를 몰랐다 운동장에서 아이들에게 "앉아라"라고 호소하면 아이들은 모두 "스와리나사이"라고 일본어를
흉내내었다 스기야마는 아이들이 생소한 일본식 이름에 자신의 언어로 말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라고 상상해 보았다
스기야마는 일본의 패전을 조선 땅에서 맞이했다 1945년 8월 15일 그 날은 방학중이었는데 학교로 부터 교직원들을 긴급 소집한다는 연락을 받고
학교로 달려갔더니 운동장 한편에 큰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학교 측은 나를 포함한 교사들에게 수업으로 쓰던 각종 서적 교재 공문서 등을 구덩이에 넣으라고 지시하였다 경황이 없어 주섬주섬 가져왔던 각종
서류들을 구덩이에 넣었는데 이내 불을 붙였다 서류들이 파지직 소리를 내며 불타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16일 나는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한 시점에서 부모님이 있는 곳에 가기 위해 줄을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조선인 청년이 말을
걸어 왔다"아가씨는 일본인 아니요? 여기는 이제 일본이 아니고 조선이니까 아가씨는 줄을 서지 말고 나가세요"라고 하면서 나의 앞으로 끼어들었다
놀라 주위를 살펴 보았지만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무작정 부모님이 있는 곳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가르치던 제자였다 제자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나를 발견하고 자전거에 태워 주었다 스기야마는
제자의 자전거 뒤에 타고 가면서 물었다"김군 지금 조선인들이 외치는 것이 무슨 뜻이지? " 그것은 "대한독립 만세" 스기야마 선생은 "대한독립 만세"
라는 외침도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1945년 8월 15일 ..그 날 위안부 강제징용 창씨개명 한글탄압 등 얼마나 많은 진실이 日帝에 의해 불태워졌는지 우리는 상상조차 어려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