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일본서기』와 『고사기』에서 전하는 일본 건국의 주인공인 니니기노미코토의 강림과 『삼국유사』가 전하는 수로왕의 강림을 비교해본 결과 강림 방법이나 장소(지 명), 도구가 일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니니기노미코토가 다카치호(高千穗)의 쿠지후루타케(龜旨峯)에 강림했을 때 『여기는 좋은 곳이다. 왜냐하면 가라쿠니(駕洛國)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조칙(詔勅)을 남겼다는 사실도 니니기가 가야 출신이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같은 주장에 대해 반론(反論)이나 이의(異意)를 제기하는 일본 학자는 아무도 없다.
에가미교수는 또 니니기노미코토의 증손(曾孫)인 진무(神武)가 규슈 휴가(日向)에서 동정(東征)에 나서 세토내해(瀨戶內海)를 거슬러 올라가 일본열도의 심장부인 오사카( 大阪), 교토(京都), 나라(奈良)지방인 긴키(近畿) 평야를 정벌하고 일본 천황가의 제1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신빙성 있는 고고학적(考古學的) 물증으로 입증하였다. 일본 사학계가 에가미교수의 주장에 대해 함구불언(緘口不言)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고고학적 물증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야가 일본 건국의 주체였다면 한반도의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일본문화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삼국중에서도 특히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백제 인들의 숨결은 1천5백여년이라는 장구한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도 퇴색하지 않고 오늘날 야마토(大和) 평원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백제가 일본과 국교를 맺은 것이 4세기 후엽인데 아직기(阿直岐)와 왕인(王仁)이 일본에 건너가 『천자문』과 『논어』를 가르쳤다고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서기 404년에 아직기는 오오진(應神) 천황이 태자로 있을 당시 그의 스승이 되었으며, 405년에는 아직기의 천거로 왕인이 『천자문』 한 권과 『논어』 열 권을 가지고 와 오오진 천황의 태자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다. 결국 백제가 낳은 아직기와 왕인박사는 일본 황실의 스승 역할을 했고 찬란한 아스카문화를 꽃피우게 했던 셈이다.
영원한 문화민족 구다라(百濟)1985년 12월29일 나라현 아스카촌(明日香村)에서 대량으로 발굴된 목간(木簡)에 백제인 아직기의 후손에 관한 기록이 담겨져 있음은 이같은 역사적 사실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최고(最古)의 역사책인 『고사기』에는 왕인의 이름이 와니키시(和邇吉師)로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서기』에는 와니(ワニ)라고 기록돼 있는데 그의 훌륭한 면면이 잘 소개돼 있다. 도쿄 우에노공원(上野公園)에는 왕인박사를 기리는 비가 세워져 있어 관람객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나는 백제유적 탐사 첫번째로 왕인박사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오사카와 교토의 중간 지점인 히라가타(枚方)에는 왕인공원과 왕인묘가 있다. 이곳은 1731년 묘소가 고 증돼 묘역이 조성되었으며 1938년에는 오사카부(大阪府) 사적으로 지정돼 정결하게 잘 다듬어져 있었다. 입구 안내문에는 정중한 경고문이 부착돼 있었다. 「강아지나 개를 데리고 이 묘역에 들어오지 말 것이며, 슬리퍼를 신고 들어오거나 고성방가도 삼갈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모든 일본인들에게 문자와 학문을 깨우쳐준 백제인 스승을 존경 하는 뜻이 담겨 있는 안내문이었다.
또 묘 옆에는 흰색 칠을 한 4각 각목에 「잘 오섰어요 백제 왕인박사 묘에」라고 철자법은 다소 틀렸지만 또렷하게 한글로 써놓은 표지판도 세워져 있었다. 1천6백여년 전 백 제에서 건너간 학자가 일본인의 영원한 스승으로 그들 마음속에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나는 이번 탐사에서 왕인을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를 우연히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왕인신사」가 있다는 기록은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백제왕이 하사한 칠지도(七支刀)가 보관돼 있는 나라현 덴리시(天理市)의 이소토카미신궁(石上神宮)을 가려고 복잡한 골목길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골목 안쪽에 아담한 도리이(鳥居)가 눈에 들어와 차를 세우게 하고 신사 곁으로 다가갔다. 나라에 있는 신사라면 십중팔구는 백제와 연관 있는 신사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신사 정원에 세워 놓은 안내판을 보니 와니시타신사(和爾下神社)였다. 틀림없는 왕인(王仁)의 신사였다. 그들은 『고사기』에 왕인을 와니(和爾), 그리고 『일본서기』에 와니(ワニ)라고 표기해 놓고 있지 않은가. 내용을 살펴보니 고대 야마토(大和) 정권에서 일익을 담당했던 와니씨의 본거지로 추정되는 곳에 이 신사를 건립했다고 적혀 있었 다. 그렇다면 이곳이 왕인박사의 거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 신사가 있는 덴리시도 나라현에 속한 도시이며, 나라현은 야마토국의 수도이자 중심지로서 왕인이 활약 했던 본거지였기 때문이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신사 배전 앞뜰에 두 마리 소(牛)가 마주 보고 있는 석상이 안치돼 있었다. 소는 예로부터 우리 한국의 대표적인 상징 동물이다. 일본의 건국신화에 등장 하는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天照大神)와 그의 남동생 스사노(須佐之男)의 신화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나라 소시모리(牛頭峰)」의 소머리봉(牛頭峰)도 한반도를 지칭하고 있지 않은가.
와니시타신사를 나와 인근에 있는 이소노카미신궁을 찾았으나 백제왕이 하사했다는 칠지도는 보지 못했다. 이유는 궁내청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칠지도는 한일 양국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신비의 칼이다. 명문(銘文)에 새겨진 「供(공)」자에 대한 해석 차이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학자들은 이 供자가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일본 학자들은 백제왕이 일본천황에게 「헌상했다」는 의미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뜻 있는 일부 일본학자들간에도 이에 대한 논쟁이 가끔 벌어지는 것을 보면 우리 학자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칠지도를 보고 싶다는 말에 난색을 표하는 사무소 직원을 뒤로 하고 히라 가타의 백제왕신사를 찾았다.
왕인묘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백제왕신사는 백제사적(百濟寺跡) 뒤편에 세워져 있다. 1970년대에 이 지방 유지들이 찬란했던 옛 조국 백제를 그리워하여 성금을 모아 이처럼 훌륭한 신사를 건립한 것이다. 한편 백제사적은 드문드문 축대만 보여 이곳이 절터였음을 보여줄 뿐이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듯했으나 현재 나라현의 가스카와카미야신사(春日若宮神社)의 경내에 세워져 있는 백제사와 비슷하지 않았나 추측됐다.
나라의 백제사는 원래는 9중탑이었으나 지진으로 소실돼버려 다시 지으면서 현재의 3중탑으로 축소 재건했다고 기록돼 있었는데, 히라가타의 백제사는 탑마저 사라진 채 축대만 남아 있고 아기자기하게 심어놓은 소나무들만이 나그네의 울적한 심사를 달래줄 뿐이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해 발길을 다시 나라의 아스카로 돌렸다.
오늘도 기미가요를 듣고
김씨 가야의 김수로왕을 찬향하고 있지요 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