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를 지킨 사람들
광복과 함께 독도도 되찾았지만, 막 독립한 대한민국의 국력은 미약하였습니다. 게다가 1950년에는 6.25전쟁까지 발발하면서 독도를 지킬 여력을 갖추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 틈을 노린 일본에서는 1952년에서는 불법적으로 영토비를 세우고 돌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조선시대의 안용복처럼 민간인이면서도 우리 땅 독도를 지키기 위해 앞장 선 분들이 있었으니 홍순칠과 그 분이 조직한 독도의용수비대였습니다.
홍순칠은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난 뒤에 국군에 입대하여 함경북도 청진(淸津)까지 진격하였으나, 원산 근처에서 전상을 입고 1952년 7월 특무상사로 전역한 후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전쟁으로 경황이 없는 틈을 타서 일본이 독도를 노리는 걸 보고 직접 지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1953년 4월, 홍순칠은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하였는데 독도의용수비대의 편제는 군인 출신을 중심으로 하여 각각 15명으로 구성된 전투대 2조, 울릉도 보급 연락요원 3명, 예비대 5명, 보급선 선원 5명 등 모두 45명이었으며, 장비는 경기관총 2정, M2중기관총 3정, M1소총 10정, 권총 2정, 수류탄 50발, 0.5톤 보트 1척 등이었습니다. 독도의용수비대의 주요 구성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수비대 대장 - 홍순칠
수비대 부대장 - 황영문
제1전투대 - 대장 서기종
제2전투대 - 대장 정원도
후방지원대 - 대장 김병열
교육대 - 대장 유원식
보급대 - 대장 김인갑
독도의용수비대가 활동 중 1953년 6월에는 일본 오게(大毛) 수산고등학교 연습선 지토마루 호를 독도 서도 150m 해상에서 나포해 이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냅니다. 7월 12일엔 독도의용수비대는 독도에 접근하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 PS9함을 발견하고 경기관총으로 사격을 하여 순시선을 격퇴하였습니다. 그리고 첫 전투에서 장비의 보충이 시급함을 깨달은 홍순칠 대장은 다시 육지로 나가 어렵게 M2 2정과 박격포 한 문을 구입하였습니다.
1953년 7월에는 국회에서 울릉경찰서 소속 경찰관을 경비대로 독도에 파견하여 상주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6.25전쟁의 영향으로 충분한 지원을 할 형편은 부족하여 경비임무를 맡은 인원은 5명뿐이었고 상주를 위한 숙소는 독도수비대에 의존하였으며, 준비된 장비도 많진 않아 독도의용수비대는 계속 활동을 하게 됩니다.
1954년에는 독도 동도(東島) 바위벽에 "韓國領(한국령)"이라는 석 자를 새겨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8월 23일에는 다시 독도에 접근하려는 일본 순시선을 총격전 끝에 다시 격퇴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포기하지 않고 11월 21에는 1,000t급 일본 순시선 PS9, PS10, PS16함이 항공기 1대와 함께 독도를 포위하듯이 접근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때도 독도의용수비대는 총격전을 벌여 격퇴하는데 성공합니다.
이 전투로 일본 쪽에서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항의각서를 보내고 독도우표가 첨부된 우편물을 한국으로 반송시켰습니다. 그리고 일본해상 보안청의 함정은 매달 정기적으로 20일에서 24일 사이 출현하기도 했지만 독도의용수비대의 장비는 계속되는 위협에 대초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홍순칠은 가짜 대포를 설치하여 일본의 눈을 속여가면서 독도를 지켜갑니다.
이후 전쟁으로 인한 혼란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정부도 독도 수비를 지원할 여력을 갖추면서 독도의용수비대는 경찰에 독도수비를 인계하고, 독도경비대가 독도를 지키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