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유명한 곳은 오사카 근교의 히라카타(牧方)시에 있는 백제왕 신사다. 이곳은 7~8세기에 ‘구다라노 고니기시’(百濟王)의 씨족이 세거했던 곳인데, 즉 말 그대로 ‘일본 속의 작은 백제’였다. 8세기에 이곳에 건립된 사찰이 소실되고 없어졌지만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왕실의 일파를 기리는 백제왕 신사는 그대로 살아남아 지금도 수많은 관광객에게 명소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지내는 제사의 대상 중 가장 오래된 인물은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들인 선광(善光)이다. 그는 애당초 의자왕의 대리인으로 왜국에 상주했는데, 나라가 망하고 형제인 부여풍의 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아예 왜국에 그대로 잔류하고 만다. 거기에서 그가 왕족의 대우를 계속 받았다는 것은, 일본 조정으로부터 원래 성인 부여씨 대신에 ‘구다라노 고니기시’, 즉 백제왕이라는 성씨를 특별히 사성(賜姓)받았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패망한 백제의 왕족에게 이만큼 예우를 해주었던 여러 이유 중 하나로, 일본 귀족사회에서 백제 계통의 가문들이 선점하던 지위, 즉 이미 보유하고 있던 영향력을 지적할 수 있다. 예컨대 백제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純陀 또는 淳陀)의 후손들이 왜국에서 야마토노 후히토(和史)라는 성을 갖게 됐는데, 그 가문 출신인 다카노 니이가사(高野新笠·?~790)는 고닌(光仁·재위 770~781) 천황의 애첩으로, 다음 세대인 감무(桓武·재위 781~806) 천황의 생모였다. 일본 천황가를 “모계 쪽은 백제계”라고 이야기할 때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키는데, 그런 상황에서는 백제 왕족이면 일본에서 그 위상에 상응하는 예우를 쉽게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백제왕 선광도 일본의 귀족 관료 사회에 성공적으로 편입됐다. 9세기 초까지만 해도 그 후손들은 속된 말로 ‘잘나가는’ 쪽에 속했다. 그중 한 명인 백제왕 경복(敬福·697-766)이 말년에 상당한 요직인 형부경(刑部卿·법무부 장관)에까지 올랐다. 그가 743년 일본 동북 국경 지방인 무쓰노구니(陸奧國)의 지방관이 되고 거기에서 금을 발견해 749년 900냥이나 천황에게 진상해 도다이지(東大寺)의 대불(大佛) 조성을 비로소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다. 도다이지를 구경하는 수많은 한국 관광객들은, 과연 그 커다란 불사를 위해 필요했던 황금을 오늘날의 이와테·아오모리현인 무쓰노구니에서 백제계 광산 기술자들이 산출했을 것이란 사실을 인식하기나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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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귀족사회를 모두 차지하고 건설,건축,개발등 모든 고대일본의 기초는 백제인 망명인들의 솜씨로군요?